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의적 설교비평은 강단의 품격을 높여

  • 입력 2020.10.13 1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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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철 연속칼럼】 말씀 사역자에게 고하는 말씀 (10)

한명철 목사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은혜와 평강교회를 담임하며 30권의 저술과 글쓰기를 통해 복음 사역에 애쓰는 목회자다
한명철 목사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은혜와 평강교회를 담임하며 30권의 저술과 글쓰기를 통해 복음 사역에 애쓰는 목회자다

번영의 햇살을 쬐면서 변질되는 설교

예전에는 설교에 대한 평이라는 것이 별로 없었다. 신학교에서 설교학 시간이면 배움의 과정상 유명 설교인의 특정 설교 몇 편을 학문적 비평의 프리즘에 놓고 평가했다. 학생들 간에 서로의 설교에 대한 비평도 교환했다. 바깥세상은 달랐다. 적어도 교회에서는 목사님의 설교를 비평할 생각은 꿈도 꾸지 못했다. 그만큼 설교는 보통 말과 다르게 느껴졌다. 일종의 차단막과 보호막이 쳐져 있었다. 교회나 설교자들이 그렇게 꾸민 것이 아니라 자연히 그런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었다. 암울한 시기에 민중들의 가슴에 심겨진 복음의 이미지는 매우 강렬했고 순수했다. 지금에 비해 부족한 학문적 배경이었음에도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전율케 하는 메시지의 형체가 분명했다. 순수가 열정의 불길을 드세게 만들었고 열정 또한 순수의 투명도를 높였다.

일반 학문이라면 달랐을 것이다. 백척간두의 시대 상황에 나라와 민족의 기울기를 바로 세우고 안개 자욱한 시계(視界) 제로의 형국에서 방향등(方向燈)을 비추어야 했던 교회였기에 하나님이 부족한 설교자들을 비기(秘器)로 활용하셨다. 새 시대의 여명과 함께 교회는 한편으로는 부흥의 햇살을 쬐면서 다른 한편으로 열정과 순수가 바래지기 시작했다. 타원의 두 중심점처럼 고난의 풀무불을 헤쳐 나온 한국교회는 영광과 오욕의 시소(see-saw)를 타게 되었다. 학문은 금자탑, 은자탑을 이루었지만 열정은 식고 순수는 희미해졌다. 지금 세상은 춘추전국 시대를 방불케 한다. 자칭 타칭 설교의 고수들이 각양 신기술로 청중들의 눈과 귀를 사로잡고 가십과 최신 정보들을 성구 몇 구절로 마름질해서 무미건조한 성경적 설교에 기진맥진해 있는 청중들을 다독인다. 양서류처럼 날고 기는 날기사들, 이해득실을 따지며 치고 빠지는 치빠족들, 중간 숙주처럼 아첨하는 입술로 세력에 빌붙어 생존을 이어가는 말쟁이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이합집산이다.

 

말씀의 영광을 도적질하자 숨어버린 말씀의 능력

설교의 품격이 사라졌다. 설교의 자존감을 세워주던 성경중심의 설교가 세력을 잃으면서 척추에 이상이 생긴 것이다. 성경이 전하고자 하는 1차적 메시지보다 일상의 현안을 해석하고 문제풀이의 해답용으로 성경이 전락해버렸다. 여전히 우리의 설교 중심에는 성경이 있지만 말씀이 설교자를 통제하지 못하고 설교자에 의해 말씀이 억제당하는 기막힌 상황에서 예의 활력과 운동력이 자취를 감추었다.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음’을 우리는 설교로 드러내 보이지 못한다. 아무리 애를 써보아도 요지부동이다. 사람이 말씀의 영광을 도적질하자 말씀이 능력을 아예 숨겨버린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비평을 가한다면 열 번 백 번이고 대환영이다. 교회는 그동안 너무 안전지대에 머물러왔다. 지존무상의 자리에서 시도 때도 없이 넘치는 힘을 과시하곤 했다. 온 천하는 여호와 앞에 잠잠해야 하는데 여호와의 종들이 못된 송아지처럼 그 앞자리에서 영광을 도적질하고 즐기기 바빴다. 당신의 설교는 전혀 비평 대상이 아닌가? 무슨 근거에서 그리 확신하는가? 비평은 독약이 아니라 극약이다. 맹독을 다스리려면 극약처방도 불사해야 한다. 독은 독으로 잡아야 한다. 불뱀에 물린 자들은 장대 위에 달린 놋뱀을 바라보아 살았다. 뱀을 이기는 것은 뱀이다. 이열치열도 같은 이치다. 열을 이기는 것도 열이다. 쌍수를 들어 환영할 맘은 아니더라도 비평에 마음을 여는 것이 지혜다. 그것이 우리 자신의 상황을 개선시키는 첫 걸음이다.

