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 22:1-3절] 부형들아, 내가 지금 너희 앞에서 변명하는 말을 들으라 하더라. 저희가 그 히브리 방언으로 말함을 듣고 더욱 종용한지라. 이어 가로되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태어났고] 이[예루살렘] 성에서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하는 자라.

바울은 천부장에게 발언권을 얻어 오순절에 예루살렘에 모인 유대인들 무리 앞에서 말했다(1절). 바울은 히브리 방언(in the Hebrew language, ESV, NASB, KJV, διαλέκτῳ)으로 말을 했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더욱 조용히 바울의 말을 경청했다(2절). 어떤 연구자는 히브리어가 아닌 당시 팔레스타인에서 통용되던 아람 방언(in Aramaic, NIV)이었을 것으로 추측하기도 한다.

바울은 자신이 다소에서 태어났고, 가말리엘(Gamaliel)의 문하에서 수학했다고 제시했다(3절). 가말리엘은 당시의 힐렐(Hillel)의 손자로 추정하여 힐렐파로 평가할 수 있다. 가말리엘은 모든 백성에게 존경을 받는 자이었다(행 5:34). 이와 같이 바울은 경건한 보수적 율법 교육을 받았고 그가 배운 율법의 지식대로 열심을 품고 하나님을 섬겼던 자이었다. 그래서 바울은 샴마이 학파(Shammai)로 분류한다. 그럼에도 바울은 자신이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엄격한 교육을 받았다고 제시하고 있다. 바울은 바리새인의 두 계파를 모두 완벽하게 통합한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다(빌 3:4-6). 바울은 그 열심을 따라서 예수 추종자들을 박해하며 스데반을 죽이는데 동의했다. 바울의 열심은 당대에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열심이었다. 바울은 하나님께 열심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탁월한 지성도 참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헛된 신을 향한 열심을 품고 있었다.

[행 22:4-5절] 내가 이 도를 핍박하여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고 남녀를 결박하여 옥에 넘겼노니 이에 대제사장과 모든 장로들[장로들의 회]이 내 증인이라. 또 내가 저희에게서 다메섹 형제들에게 가는 공문을 받아 가지고 거기 있는 자들도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끌어다가 형벌 받게 하려고 가더니.

개종하기 전 바울은 유대교의 열심이 있었는데, 그 열심은 참 하나님의 열심이 아니었다. 그 열심으로 남녀를 결박하여 옥에 넘겼고, 대제사장과 장로들도 인정했다(4절). 사울은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었고, 대제사장과 장로들에게도 인정받은 유대인 중의 유대인이었다. 그 열심으로 대제사장에게 공문을 받아 다메섹으로 가서 거기에 있는 예수를 믿는 사람들(=배교자)을 잡아 예루살렘으로 끌고와서 형벌을 받게하려 했다. 사울은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였다(행 9:1). 그는 갈라디아서에서 말하기를,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핍박하여 잔해하고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유전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다”고 하였다(갈 1:13-14). 잘못된 지식에서 나온 열심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보다 오히려 그것을 거슬렀다.

[행 22:6-8절] 가는데 다메섹에 가까 왔을 때에<가는 중 다메섹에 가까이 갔을 때에> 오정쯤 되어 홀연히 하늘로서 큰 빛이 나를 둘러 비취매 내가 땅에 엎드러져 들으니 소리 있어 가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내가 대답하되 주여, 뉘시니이까 하니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라 하시더라.

사울이 살기가 등등한 상태로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친히 그에게 나타나셨다. 홀연히 하늘에서 비추인 큰 빛은 예수 그리스도의 광채 곧 그의 신성(神性)의 광채이었다. 사울은 부활하신 주님의 현현의 광채 앞에 엎드러졌다. 부활하신 주님은 사울에게 “네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라고 밝히셨다(8절). 즉 나사렛에서 자라셨고 대략 33년간 세상에 계셨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고 3일 만에 부활하셨고 40일 후에 승천하셨고 성령을 보내시며 지금도 만유를 통치하는 예수께서, 자기를 핍박하던 사울에게 직접 나타나셔서 그에게 자기 존재를 밝히셨다.

