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력과 기다림을 통해 뜻을 이루는 메신저
당신은 겸손하기 원해서 애초에 고양이를 섬세하게 그리려 하는가? 미래의 청사진을 그리며 꿈을 꾸는데 교만과 겸손의 잣대는 적합지 않다. 꿈의 사이즈에 따라 품성의 호불호를 생각하는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삶을 진지하게 살아가는 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크기만큼 꿈을 키울 수 있다. 성취 여부는 미래의 일이고 꿈을 만들고 조각하는 현 시점에서는 크고 확실할수록 좋다. 꿈마저 희미할 바에야 꿈꿀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몇 걸음에 불과하더라도 천리를 행군하는 자세로 걸음을 내딛고 한 모금의 생수뿐일지라도 수원지의 물을 마실 기세로 들이킨다면 호방한 기세에 삶의 분위기도 덩달아 확장되지 않을까?
깊은 웅덩이에 침잠하여 이무기들과의 세력 다툼에서 밀려나지 않고 천년에 이르면 여의주를 입에 물고 폭풍우를 휘감아 승천하는 용의 대변신을 이룬다. 메신저는 그냥 물고기가 아니다. 용의 변신을 꿈꾸며 천년 세월이 차기까지 자신을 지키며 싸움에 이골 난 전사들이다. 예를 들자면 모든 메신저는 승천하는 존재를 꿈꾼다. 공상이나 상상의 세계에서 꾸는 백일몽 정도가 아니다. 그것보다는 실현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실질적인 노력과 기다림을 통해 뜻을 이루는 이상(理想)으로서의 비전이다. 현실이 현실만으로 끝나버리면 그것은 곧 현실(現失)이듯, 이상이 이상으로 남겨지면 그것은 이상(異狀)에 다름 아니다.
울림이 있는 몇 편의 메시지가 세상을 바꾼다
고양이 같이 보일지라도 당신은 시작하면서 아예 호랑이를 그려볼 생각은 없는가? 꿈은 클수록 좋고 성취는 작고 알찰수록 경이롭다. 단꿈을 꾸려면 단잠에 들어야 한다. 단잠에 들어 내리는 빗방울 소리를 들으면 소낙비도 단비다. 당신의 능력이 하찮고 재주 없음을 한탄하지 말고 받쳐주는 배경이 없고 활발한 사역을 펼칠 무대가 마련되지 않음에 우울해 하지 말라! 당신은 지금 살아있고 꿈을 꾸며 비전을 만지작거리면서 평생 리필 되는 시간을 통째로 안은 채 지나간다. 적어도 메신저의 칭호를 외투처럼 걸치고 공사석에서 당신의 메시지를 전할 수 있는, 작아도 확실한 무대가 마련되어 있지 않은가? 당신의 꿈을 펼치기에는 결코 작지 않은 축복의 공간이다. 당신에게 주어진 시간과 공간을 기도로 잘 숙성시켜 당신에 의한 당신 자신의 메시지가 당신을 통해 외쳐지기까지 낙담과 의기소침을 매장시키고 의연하고 당찬 걸음을 내딛도록 하라! 필자의 작은 박수와 함성 가득한 마음의 큰 응원을 보낸다.
깊은 메시지는 메신저를 크게 한다. 깊은 메시지란 음미하며 들을 수 있는 지혜의 보고다. 그것은 울림을 통해 간헐적이긴 해도 꽤 지속적으로 원음을 재생시켜준다. 이를 여운이라 할 수 있고 파문으로 생각할 수 있다. 잔잔하지만 약동하는 생명력을 전해준다. 존재의 밑바닥까지 뻗어간다. 공을 들이는 메시지마다 이런 역사가 뒤따른다면 얼마나 좋으랴! 평생에 걸쳐 이런 메시지를 열 손가락만 채워도 탁월한 메신저다. 이를 홈런에 비한다면 큼지막함 홈런 10방이면 대언자로선 부끄러울 이유가 없다. 구약의 예언자들이 장, 단기간에 다양한 사역들을 펼쳤지만 지금 우리에게 전해진 메시지는 몇 편 되지 않는다. 그 몇 편의 메시지가 제국을 무너뜨리거나 세우고, 역사의 전진을 일시 중단시키거나 쾌속 질주케 만들었다.
수많은 희생과 고통 속에 나타나는 메신저
어떻게 한 사람의 메신저가 외친 짤막한 메시지로 인해 인류 역사의 방향이 정해지고 사조(思潮)의 물길이 다스려진단 말인가? 성경 역사를 통해 우리가 매번 읽어 감동받고 도전받으며 그와 유사한 메시지를 가다듬어 전하는 우리 마음에서 “어찌 그런 일이......” 하는 의아심이 똬리를 트는 것은 자가당착이 아닌가? 충분히 그런 일은 가능하다. 성경 역사만이 아니다. 기독교 2천년 역사를 통해 우리의 가슴을 뛰게 만들었던 메신저의 메시지들을 약간씩은 알고 있다. 고대에도 가능했고 중세에도 가능했다면 현대 후기의 이 기막힌 현실에서 그와 같은 메신저의 출현을 기다리는 것은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우리의 특권이다.
