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치는 자 많건마는 생명수는 말랐어라
“외치는 자 많건마는 생명수는 말랐어라”를 수 없이 불러왔음에도 듣는 자, 믿는 자의 배에서 생수를 터뜨리지 못한 채 설교의 쳇바퀴를 돌리는 우리의 서글픈 자화상은 아닌가! 불씨로 간직되었다가 불꽃을 일으키고 이내 번지는 불길 되어 산과 들을 삼키듯 그렇게 일렁거리던 불의 혀가 아니었던가! 말씀을 사모하는 뭇 영혼들을 마주 대할 때면 가슴이 울렁거리고 심장의 고동 소리가 세차게 우리의 고막을 울린 적이 몇 번이었던가?
퇴고를 끝내고 오랜 연구와 묵상 끝에 한 편의 설교가 완성되었을 때, 문자의 옷을 입고 문장의 색상으로 치장해 영혼에 생기를 전해줄 생명력이 두텁게 느껴져 올 때, 행간과 자간 사이에 몸을 숨겨 드러날 순간을 기다리는 언외(言外)의 조바심을 온 몸으로 감지하며 조급해 말라며 다독거릴 때, 천상의 메신저로 한없이 고양된 우리의 영혼은 더 없이 맑고 가벼웠다. 천사가 하늘을 나는 것이 스스로를 가볍게 여겼기 때문이라면 이런 가벼움이면 천상여행을 하고도 남을 일이다.
천국과 지옥을 경계 삼아 비행하는 말씀 사역자
하나님의 대언자로서 메신저는 천국과 지옥을 경계 삼아 말씀의 비행을 한다. 대개는 여호와께 성결이란 관을 머리에 두른 제사장처럼 천상의 고공비행을 하지만 하나님의 발등상인 세상의 현안들을 마주칠 때면 저공비행을 한다. 죄, 심판, 지옥과 같은 주제와 맞닥뜨릴 때면 비행을 포기하고 지하 동굴을 탐사하듯 전진한다. 높고 낮은 공중을 비행하든 지하 동굴을 더듬든 설교자가 다루어야 하는 주제들은 인간의 삶을 위한 하나님의 이야기다.
인간의 삶 중심으로 설교를 엮어나가면 넋두리를 벗어나기 어렵고, 하나님을 맴도는 이야기로 기세 좋게 전하면 현실감 없는 신화꾸러미에 휘감기기 십상이다. 설교의 묘미는 하나님의 이야기를 인간의 삶에 짜임새 있게 접목시키는데 있다. 앞뒤 길이가 길거나 짧지 않고 상하 높낮이가 틀을 벗어나지 않는다. 모자라지도 않고 넘치지도 않는 충족의 상태, 아귀가 딱 들어맞는 성공적 도킹, 그 완전무결함에 모든 설교자의 로망이 있으리라 본다.
배움의 능력으로 본문에 통달하는 말씀 사역자
본문에 대한 진지한 연구는 역사적이고 신학적인 관문을 통과해 여러 측면에서 정밀한 검증을 거친다. 정보의 출처가 정확하고 인용하는 소스도 정직하다. 여기까지가 하나님 이야기에 정통하기 위한 필수 과정이다. 본문에 대한 바른 관점을 확보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학자로서의 능력이다. 이것은 비단 학위 획득과 관련된 의미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럴 능력과 환경이 된다면 도전해서 이루어 실익을 얻으면 된다. 그렇지 못한 경우라 할지라도 낙담할 이유가 전연 없다. 학자의 영을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면 된다.
이사야 선지자는 “주 여호와께서 학자들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고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 줄 줄을 알게 하시고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들 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50:4) 학자(scholar)란 학문을 연구하는 사람 혹은 학문에 능통한 사람을 일컫는다. 대개 학자라 할 때는 배우긴 하되 뭔가 어떤 경지에 능통한 사람 곧 학식 있는 사람을 생각한다. 학자(學者)를 단순히 학생(學生)으로 여기지는 않는다. 이사야가 말하는 학자가 과연 우리의 상식선에서 인식하는 그런 학자인가? 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그렇지 않다. 여기에서 학자는 배움을 터득해서 남을 가르치는 교사(teacher)보다는 배움의 길에서 터득을 위해 부지런히 배우는 ‘제자’(disciple, NASB)로서의 학자다. 그런 배움의 능력으로 본문에 통달하는 지경까지 연구하는 것이다.