[행 22:9-11절]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빛은 보면서도[빛을 보고 두려워했으나](전통본문) 나더러 말하시는 이의 소리는 듣지 못하더라. 내가 가로되 주여, 무엇을 하리이까? 주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다메섹으로 들어가라. 정한 바 너의 모든 행할 것을 거기서 누가 이르리라 하시거늘 나는 그 빛의 광채를 인하여 볼 수 없게 되었으므로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의 손에 끌려 다메섹에 들어갔노라.

사울과 동행하던 사람들도 그 빛은 보았다. 자유주의 학자들 중에서는 사울이 사막의 강렬한 햇빛에 의해서 발작을 일으켰을 가능성도 제시한다. 그러나 바울의 보고를 따르면 바울과 동행하던 사람들도 그 빛을 보았고, 가던 길이 중지되었다. 그러나 하늘에서 들리는 음성은 사울만 들었다. 사도행전 9:7은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섰더라”고 증거한다. 우리는 이 두 구절들을 조화시켜 이해해야 한다. 그렇다면, 바울과 함께 있는 사람들은 홀연히 하늘로부터 비친 큰 빛은 보았으나 말씀하신 예수님의 형상을 보지 못했고, 어떤 음성과 소리는 들었으나 그 내용을 알아듣지는 못했던 것 같다(김효성).

주께서 바울에게 “정한 바 너의 모든 행할 것을 거기서 누가 이르리라”고 말씀하셨다. ‘정한 바’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바울을 향해 만세 전에 작정하신 것이 있음을 밝히셨다. 하나님께서는 창세부터 종말까지 모든 일들을 다 작정하셨고 때가 될 때 다 이루신다. 이사야 46:10, “내가 종말을 처음부터 고하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을 옛적부터 보이고 이르기를 나의 모략[계획, 뜻]이 설 것이니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 하였노라.”

하나님께서는 절대 작정자로서 창조주, 섭리주, 통치자이시다. 바울은 강력한 빛 때문에 앞을 볼 수 없게 되었고, 함께 동행 하던 자들의 손에 이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갔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는 그 핍박자를 한 순간에 꺾으셨다. 주께서 바울을 굴복시킨 것은 강력한 빛이 아니라 주의 말씀이었다. 사울은 십자가에서 죽었다고 확신한 나사렛 예수께서 살아계셨으며 자기에게 직접 말씀하시며 미래의 일들을 지시하셨다. 그럼에도 구체적인 복음의 내용은 사울에게 말씀하지 않으셨다. 사울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남과 구약성경에 대한 가장 정통한 학자, 아나니아를 통해서 복음을 들으며 복음을 정립했다고 볼 수 있다.

[행 22:12-16절] 율법에 의하면 경건한 사람으로 거기 사는 모든 유대인들에게 칭찬을 듣는 아나니아라 하는 이가 내게 와 곁에 서서 말하되 형제 사울아, 다시 보라 하거늘 즉시 그를 쳐다보았노라. 그가 또 가로되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이 너를 택하여 너로 하여금 자기 뜻을 알게 하시며 저 의인을 보게 하시고 그 입에서 나오는 음성을 듣게 하셨으니 네가 그를 위하여 모든 사람 앞에서 너의 보고 들은 것에 증인이 되리라. 이제는 왜 주저하느뇨? 일어나 주의 이름을 불러 세례를 받고 너의 죄를 씻으라 하더라.

바울은 다메섹에서 아나니나을 방문해서 하나님의 계획을 들었으며, 시력의 회복을 얻었다. 아나니아도 주께서 말씀하셔서 수동적으로 사울을 찾아갔다(행 9:13). 바울은 육신의 시력을 회복하였는데, 그것은 영의 눈도 열렸다. 복음서에서 맹인들이 눈을 뜬 것과 연결되어 이해할 수 있다. 아나니아는 사울에게 그들의 조상들의 하나님께서 사울을 택하셔서 자기의 뜻을 알게 하시며 저 의인 곧 예수 그리스도를 보게 하시고 그의 친 음성을 듣게 하심으로 모든 사람 앞에서 그가 보고 들은 것에 증인이 될 것이라고 전했다. 사울이 보게 되어 일어났을 때(행 9:18), 아나니아가 주의 이름 세례를 베풀었다.