 

자신의 설교에 가장 혹독한 비평가

‘비평’이란 단어 자체가 풍기는 섬뜩함을 지우기 어렵다. 요즘에야 설교비평이 제 자리에 앉아 제 할 일을 하지만 지금도 여전히 비평의 알약을 삼키기란 여간 난감하기 이를 데 없다. 끌어내리기 일쑤인 비평의 십자포화에서 끌어올려지기란 모래사장에서 바늘 찾기나 마찬가지다. 비평의 지뢰밭을 통과해야 적지 점령에 한 발 가까워진다. 좋은 설교자란 스스로가 자신의 설교에 가장 혹독한 비평가가 되는 것이다. 그런 정신으로 설교를 작성해서 첨삭(添削)의 과정을 거쳐 숨 쉬는 생명체로 강단까지 안고가야 한다. 설교의 첫 호흡부터 마지막 호흡까지 생명전달자인 설교자 개인의 표현방식을 따라 개개의 청중들에게 그 생명을 안전하게 안겨주어야 한 편의 설교, 하나의 메시지 전달이 완결되는 것이다.

칼의 다양한 기능들은 결국 소멸과 죽음으로 귀결된다. 그런데 살인검이라는 표현과 정반대의 활인검이란 말이 있다. ‘사람을 살리는 칼’이란 철학적인 의미와 정신적인 이미지를 살검의 정체성에 삽입하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설교비평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설교자를 죽이는 비평이 우위에 있겠지만 설교자를 살리는 비평도 적지 않을 것이라 여겨진다. 중요한 것은 누가 비평하며 누가 비평할 수 있는가? 하는 근원적 질문이다. 비평가의 인격이나 사용하는 어휘에 따라 비평의 격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비평의 기준 또한 매우 중요한 관점이다. 비평을 가하는 측이나 비평을 받아들이는 측이 상호 수용할 수 있는 기준을 세움이 우선되어야 한다.

 

창의적 설교비평은 강단의 품격을 높여

요즈음은 하도 교회가 욕을 많이 먹다 보니 목사나 설교에 대한 일반인의 시선이 곱지 않은 게 사실이다. 교인들의 기본자세도 옛날 같지 않다. 더욱 기가 막힌 것은 설교자 자신의 자조 섞인 푸념이다. “이것도 설교라고 하나?” 대학의 시간 강사가 스스로를 “보따리장수”라 격하시켜 칭하는 것 이상으로 목회자의 자조는 심각하다. 설교자는 안팎으로 따가운 시선을 받으며 더 힘겹게 근원적인 설교 사역을 감당해나가야 한다. 설교자를 총잡이에 비교하긴 어렵지만 어디선가 읽어본 기억이 난다. 스나이퍼가 정조준해서 목표물을 정확히 맞히듯 상황에 맞게 설교를 잘 전개해나가는 친구 목사를 칭송하면서 자신의 설교는 산탄총처럼 쫘악 퍼져서 목표물을 정확히 맞히지 못한다고 했단다. 작은 새들을 잡을 때면 저격용 소총보다 산탄총이 훨씬 효율적이듯 대상이 누구냐에 따라 모든 설교가 제 기능을 하기에 역시 잘 하는 설교, 잘 못하는 설교의 대비는 피하는 것이 좋다. ‘잘 못하는 설교가 잘못한 설교는 아니다.’

설교자 수난론을 들먹이며 설교비평에 치도곤을 안기는 경향도 있지만 한국교회의 저력이라면 이젠 설교비평을 두려워할 때는 지났다고 본다. 비평을 위한 비평이나 악의, 모함, 비방, 기타 불순한 동기로 비평하는 것이 아니라면 견실한 비평은 오히려 장려되어야 옳다. 전문적인 비평 엘리트를 육성하는 것도 해볼 만한 시도다. 비평가는 바른 비평을 방해하고 사이비 비평 세력화를 꾀하려는 불순세력과 맞서 싸우며 ‘외로운 검객’의 길을 걸어야 한다. 교회는 비평에 대한 근시안적 시선을 버리고 강단의 품격을 위해 오히려 창의적인 비평에 열린 태도를 견지해야 한다.

어쩌면 비평에 대한 서양인들의 열린 마음에 비해 동양인들은 아무리 좋은 비평이라 할지라도 일단은 경색된다. 비평의 언저리에 깔려 있는 비난의 기운을 접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비평이라는 날선 표현보다 특징이란 덜 예리한 용어를 사용함도 고려할 만하다. 설교의 특징이란 관점에서도 얼마든지 비평 내용을 담을 수 있지만 받아들이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한결 수월할 수 있기에 대안이 될 수 있으리라. 비평이든 특징이든 설교자 개인을 겨냥한 시도는 금물이다. 비평가는 설교자가 아니라 설교 자체를 평가함에 국한시켜야 한다. 설교자의 삶이나 언행도 설교의 중요한 축을 이루므로 설교자 역시 비평 영역에 포함시켜야 한다며 비평의 칼날을 단검에서 장검으로 바꾸는 이들도 있다. 잘못하면 인신공격의 빌미에 휩싸이게 되고 비평의 본체인 설교 자체보다 설교자를 향해 시위를 날리기 쉽다. 그럴 경우에 역으로 비평가의 비평정신에 회의를 품고 비평가의 삶과 언행을 조사해서 비평가의 자격 시비를 걸어온다면 할 말이 없게 된다. 적어도 우리가 매사에 역지사지(易地思之)의 태도만 붙들어도 부수적인 문제로 뒤엉켜 앙앙불락하며 본질을 흐리게 하는 우(愚)를 범하진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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