말씀에 설득 당해 핵심에 닿은 말씀 사역자
설교가 듣는 이를 설득해서 결단으로 이끄는 것이라면 이의를 제기하고 싶은 마음을 돌려놓아 설교자의 선한 의도에 부합될 때 한 영혼이 설복(說服) 당했다고 말할 수 있다. 설교 메시지의 옷을 걸쳐 입은 모습과 흡사하기 때문이다. 청중을 설복시켜 설득에 이르도록 하는 능력은 혀의 ‘열림’에 있으며, 본문에 대한 한밤의 묵상 끝에 아침마다 알아듣게 되는 귀의 ‘뚫림’에 있다. 필자가 염원하고 추구하는 학자상은 가르치는 학자보다 배우는 학생 같은 학자다. 평생학습을 화두 삼아 쿵푸(工夫) 연마에 정성을 쏟는 소이(所以)도 여기 있다.
성경 통달을 목적 삼는 것은 성경 말씀을 적재적소에 활용되도록 자유자재로 인용하는 능력을 쌓기 위함이 아니다. 그보다는 성경 말씀을 바로 알기 위해서다. 달리 말하면 정말 성경 말씀 구절구절에 설득되고 싶어서다. 한 사람의 설교자가 성경 말씀에게 설득당하지 않고 청중을 설득하려는 시도는 욕심이다. 내가 듣지 못했는데 들은 것처럼 들으라고 말할 수는 없다. 내가 얻지 못했는데 청중을 향해 얻으라고 도전하기는 어렵다. 진솔한 설교자는 회중을 설득하기 전에 자신이 먼저 설득되기 위해 말씀에 깊이 잠긴다. 말씀에 설득당해 핵심에 닿으면 청중을 설득하기 위한 구체적 작업에 돌입한다. 자신이 말씀에 설득당한 경이로운 경험을 모두에게 기대하지만 회중의 반응은 늘 복합적이어서 기대에 못 미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설득의 효율을 높이기 위해 절치부심한다.
청중을 설득하는 기쁨보다 말씀에 설득 당하는 기쁨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사학>에서 그가 설파했던 설득 가능의 근거는 매우 적절한 통찰이라 생각한다. 까다로운 회중을 어떡해서든 설득해서 메시지 사정권내에 진입시키는 설득은 기술이요 능력이다. 기술은 배우고 능력은 개발해서 설득의 고지를 회중보다 먼저 점령하면 설교자로서는 이보다 좋을 순 없다. 대학자인 그의 통찰을 요약하면 이렇다. 화자나 인품이나 지식, 전문성이나 경험을 설득의 근거로 내세우는데 설교자의 품성이 회중에게 믿음을 줄 때 메시지를 수용하기 쉬운 것을 에토스적 관점이라 부른다. 설교자가 회중이 지금 기쁜 상태인지 슬픈 상태인지 감정의 변화를 정확히 파악해서 마음을 움직여 설득의 효과를 극대화시키는 것을 파토스적 관점이라 부른다. 설교자의 타당한(합리적인) 말 자체가 회중을 논리적으로 수긍케 하는 것을 로고스적 관점이라 부른다. 그는 설득의 비밀을 333원리(근거, 장르, 전략)로 정리했는데 본 논제와 연관된 세 근거인 에토스(ethos), 파토스(pathos), 로고스(logos)만 언급했다.
참으로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 성경의 바다는 그 심원의 끝을 알 길 없고 배움이 가능한 시간은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는다. 배우지 않고 적당히 살아가는 것도 인생의 한 방도다. 존 스튜어트 밀(J.S. Mill)은 “배부른 돼지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낫다”며 호언장담했지만 양쪽 입장을 살피기보다 제 입장 고수에 혈안이 된 현대인의 귀에는 거슬리는 표현이리라. 배고픈 소크라테스보다 배부른 돼지 쪽을 선호하는 현상이니 말이다. 나는 여전히 배고프다. 새로운 지식에 대한 공복감이 그렇고, 파고 또 파도 맑은 물을 내뿜는 성경의 원천을 향한 갈급함이 그렇고, 외치고 외쳐도 가슴 속을 울리는 함성에 화답하는 영혼의 외마디 비명이 그렇다. 누군가를 말과 글로 설득하는 즐거움보다 더 큰 낙은 한 마디 말씀에 내 영혼이 옴짝달싹 못하고 설득당하는 순간이다. 설득의 순간이 길어지고 그 횟수가 많아질수록 나는 장수하는 말벌보다 차라리 침을 쏘고 죽는 꿀벌이 되는 꿈을 꾼다. 오늘도 이 작은 꿈의 실현을 위해 말씀을 선택, 집중, 반복, 몰입을 이어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