기독교는 유대교와 이해는 우리 시대에 중요한 과제이다. 슐라이어마허 이후에 일신교로 종교통합 운동이 진행되고 있다. 기독교와 유대교는 기원이 같지 않다. 기독교는 누가복음 3장에서 기원이 정확하게 밝히고 있지만, 유대교는 신구약 중간기에 형성된 체제로 볼 수 있다. 1세기 팔레스타인은 여호와의 종교와 유대교가 혼합되어 판단할 수 없는 형편까지 되었다. 바리새인, 사두개인들은 자기 이익을 위해서 율법(legal)을 만들어 백성들에게 조상의 하나님이라고 속였다. 그들은 모세에게 주신 신의 이름을 부를 줄도 몰랐으면서도 대제사장과 바리새인 서기관의 명예를 갖고 있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결국 그 몰염치는 구약성경에서 예언한 메시아를 몰라보았으며, 죄없으신 메시아를 죽이는데 차도살인으로 로마의 손을 빌려 시도했다. 로마는 유대를 정복한 정복자였지만, 유대인의 손에 이용당했으므로 악하게 셈의 장막에 거한 것이다. 참된 셈의 장막에 있어야만 죄악에 죄악을 더하지 않게 된다. 하나님께서 바울을 부르신 것은 그를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과 사도로 사용하시기 위해서이었다. 사울은 예루살렘과 유대인의 사역자가 아닌 이방인의 사역자로 세움을 받았다. 그는 교회를 박해는 일인자에서 이방 지역에 교회를 세우는 일인자가 되었다.

[행 22:17-21절] 후에 내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성전에서 기도할 때에 비몽사몽간에 보매 주께서 내게 말씀하시되 속히 예루살렘에서 나가라. 저희는 네가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말을 듣지 아니하리라 하시거늘 내가 말하기를 주여, 내가 주 믿는 사람들을 가두고 또 각 회당에서 때리고 또 주의 증인(마르튀스)[혹은 ‘순교자’(KJV, NIV)] 스데반의 피를 흘릴 적에 내가 곁에 서서 찬성하고 그 죽이는 사람들의 옷을 지킨 줄 저희도 아나이다. 나더러 또 이르시되 떠나가라. 내가 너를 멀리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 하셨느니라.

바울은 후에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성전에서 기도할 때 환상을 보았다. 사울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기도할 때에 주께서 “예루살렘에서 나가라”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는 사울이 전한 증거를 받지 않을 것이라고 하셨고, 사울은 자기가 말하면 들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사울은 스데반을 죽이데 찬성하며 옷을 지킨 배후조종자였다. 그의 이력이 예루살렘을 구원하는데 도움이 될지 모른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다시 예루살렘 주민이 아닌 이방인에게 보낼 것이라고 말씀하셨다(21절). 복음은 과거 생활의 이력이 아닌 전도자의 입에서 나온 복음의 내용으로 효력을 발생한다. 바울은 어떤 이력도 효력이 될 수 없는 이방 지역에서 복음을 전도하였고, 이방 사람들은 복음을 잘 영접하였지만, 유대인들은 거부하며 훼방하며 박해하였다. 바울은 먼저 유대인에게 복음을 전도하는 방식을 종료하며, 예루살렘에 와서 유대인에게 먼저라는 구원의 도식의 종료를 선언하고 있다.

[행 22:22-23절] 이 말 하는 것까지 저희가 듣다가 소리 질러 가로되 이러한 놈은 세상에서 없이하자. 살려둘 자가 아니라 하여 떠들며 옷을 벗어 던지고 티끌을 공중에 날리니.