카알라일의 <영웅숭배론>은 우상숭배의 차원이 아니라 본받을 만한 지도자로서의 인물을 천거하지 않았던가! 그가 선정한 11명의 영웅은 인격적 성실성, 도덕적 통찰력, 무흠의 진실성이란 잣대로 스케치되었다. 플루타크의 <영웅전> 에 등장한 50명에게는 영웅 됨에 결격사유가 될 만한 흠집들이 있었지만 이런 약점들을 오히려 덕성 연마의 재료로 활용했기에 영웅으로 탈바꿈했다. 지금껏 엇갈린 평가 대상인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에서 위대한 지도자의 등장을 위해 역사적 정황이 때로는 어느 민족이나 집단에게 고통이 됨을 간파했다. 과연 모세의 출현을 위해 히브리인들은 애굽에서 430년간 종살이를 해야 했다면, 걸출한 해방자 고레스의 출현을 위해 유대의 남은 자들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 70년의 모진 세월을 견뎌야 했다면, 메시아의 탄생을 위해 베들레헴 인근의 유아들이 집단 학살을 당해야 했다면, 오늘도 한 메신저의 출현을 위해 누군가는 종살이하고 누군가는 포로가 되고 누군가는 죽임 당하는 희생처럼 아픔이 뒤따를지 모른다. 그런데 희생의 대상이 타인이 아니라 메신저 자신이라면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가!
키에르케고르의 길든 거위와 야생 거위의 우화
그 희생이라는 것이 목숨을 담보로 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열과 성을 다해 배우라 함이라면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가! 적어도 자신이 흘린 눈물과 땀은 스스로를 배신하지 않는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강단의 영웅은 결코 출현되지 않는다. 악의 타파자, 진리의 옹호자로서 세례요한처럼 세상의 죄성과 돌이키지 않는 영혼의 파렴치함을 단죄할 메신저는 실체는커녕 그림자마저 남기지 않은 채 물안개처럼 스러지고 말리라. 용이 되어 승천할 날만 기다리던 이무기는 천년이 되기 전에 경쟁자들에게 잡아먹히거나 천년이 차도 비상력(飛翔力)이 모자라 꿈을 이루지 못한 실패의 전범(典範)으로 조리돌림을 당하리라. 북구(北歐)의 어거스틴으로 일컬어지는 키에르케고르가 남긴 길든 거위와 야생 거위의 우화는 두고두고 묵상할 가치 있는 통찰이다.
창조주는 거위들에게 날개를 주어 보다 높은 목적을 위해 살도록 했다. 그들은 날개를 펴서 하늘을 날 수 있었고 고향인 축복의 땅에 이를 수 있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이방 땅에 그냥 눌러 살았다. 매 주일 집회에 모이면 한 마리의 숫 거위가 야생 거위의 영웅담을 설교하고 그들은 감동되어서는 아장아장 집으로 돌아갔다. 그들은 일요일의 설교에 힘을 얻어 비상하리라 마음먹었다. 그러나 월요일이 되면 실제 날고자 했던 거위들의 고충과 공포를 듣고는 나는 것을 포기하곤 했다. 그리고는 비상을 꿈꾸며 수척해진 거위들의 몰골을 보고 신의 은총을 받지 못한 것이라 수군거렸다. 길든 거위들은 매 주간 같은 일들을 반복했다. 그들은 토실토실 살이 찌게 되었고 성 마틴(St. Martin) 축제일에 잡아 먹혔다.
미지의 세계를 향해 날개를 퍼덕이라
현대 크리스천은 길든 거위처럼 매주일 집과 교회를 오가며 장엄한 성가와 세련된 설교를 듣고 은혜 받는다. 새로운 각오와 다짐으로 교회 문을 나선다. 그러나 월요일부터 시작되는 일상생활에서 위험이 도사린 미지의 세계를 향해 선뜻 날갯짓을 하지 못한다. 거룩한 삶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날개를 퍼덕여 저 높은 곳을 날고자 했던 이들의 많은 실패담과 고난으로 점철된 고백을 회상하며 다시 길들여진 삶에 주저앉아 버린다. 어디 회중뿐이겠는가? 그들에게 야생거위의 꿈을 전해주던 메신저들조차 자신에게 적용할 때면 천상의 메신저에 이르는 좁고 협착한 길을 걷기가 심히 부담스럽고 탁월함을 위해 바쳐야 할 희생의 대가가 너무 크다 생각되어 한 마리 야생거위로 창공을 날기보다 안락함이 보장된 길든 거위로 자족하며 사는 모습을 보인다. 거의 쉬운 길을 택한다. 그것이 대세이다 보니 그리 허물도 되지 않는다.
지금껏 많은 각오와 시도를 해보고 좌절하거나 중단하기를 얼마나 했던가! 몸이 편하고 번거로움 없는 일상이 보장되었다 해서 당신이 행복한 것은 아니다. 우리의 삶은 다시 살 수 없는 유일회적인 것인데 남은 삶을 허망한 반복의 레일 따라 굴러가게 할 것인가? 아서라. 말아라. 감히 권컨대 제발 한 번쯤은 시도해 보라! 길든 거위의 삶을 거부하고 베일 속에 가린 야생 거위의 삶을 향해 날개를 퍼덕여보라! 당신은 스스로 생각하는 이상으로 가능성이 꽉 들어찬 알짜배기 존재다. 속절없이 죽는 그런 죽음이 아니라 영적 탁월함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펼치다 천사의 안내를 받고 본향 집에 입주해야 하지 않겠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