【사도행전 15장】을 일반적으로 “예루살렘 공회의”라고 하기도 한다. 그러나 사도행전 6장에서 교회 문제로 회의할 때와 사도행전 15장에서 회의는 성격이 다르다. 15장의 회의는 두 교회 이상(예루살렘과 안디옥) 그리고 1차 전도 여행으로 설립된 많은 교회들의 일치를 위한 회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의회(synod)라고 하고, 두 교회 이상이 한 가르침으로 한 교회를 이루는 방식을 이루었다. 교회는 한 교회이다. 한 시대 여러 지역, 문화, 계층에서 이루어지지만 한 교회를 이루어야 한다. 그리고 여러 시대에서 한 교회를 이루기 때문에 교회는 보이지 않는 교회(invisible church)이다.

그리스도인은 한 교회(지역과 시대)를 힘써 이루는 것이 바른 자세이다. 교회는 왕국 시대(kingdom), 즉 국가가(nation) 형성되기 전부터 공적 개념을 이루었다. 참고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왕국이 아니라 공화국이다. 공화국은 국민이 세운 나라이고, 왕국은 왕이 세운 나라이다(입헌군주제).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그리스도의 나라(Regnum Christi)이다. 교회사에서 공회의를 사도행전을 1회로 잡지 않고, 325년 니케아 공회의를 첫 공회의로 잡는다. 그것은 신학에서 공식 공회의를 교회사 시대에 황제가 소집한 것을 【사도행전 15장】분류하기 때문이다.

예루살렘 공회의는 계시 시대(extraordinary era)에 교회가 필요에 의해서 형성한 유대인과 이방인이 믿음으로 하나됨을 결정하는 결정적인 회의였다. 어쩌면 가장 중요한 회의라고 볼 수 있고, 이 회의 결정된 것을 16세기 루터가 다시 주장하며 종교개혁을 완성시켰다고 볼 수 있다. 루터의 이신칭의는 바울 신학에서 새롭게 창출한 개념이 아니라, 예루살렘 공회의의 결정을 재확인시킨 것이다. 메이천 박사는 이 때 주도했던 인물을 바울로 세우고, 신학자로 정의했다. 바울이 신학자인 것은 서신서 집필자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신성 교리를 확립하여 공회의를 주도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이 세운 그리스도의 신성 교리는 율법과 비교할 수 없는 율법의 제정자이며 구원자이며 만유의 주로서 신적 위치를 확립한 것이다.

1. [행 15:1-35] 예루살렘 공회의. 이방인이 그리스도인이 되면서 유대에서 온 그리스도인들이 준수하고 있던 모세의 법 때문에 충돌을 일으켰다(1절). 이방 교회에 예루살렘에서 온 사역자들이 자기 수준으로 가르쳤기 때문이다. 그들의 주장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아야 하는 것이었다(1절, 갈 2:8). 이방 지역을 선교하는 바울과 바나바는 그러한 주장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변호했지만, 좀처럼 문제는 진정되지 않았다. 결국 이 문제를 위해서 바울과 바나바 그리고 몇 사람을 예루살렘 사도와 장도들에게 보내어 결정하도록 했다(2절). 교회의 파송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베니게(Phoenicia)와 사마리아 지역에서 이방인이 주께 돌아온 일을 말할 때에 그들이 다 크게 기뻐했다(4절). 안디옥에서 베니게까지 해상 교통을 이용했고, 베니게에서 사마리아를 거쳐 육로로 예루살렘으로 들어갔다고 볼 수 있다. 예루살렘에 도착하여 교회와 사도와 장로들에게 영접을 받고 지금까지 일을 보고했다(5절). 그런데 바리새파 중에서 어떤 사람이 일어나 이방인에게 할례를 행하여 모세의 율법을 지키는 것이 마땅하다고 주장했다(5절). 그들의 주장은 이방인의 편입까지 거부하지 못했다. 주 하나님의 법과 경륜은 순결하여 누구도 완벽하게 거부하지 못한다.

참고로 사도행전 15장에서 구원의 할례를 주장하는 유대의 형제, 바리새파에서 믿은 사람에 대해서 부정적 뉘앙스를 표현하지 않았다(1, 5절). 그러나 갈라디아서에서 사도 바울은 그들을 향해서 다른 복음(Other Gospel)을 전하는 자로 규정하며 저주(詛呪)를 선언했다. 다른 복음은 틀린(incorrect) 복음이며 복음을 반대하는(contrary) 복음이다. 복음은 유일하지만 다른 복음은 다양하다. 첫 다른 복음이 복음에 할례를 첨가시키는 것이었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이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이루신 자유에 대해서 웅변했다(그리스도의 사역).

