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인 당신의 필살기는 무엇인가?
필살기(必殺技)의 유래는 운동경기에서 나왔다. 보통 레슬러나 복서가 상대를 한 방에 제압할 수 있는 자신만의 고유한 기술을 일컫는 말이다. “상대를 반드시 죽이는 기술!” 듣기만 해도 섬뜩한 표현이지만 메시지에 자긍심을 가진 대부분의 메신저는 자신만의 필살기 한둘 정도는 보유하고 있다. 언제 어디서도 그 본문, 그 해석, 그 적용, 그 영성에, 그 열정과 그 표현으로 임하면 매전필승이다. 필살기는 가장 활성화되고 집약된 특수 기술이다. 일격필살이란 말도 같은 맥락이다.
‘한방에 끝내버린다’는 표현처럼 완고한 심령을 한방에 깨뜨리고, 악령의 역사를 한방에 끝장내고, 겁 없이 날뛰는 원수들을 한방에 요절내고,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를 한방에 풀어버리는 그 ‘한방’을 당신도 원하고 있지 않은가? 아니라고 말하지 말라! 그건 프로의 기본이 안 된 증거다. 요즘은 필살기(special move)를 넘어선 초필살기(finish move)가 대세라니 싸움의 세계도 대단하다 느껴진다. 당신을 승자로 우뚝 서게 만드는 진정한 피니셔(finisher)는 무엇인가? 지금 값싼 고지 점령이나 승리를 위한 용비어천가를 부름이 아니지 않은가! 필자는 지금 그림 언어를 통해 우주를 통괄하는 방대한 메시지의 세계에서 메신저다움이 어떠함을 몇 가지 관점에서 제시하고 있다.
자기계발전문가로 잘 알려진 구본형 소장이 2013년 폐암으로 사망했을 때 받은 작은 충격이 아직도 기억에 새롭다. 맛깔스런 표현으로 독자들의 마음에 다가갔던 그였기에 짧은 명운이 비감(悲感)어렸다. “익숙한 것들과의 결별”은 앞으로도 한동안 회자될 명문이다. 그런 그가 생존의 문제를 뛰어넘어 독보적 프로가 되는 이론을 12년 연구의 성과물로 내놓은 때는 죽기 3년 전이었다. 그가 제시한 필살기 창조 5단계 중에서 마지막 단계를 잠시 소개한다. “하루 두 시간의 노력이 10년 후의 나를 만든다. 독보적인 전문가를 꿈꾸며 마치 근육을 키우듯 나의 강점을 키우는데 매일매일 같은 시간을 투자한다.” ‘은퇴는 있어도 평생 현역’이란 의식 속에 살던 그 사람은 가고 몇 편의 글만 숨 쉬고 호흡했던 그의 흔적을 보이니 서글프다.
설교자의 자화상 “한번 메시저, 영원한 메신저”
잠시 아들 이야기 한 토막을 나누려 한다. 2000년 9.11 테러로 뉴욕의 쌍둥이 빌딩이 엿가락처럼 녹아내리는 것을 보면서 아들은 대학 1년 만에 휴학계를 내고 미 해병대에 자원입대했다. 군목을 권했지만 아들은 해병생활이 소원이라 했다. 첫 주부터 자살자, 탈영자가 생기는 지옥 같은 훈련을 끝내고 1/3이 중도 탈락, 1/3은 마지막 훈련을 통과하지 못해 계급장 없이 졸업하는 가운데 작은 체구의 아들은 구릿빛 얼굴로 해병이 되었다. 후반기 훈련에서는 좋은 성적으로 졸업하게 되었다며 부대장으로부터 축하서한까지 받았다. 곧 이어 이라크 전쟁이 터지자 상사를 찾아가 이라크 파병을 요청했던 아들은 부대의 이동명령에 따라 미 원정군 1사단의 병력으로 바그다드에 최초 진격했다. 6개월의 전시상황에서 다섯 번 죽을 고비에서 기적적으로 생환했던 아들은 빈 라덴 은거지로 알려졌던 아프가니스탄의 산악지대로 재파송되어 6개월 작전에 임했다. 귀국하는 날 헬기가 고도를 높이자 마치 기다린 것처럼 미사일 몇 개가 방금 전까지 근무했던 부대에 떨어졌다.
전쟁에서 살아남고 4년 해병생활을 마치고 제대한 아들은 나머지 학업을 계속해서 복수 전공으로 대학을 마쳤고 이어 명문 사립인 로스쿨에 입학해 공부의 프로들 사이에서 살아남아 영광의 졸업을 했다. 그 후로도 험난한 훈련 과정을 통해 특수요원이 되어 근무하며 미국 행정부의 각 부처에서 비밀 경호 및 특별 수사에 관련된 특수요원들을 교육, 재교육시키는 교관으로 차출되기도 했으니 자기 분야에서 웬만큼 인정을 받은 셈이다. 하도 궁금해서 물어보니 자기가 담당한 분야가 총기 다루는 법과 살아남는 기술이란다. 그는 자신이 해병임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미국사회도 인정하는 바이니 필자 역시 동감이다. “한 번 해병, 영원한 해병”(Once a Marine, Always a Marine)은 그들의 구호다. 어쩌면 아들은 나름대로 필살기를 익혔는지 모른다. “한번 메신저, 영원한 메신저.” 당신과 나의 자화상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메시지 창출과 전달에서 프로여야 할 설교자
표현이 살벌해서 그렇지 어찌 보면 필자가 추구하며 분투노력해왔던 것 역시 필살기 확보였다. 성경을 앎에 있어, 메시지를 창출하고 전달함에 있어, 소통하고 담론하며 설득시킴에 있어, 글을 쓰고 말을 하고 살아감에 있어, 악을 줄이고 의를 늘여가는 삶의 기술에 있어, 누군가의 색을 훔쳐다 자신의 색에 배합시켜 태어난 하이브리드가 아닌, 자신만의 색깔을 얻기 위해 몸부림 친 세월이었다.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에 와서 정직하게 말하라면 부분적으로나마 필살기가 익어가는 상위 단계에 있다고 조심스레 말할 수 있다. 글과 말에 다 싣지 못했지만 그런 확신은 필자의 존재 자체를 감싸고 있는 어떤 힘이요 분위기에 근거한다.
