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훈아의 호소력 짙은 메시지와 설교자
반백년이나 노래 속에 묻혀 살아온 싱어송라이터 나훈아는 대중의 가슴을 파고드는 호소력이 남다르다. 그의 콘서트는 입장료가 만만치 않다. 그럼에도 늘 매진을 기록해왔다. 노랫말도 정감 넘치고 한국인의 정서에 안성맞춤이다. 소크라테스를 “테스형”이라 부를 만큼 시대를 뛰어넘는 너스레도 거북하지 않다. 단 한 번도 빌보드 차트에 거명되지 않았지만 한국인이라면 그의 노래 서너 곡쯤은 즐겨 부른다. 그는 탁월한 메신저다. 시적 감수성이 뛰어난 노랫말도 그렇고 여과 없이 구사하는 경상도 사투리는 거칠고 투박함에도 구수하고 정겹다. 노래할 때의 동작과 표정, 약간 어눌한 듯한 멘트는 그야말로 압권이다. 사람들이 그의 노래를 즐겨 부르고 노랫말에 고개 끄덕임은 그가 의도했던 아니했든 어떤 메시지에 설복되었음을 뜻한다.
20대 초반에 맞닥뜨린 키에르케고르는 필자의 영웅이었다. 난해한 그의 글은 읽기 쉽진 않았지만 여러 번 읽으면서 친숙해졌다. 개중에서 아브라함의 모리아 사건을 관조한 <공포와 전율>은 그가 느낀 공포나 전율보다 차라리 경이로운 느낌이 강했고 약혼녀 레기네 올젠과의 파혼을 강행한 그가 무척 낯설어보였다. 그것은 모리아산에 독자를 바친 아브라함의 희생에 견줄 만한 희생이었지만 숲속의 나뭇가지에 뿔이 걸려 이삭 대신 바쳐졌던 번제할 어린양이 키에르케고르에게는 나타나지 않았음이 필자에겐 더 살 떨리는 공포와 전율이었다. 레기네 올젠을 이삭처럼 다시 돌려받을 수 없었기에 그의 독신생활과 이른 별세는 당시 필자의 마음을 울적하게 만들었다. 나훈아 식으로 지금 “고르형”에게 물어도 하나님 앞에 홀로 선 단독자의 실존은 오리무중일 것이다.
한 마리 거미처럼 말씀을 사출하는 설교자
설교자는 허공에 달린 한 마리의 거미처럼 하나님 앞에 서있는 단독자로서 한 분 하나님을 경험해야 한다, 기하학적 구조를 따라 쳐진 거미줄처럼 설교자의 세계를 구축하고 난폭한 바람과 비의 위세를 극복하며 자신의 생존을 위한 먹잇감 확보에 만전을 기해야 한다. 거미는 항문 가까운 배의 끝에 위치한 방적돌기(紡績突起, spinneret) 실샘에서 가늘디가는 실을 생산하여 허공에 달린 거미집(spider web)을 만든다. 실은 자기에게서 나온다. 설교자 개인이 사출하는 메시지만이 가장 자기만의 메시지다. 누군가의 설교문을 모방하거나 일부라도 표절함은 가장 악랄한 형태의 기만행위다. 하나님은 고사하고 한 사람의 청중에게도 지탄받을 망동(妄動)이다. 물론 인용을 밝히거나 양해를 구하고 남의 메시지를 전할 수는 있다. 그것도 한두 번이지 반복되면 유사(流砂)처럼 빠져나오기 어렵다.
거미가 자신에게서 실을 사출해내듯 설교자는 자신의 연구와 묵상을 통해 메시지의 씨앗을 얻고 자신만의 언어와 표현력으로 가꾸어야 한다. 본문과 제목과 문장화시킬 어휘들을 선택하고, 가지치기를 통해 많은 자료들 중에서 주제에 맞는 내용들을 정리하기 위해 집중하고, 스케치에 해당하는 설교의 기본 도안을 위해 비슷한 작업이 익숙해질 때까지 반복하고, 하나의 뚜렷한 상(像)이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몰입한다. 선택-집중-반복-몰입은 사람에 따라 전후 차이는 있어도 성경의 섭렵을 통한 메시지 확보에는 필요불가결하다. “물을 건너 (사냥감을) 찾아다닌다.”는 섭렵(涉獵)이란 말처럼 전해야 할 메시지를 얻기 위해 두루 살핌은 매우 이로운 습성이다.
우주 광역망의 본체인 성경과 설교자
우리가 매일 접하는 것이 바로 거미줄로서의 웹이다. 직역하면 “세계광역망”인 www는 인터넷의 정보공간을 의미한다. 한두 끼 밥은 굶어도 웹을 보지 않으면 일상이 제대로 굴러가지 않는 느낌 속에 우리는 산다. 온 세상이 거미줄처럼 하나의 웹으로 세계 도처와 연결되어 있다. 거미가 사출하는 이상의 정보량이 이 웹을 통해 엄청난 속도로 솟구쳐 퍼져간다. 이렇듯 다양한 정보량을 웹에서 구하는 우리가 “우주광역망”의 본체에 해당하는 성경을 앞에 두고 진리 탐구가 서먹하다면 심각한 일이다. 성경 안에 진리에 관한 온갖 보화가 감춰져 있다. 성경이 진리라고 하면서 진리를 거들떠보지 않음은 어떤 말로도 납득하기 어렵다.