예루살렘의 사도와 장로들이 모여 이 일을 논의했다. 많은 변론이 있었지만, 사도 베드로가 일어나서 성령으로 주는 증언과 효력으로 깨끗하게 됨을 주장했다. 믿음의 차별이 없음과 자신도 율법의 멍에를 메지 못했다고 고백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διὰ τῆς χάριτος τοῦ Κυρίου Ἰησοῦ πιστεύομεν σωθῆναι)”고 주장했다(11절). 이것은 “주 예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심을 통해서 [우리가] 믿어 구원받음(we believe that we will be saved through the grace of the Lord Jesus(ESV)/We believe it is through the grace of our Lord Jesus that we are saved(NIV))”으로 어순을 배열하는 것 합당하다. 메이천은 이 공회의를 바울이 주도했다고 평가했다. 성경에는 베드로 사도가 가닥을 잡은 것으로 말씀하고 있다. 메이천이 바울을 주도적으로 평가한 것은 갈라디아서에서 게바가 안디옥에서 보여준 실수 때문이었을 것이다.

베드로 사도의 발언 후에 잠잠해지자, 바나바와 바울이 사역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역사를 보고했다(12절). 공회의 의장인 야고보가 모든 말을 취합하여 이방인이 돌아옴이 하나님의 뜻임을 밝히며, 이방인이 하나님께 돌아옴에 어떤 장애도 놓지 않기를 선언했다(14-21절). 무너진 다윗의 장막을 이방인과 함께 세울 것이다(사 54장). 구약성경에 이방인 구원에 대한 지시는 풍성하다. 결국 야고보가 이방인이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을 괴롭게 하지 말아야 한다고 합의를 선언했다(19절). 야고보의 단독 결정으로 볼 수 없고, 사도와 전체의 결의를 야고보가 선언했다고 보아야 한다. 그렇지만 이방인에게 완전한 자유를 주는 것이 아니라,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 묵매어 죽인 것, 피를 멀리하는 내용의 목회서신을 보냈다(20절). 야고보의 제언은 각 성에 있는 유대인의 충격을 배려하기 위함이다(21절).

사도와 장로와 온 교회가 바울, 바나바, 바사바(유다), 실라를 안디옥 교회로 파송하기를 결정했다(22절). 그리고 공회의 결정을 목회서신으로 작성해서 보냈다. 바울과 바나바를 보냄은 바울과 바나바의 가르침이 정당하다는 것을 인준한 것이고, 유다와 실라를 보내어 예루살렘 교회와 일치를 보여준다. 안디옥 교회는 예루살렘 교회와 한 믿음 체계에서 한 교회됨을 기뻐했다. 안디옥에 사는 그리스도인들도 자기 행위에 어떤 제약을 감수해야 했지만, 참 교회와 연합을 기뻐한 것이다. 안디옥 교회에서 유다와 실라가 형제들에게 복음선포와 권면하며 굳게 했다(32절). 유다와 실라의 가르침을 안디옥 교회가 기쁘게 수용함으로 예루살렘 교회와 믿음의 일치를 확인했다. 유다는 모든 과정을 보증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33절).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에서 주의 말씀을 가르치며 전파했다(35절).

2. [행 15:36-41] 바울과 바나바의 분리. 바울이 바나바에게 전해 전했던 성을 방문(시찰)하자고 제안했다(36절). 바나바는 마가를 동행시킬 것을 제안했고 바울은 거부했다. 둘은 심하게 다투어, 결국은 사역팀이 분리되었다.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구브로로 갔고, 바울은 실라를 택한 후에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갔다. 교회 역사에서 가장 강력한 교구는 알렉산드리아였는데, 그 지역을 개척한 사람이 마가 요한이다. 마가가 연약해서 1차 전도 여행 도중에 이탈했지만, 바나바의 도움으로 탁월한 사역자로 세움을 받았다. 마가는 마가복음을 집필했고, 바울이 죽기 전에 보면서 교제했던 믿음의 사역자이다. 바울이 그렇게 사랑하던 디모데와 디도 등은 성경을 집필하지 않았지만, 마가는 중요한 복음서를 기록했다. 바울이 마가를 버린 것이 실수가 아니며, 바나바와 바울이 다툰 것이 잘못이 아니다. 바울의 체계적이고 열정적인 사역자와 너그럽고 관용적인 바나바와 같은 사역자가 있어야 한다. 사역자의 미숙함은 미숙함이며 그 과정에서 갈등하며 선한 경주를 하며 주의 이름을 선전(宣傳)한다. 바나바와 바울이 다투었지만 결코 교회는 포기하지 않았고, 주의 교회는 든든히 세워졌다. 바울은 마지막 순간에 마가를 보고 싶었고 교제하며 믿음의 일치와 위로를 이루었다(딤후 4:9-13). 믿음의 사역자들이 사역 가운데 갈등을 피할 수 없다. 그러나 주를 위한 정진도 멈출 수 없다. 주께서 아름다운 화합을 주실 것이며, 이 땅에서 화합을 이루지 못한다면 주의 나라에서 화합을 이룰 것이다. 가장 무서운 것은 주를 위한 헌신과 복음 전파를 게을리 하거나 쉬는 것이다.

3. 전능하신 하나님, 주 예수의 은혜를 입어 믿음으로 주의 구원을 이루게 하시니 고맙습니다. 주께서 주신 성령의 능력으로 주의 복음을 전하게 하옵소서. 이 믿음의 도리가 만민에게 전파되게 하옵소서. 주께서 택하신 자들이 전해진 복음을 듣고 구원받는 역사가 가득하게 하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고경태 목사(형람서원, 한영대 겸임교수)
고경태 목사(형람서원, 한영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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