진정한 프로는 자신이 프로인줄 알아야 한다. 명색은 프로인데 아마 단계를 벗어나지 못한 이들이 많고 여전히 아마 딱지를 떼지 못했는데 프로 뺨칠 정도의 실력파도 있다. 그렇다고 프로인 것은 아니다. 아마에서 프로로 전향하는 그런 도약대가 반드시 있다. 그만큼 프로의 프로다움에 이르는 길은 멀고 험하다. 설교자는 메시지 창출과 전달에서 당연히 프로여야 한다. 프로답지 못하게 여전히 아마추어의 냄새를 피운다면 심각하게 자신의 ‘전문업’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 지금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자신에게 맞는 일을 찾아 나서든지 아니면 지금까지 별 탈 없이 걸어왔어도 앞으로는 전혀 다른 차원의 길을 걸어 지존무상의 영광을 숨김없이 드러내 보여야 한다.
믿음의 선진들이 보여준 그들만의 필살기
세상의 모든 아마들은 탁월한 프로의 뒤를 잇기 원한다. 독보적 존재가 되기 원함은 가치 있는 염원이다. 이성봉 목사님이 한국교회에 끼친 공헌은 지대하다. 한국의 내로라하는 부흥사들이 저마다 이성봉 목사님의 후계자로 자처하며 증거물로 낡은 성경책을, 특별한 친분관계를, 안수 받았음을, 혁대를 선물 받았음을 거론하는 촌극을 보며 울음 섞인 웃음을 참았던 적이 있다. 엘리야가 불말과 불병거 타고 승천할 때 벗어던진 외투가 엘리사의 손에 쥐어졌다. 모두 그의 후계자 됨을 의심치 않았다. 스승보다 갑절의 영감을 원했던 엘리사의 행보는 역시 청출어람청어람(靑出於藍靑於藍, 청색은 남색에서 나오지만 남색보다 푸르다) 그 자체였다. 그가 찾은 것은 엘리야의 능력 상징인 외투가 아니라 엘리야에게 그런 능력을 허락하신 하나님이었다. 그래서 요단강물을 이리 치고 저리 치면서 “엘리야의 하나님은 어디 계시니이까?” 부르짖었다.
진정한 프로는 독보적인 프로의 어떤 것을 답습하지 않는다. 엘리야의 몸에서 떨어진 겉옷을 주워 요단 언덕에 섰지만 그는 ‘하나님 앞에 서 있는 단독자’이기를 원했다. 다시 말해 엘리사의 통찰력은 스승 엘리야를 만드신 하나님과의 대면이었다. 그는 엘리야를 뚫고 하나님에게로 나아갔다. 엘리야의 겉옷을 입히기도 하시고 벗기기도 하시는 하나님, 엘리사에게 겉옷을 줍게도 하시고 갑절의 영감을 부어주시기도 하실 하나님, 과연 그분은 엘리사를 엘리야 못지않은 프로의 자리에 세우시고 마음껏 사용하셨다. 따지고 보면 성경에 수록된 모든 하나님의 사람들에게는 나름대로의 필살기가 있었다. 아브라함의 끝간데를 모르는 순종이란 활공술, 유능제강(柔能制剛)의 달인 이삭의 뒤집기와 엎어치기, 야곱의 레슬러 같은 천사제압술, 유혹의 지뢰밭을 통과한 요셉의 지뢰탐지능력, 세상의 모든 위엄과 학자들을 뛰어넘어 제국의 최강자가 펼치는 정책에 자신의 신앙을 반영했던 탁월한 지혜자 다니엘의 순결한 무릎, 이런 식으로 신구약의 인물들을 묘사해도 지면이 부족할 것이다.
좋은 스승을 만나고 길(道)이요 진리요 생명인 그분의 제자로 막역한 도반(道伴, 잠시 빌려 쓰는 표현)을 얻는 것은 쉽지 않고 흔치 않은 인생의 행운이다. 그런 행운 없이 평생을 처녀림을 개간하듯 살아온 필자의 지난 세월이 그리 나쁘지 않다. 비록 삼림이라도, 기존의 세력이 철병거를 가졌고 강할지라도 오로지 ‘개척! 개척! 개척!’을 명받았던 요셉자손은 비좁은 에브라임 산지를 벗어나 브리스와 르바임의 광활한 땅 주인이 되었다. 당신에게 메신저와 관련하여 개척의 은사가 있다면 칠갑절의 노력으로 평생을 채워 배움의 너른 황무지에서 터득함으로 통찰력을 얻고 탁월한 메신저로 세워지기를 축복한다. 아니면 동일한 목적으로 뜻을 모은 평생 동지, ‘거룩한 동아리’를 규합하면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낫듯 셋이 둘보다 나은 이치를 깨닫게 될 것이다. 물론 너무 많으면 역효과를 감당키 어렵다. 주님이 열둘로 한정했으니, 제자 된 우리는 많아야 일곱을 넘지 않는 것이 안전하리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