바울이 전하는 증거를 들은 유대인들은 “이러한 놈은 세상에서 없이하자. 살려둘 자가 아니라”고 외쳤다(22절). 개역에서는 “놈”으로 번역해서, 당시의 포악하고 살벌한 환경을 번역으로 전달시켰다. 개역개정에서 “자”로 순화시켰다. 유대교의 열심이 가득한 그들은 그들 조상의 하나님의 종을 핍박하고 살해하려는 데까지 나아갔다. 참람죄는 즉결 심판이 가능하다. 예수의 이름과 능력이 드러날 때 유대인의 무지가 폭로되기 때문에 시기심이 증폭되어 폭력으로 바울을 죽이려 무리를 선동하였다.

[행 22:24-30절] 천부장이 바울을 영문 안으로 데려가라 명하고 저희가 무슨 일로 그를 대하여 떠드나 알고자 하여 채찍질하며 신문하라 한대 가죽줄로 바울을 매니 바울이 곁에 섰는 백부장더러 이르되 너희가 로마 사람된 자를 죄도 정치 아니하고 채찍질할 수 있느냐 하니 백부장이 듣고 가서 천부장에게 전하여 가로되 어찌하려 하느뇨?[행하는 바를 조심하소서]66) 이는 로마 사람이라 하니 천부장이 와서 바울에게 말하되 네가 로마 사람이냐? 내게 말하라. 가로되 그러하다. 천부장이 대답하되 나는 돈을 많이 들여 이 시민권을 얻었노라. 바울이 가로되 나는 나면서부터로라 하니 신문하려던 사람들이 곧 그에게서 물러가고 천부장도 그가 로마 사람인 줄 알고 또는 그 결박한 것을 인하여 두려워하니라. 이튿날 천부장이 무슨 일로 유대인들이 그를 송사하는지 실상을 알고자 하여 그 결박을 풀고 명하여 제사장들과 온 공회를 모으고 바울을 데리고 내려가서 저희 앞에 세우니라.

천부장이 바울을 영문 안으로 데려가라 명하고 그들이 무슨 일로 그를 대하여 떠드나 알고자 하여 채찍질하며 심문하도록 할 때 바울은 곁에 서있는 백부장에게 “너희가 로마 사람된 자를 죄도 정치 아니하고 채찍질할 수 있느냐?”라고 자기 시민권을 밝혔다. 바울은 채찍과 학대를 받을 위험 중에서 로마 시민의 특권을 사용하였다. 바울은 빌립보에서는 채찍과 투옥될 때까지 시민권을 밝히지 않았고, 아침이 되어서야 로마 시민권에 대해 말한 적이 있었다(행 16:37-39). 로마 제국에서 로마 시민권을 가진 자들에게는 특별한 혜택들이 있었다. 특히 그들은 재판에 있어서 부당한 대우를 받지 않을 권리가 있었다. 바울은 자기 권리를 적극 활용하여 예수를 증언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자기 권리를 부정하든지 활용하든지 어찌되었든지 주 예수의 이름이 전파되기를 추구하는 것이 바울의 사역 원리이다.

로마 시민권은 하나님께서 바울이 복음 사역을 위해서 예비하신 방편이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기적으로 그를 건져내실 수도 있으셨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반적 섭리의 방식은 그렇지 않았다. 기적으로 바울을 살려낸다면 인격 종교를 이룰 수가 없다.

로마의 법에 근거해서 자기 권리를 주장하며, 그리스도의 복음을 힘써 전했다. 그러나 천부장도 로마 시민권자이지만 로마의 명예가 아닌 세류와 야합하며 시민권자를 보호한다고 하면서도 고소자들의 눈치를 보는 시민권자 같지 않은 로마 시민권자였다. 로마 시민권자가 로마 시민권자의 편에 서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바울의 고소 사건을 확실하게 알아보려고 대제사장들을 불러 조사하였다. 이러한 과정도 예루살렘에서 그들이 예수를 거부하여 죽였을 던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니라 확실한 의지였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그들이 죽인 예수는 자기 섬긴다는 하나님의 독생자였다. 유대인들은 그들이 섬긴다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이 만든 신을 섬기고 있었던 것이다. 신이 다르면 믿음도 다르며 가는 길도 다르다. 그러나 섬기는 신이 같으면 믿음도 같아야 하고 가는 길과 결과도 같아야 한다.

고경태 목사(형람서원, 한영대 겸임교수)
고경태 목사(형람서원, 한영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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