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서정에서 ‘소명’ 이해의 중요성

  • 입력 2020.10.31 09:14
  • 수정 2020.10.31 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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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신학을 열심히 연마하면서 복음 전도에 대해서 잘 제시되지 않은 구도가 ‘소명’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였다.

먼저 ‘소명(vocatio, calling)’은 '부름'이기 때문에 부르심의 주체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소명은 바빙크-벌코프와 핫지(Hodge), 박형룡 모두가 구원의 서정의 가장 앞에 위치시켰다.

서철원 박사는 부르심을 전도, 복음선포로 배정시켰다. “부르심을 외적 부르심, 내적 부르심으로 구분하는 것은 사변적인 논의이다. 효력 있는 부르심은 인정하지만, 내적 부르심을 따로 설정하면 거듭남의 자리가 없어진다”(서철원, 『구원론』, 27)로 제시하였다.

우리는 통상 외소(外召)와 내소(內召)로 구분하는 방식이었고, 서 박사는 이러한 구도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한 것이다. 그렇지만 효력있는 부르심(vocatio efficax)를 인정하였다. 그런데 바빙크-벌코프, 핫지는 외소와 내소를 구분하지 않았고, 박 박사의 분류였다. 박 박사는 벌코프 박사의 부르심 일반과 외적 부르심과 중생과 유효적 부르심을 소명으로 축약시키면서, 외소와 내소로 구분시켰다. 벌코프 박사의 전개는 소명과 중생이 차례로 제시되지만 외적 부르심과 효과적 부르심으로 함께 묶여 있다. 그런데 박 박사는 소명 안에 외소와 내소로 세우면서, 소명과 중생으로 진행시켰다. 그래서 소명을 외소와 내소로 구도화한 것은 박형룡 박사의 고유한 제시이다.

소명에서 중요한 것은 소명한 주체에 대한 인식이다. 소명에 대한 주체를 명확하게 밝히는 학자는 없다. 그러나 연구자들은 삼위일체로 제시한다. 바빙크는 하나님께서 말씀과 성령으로 창조와 재창조를 이룸을 제시하면서 §. 50 “소명과 중생”, [433]을 시작하였다. 바빙크는 아버지께서 성자 안에서 성자를 통해서 일하신다고 제시한다(바빙크, 『개혁교의학』 4권, 23). 그리고 성자께서 부르는 자라고 제시하였다(바빙크, 『개혁교의학』 4권, 23). 벌코프도 바빙크보다는 간략하게 아들에게 속한다고 제시하고 있다(벌코프, 『조직신학』, 706). 외소와 내소, 부르심의 주체를 모두 성자 하나님으로 이해해도 될 것이다.

일반적 부르심(external call. general call)에 대한 이해에서 바빙크-벌코프-박형룡의 제시에서 인정할 수 없는 내용이 있다. 바빙크는 일반적 부르심을 사물로 부르심(vocatio realis)과 언어로 부르심(vocatio verbalis)으로 분류하면서, 두 경우의 가능성을 모두 인정하였다. 박 박사는 “실물적 소명과 말씀의 소명”으로 번역하였고, 일반 소명과 특별 소명으로 분류하였는데(박형룡, 『구원론』, 115), 바빙크와 벌코프는 외적 부르심으로 분류하고 있다.

사물로 부르심(vocatio realis)이 성경이 충족된 이후 시대에도 가능하다고 이해한 것은 바른 이해라고 볼 수 없다. 성경이 충족된 이후 시대에는 오직 언어 방식의 복음 전도의 형식으로만 복음이 전도된다고 이해해야 한다. 선교 현장에서 다양한 변수들이 있다고 할지라도, 언어적 수단 없이 구원에 이를 수 없다. 사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천상의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지만, 주께서 그를 다메섹에 있는 아나니아에게 인도하셨다. 구원은 하나님의 전적 주권에 있는 분야이지만, 그 구원하는 주권은 복음전도자의 언어 수단을 통한 복음 전도로만 구원의 역사가 일어난다.

신학자들은 이 일반적 소명(복음 선포)는 보편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제시하였다. 하나님의 구원은 언어적 방편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반드시 복음을 전할 사역자가 파송되어야 한다. 교회는 언어로 복음을 전할 사역자를 사모해야 하고, 교회가 없는 선교지에는 언어로 복음을 전할 사역자를 파송해야 한다. 언어로 복음을 전하는 것을 ver verbum(말씀을 통해서)으로 볼 수 있다. 언어로 복음이 선포될 때에 cum verbo(말씀과 함께)로 구원을 받는다. 이 때 성령께서 역사하신다. 콘스탄티노플 신경에서 성령께서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하신다고 고백하였다. 그럼에도 부르시는 분은 성자 하나님이시다. 복음을 전하는 사역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다(참고 계 2-3장).

효과적인 부르심(efficacious grace, efficacious call)은 내소이다. 일반적 부르심은 보편적이지만, 효과적인 부르심은 제한적이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모든 사람에게 전파되어야 하지만, 듣는 모든 사람이 그 복음을 영접하는 것은 아니다. 이 부분에서 개혁파는 "예비적 은혜"를 제시하였다. 그것은 일반적 부르심(per verbum)을 영접한 준비를 성령께서(cum verbo) 하신다는 의미이다. 주께서 바울로 땅끝까지 이르러 구원하게 하리라 하였고, 그것을 들고 기뻐하는 이방인들은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였고, 그들은 다 믿었다(행 13:44-48).

전하는 자가 없으면 들을 수 없고, 듣지 못하면 구원에 이를 수 없다.

12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13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14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15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롬 10:12-15)

소명은 성자 하나님, 천상에 계신 어린양께서 자기 백성을 부르심이다. 그 부르심을 수행하는 복음 전도자가 요구된다. 그런데 예수께서 밭에 곡식이 익었는데 거둘 일군이 없다고 한탄하셨다(마 9:35~38). 추수할 일군은 들을 수 있는 언어로 복음을 전하여, 듣고 영접하는 자를 구원해야 한다. 구원론은 구원을 이루신 주 예수 그리스도(기독론)께서 자기 백성에게 주신 놀랍고 신비로운 지식을 펼치고 있다. 구원론 지식을 만났을 때에 주의 구원의 신비에 놀라고 찬양하며 고백하며, 복음을 전할 준비와 능력을 구비해야 한다. 교회 신학은 교회를 세우는 지식이다. 교회를 세우는 방식은 여러 가지가 아니라, 오직 한 가지 복음을 언어로 전하는 것이다. 그 언어로 된 복음 속에 하늘에 계신 어린양의 부르심이 있다.

고경태 목사(형람서원, 한영대 겸임교수)
고경태 목사(형람서원, 한영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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