능력 있는 설교가가 되려면 웨슬리처럼 만독(萬讀)을 마다하지 않고 다섯 수레의 독서도 가볍게 여기는 독서광이 되어야한다. 나훈아의 노랫말이 감칠맛에 철학적 깊이를 느끼게 함도 그가 이를 위해 독서에 공을 들였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무엇보다 성경을 자주, 많이, 깊이, 꾸준히 읽어야 한다. 10만, 100만권의 서적을 탐독해도 성경을 읽지 않으면 설교자로선 빵점이다. 굳이 설교를 위해서가 아니어도 성경은 가까이 해야 하지만 설교에 숙명처럼 얽힌 설교자라면 성경 통달에 응당 목숨을 걸어야 한다. 50독, 100독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성경 말씀이 과연 영적 양식이라면 육신의 양식을 하루 세 끼 챙기듯 성경 말씀을 정기적으로 삼키는 것은 간과치 말아야 할 핵심이다.
난관을 헤쳐 나가는 노고를 지속할 설교자
필력(筆力)은 독서력을 넘어서지 못한다. 말씀의 힘 또한 성경 통달의 정도에 비례한다. 왜 굳이 성경을 그토록 강조하는가? 본문 텍스트는 고정적이요 불변이지만 인간이 처한 상황은 유동적이요 변화무쌍하다. 텍스트를 적용하는 상황으로서의 콘텍스트는 그 중요성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상황을 도외시한 텍스트 일변도의 말씀은 원리 고수에는 유리하겠지만 인식의 지평보다 가슴속 멍울 하나 지우는 것이 현안인 사람들에게는 우이독경(牛耳讀經)과 같다. 그렇다 하여 복합적인 인간 상황을 강조하다보면 텍스트의 원력(原力)이 반감되기 쉽다. 텍스트와 콘텍스트의 충돌을 방지하고 원활한 메시지 창출을 위해선 때와 사안에 따라 둘의 상보(相補)를 조율하면서 차분히 가다듬는 자세를 요한다. 콘텍스트를 해석하는 것은 텍스트이지 텍스트를 해석하는 게 콘텍스트는 아니다. 어쩌면 청중은 상황(context)에 적합한 말씀(text)을 구할지 모르지만 설교자는 적합 여부와 상관없이 말씀으로 상황을 해석해야 하는 고로 더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난제를 풂에 수학의 묘미가 있다면 설교 역시 이런 난관을 헤쳐 나가면서 영혼을 보살피고 하나님을 섬겨야 하기에 사역자로서 해볼 만한 과업이다. 헤쳐 나가는 노고의 힘겨움 끝에 다리를 질질 끌다시피 강대상에 오를지라도 부끄럽지 않은 성취감이 작은 낙으로 가슴에 새겨진다. “죽을 썼다”는 느낌이 들었을 때는 정말이지 살맛나지 않을 정도다. 죽지 못해 살긴 하지만 음식도 모래알 씹는 것 같고 설교 시간이 다가올 때마다 마음이 무게감에 눌려 흔적도 없이 가라앉아버린다. 초짜, 신참의 티를 벗어난 지 한참이고, 내공이 어느 정도 쌓였다 싶은데도 설익은 밥이나 죽밥 신세를 면치 못함은 대설교가라 해서 예외는 없다. 평생 학습과 평생 훈련에 진지할 이유로는 충분하다. 기필코 첫 설교를 준비하는 환희감과 마지막 설교를 가다듬는 비장감이 매 편의 설교 준비에 녹아들어야 한다. 아마정신과 프로정신이 함께 용해되어 훈련과 실전에 임해야 한다.
한 우물을 파고 한 분야에서 최고의 경지에 올라 마에스트로가 되는 것은 누구에게나 의미 있는 일이다. 다만 전문가가 되어 전문성에 매여 자신도 모르는 사이 정신적으로나 영적으로 내리막길을 걷기 쉽다는 경고를 허투루 듣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너무나 몸에 익고 편해서 상투적이 되거나 기억의 저장소 가장 깊은 밀실에 보관된 고정화되어버린 관념들을 원하는 시간, 원하는 곳, 원하는 분량, 원하는 방식대로 일사불란하게 활용함이 기계처럼 가동되어선 곤란하다. 기계는 유능해도 묵상하지 못한다. 묵상을 건너뛴 설교는 한편의 잘 짜인 설계도처럼 완벽해보여도 영혼을 구원하는 메시지로는 부적격이다. 설교자에게 묵상이 필요한 것은 그것이 지성과 영성의 격돌을 진정시키고 감성의 온도를 적정선으로 유지시킬 힘을 길러주기 때문이다. 정성을 쏟은 설교가 죽이 되든 설익은 밥이 되든 개의치 말고 계속 생명 살릴 밥을 짓는 수고를 중단치 않는 자세가 중요하다. 오히려 ‘죽’이기에 죽지 않고 일어나는 사람도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