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자 속에 숨겨진 주님을 그려내라

  • 입력 2020.09.25 0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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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철 연속칼럼】 말씀 사역자에게 고하는 말씀 (5)

한명철 목사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은혜와 평강교회를 담임하며 30권의 저술과 글쓰기를 통해 복음 사역에 애쓰는 목회자다
한명철 목사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은혜와 평강교회를 담임하며 30권의 저술과 글쓰기를 통해 복음 사역에 애쓰는 목회자다

말씀이 가진 극강의 회복력과 복원력

말씀이 세상을 포기하면 세상은 이내 무너지고 만다. 세상은 말씀으로 지어진고로 말씀의 운행하심이 없으면 한시라도 존재할 수 없다. 땅의 사방을 붙들고 있는 것은 말씀의 천사들이다. 사람의 영혼도 말씀의 기운에서 피해 숨을 수 없다. 사람들이 꺼리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기다리는 것은 그들 속에 있는 영혼, 바로 하나님의 형상 때문이다. 사탄의 맏아들 노릇하던 망나니도 어느 순간 변화시키는 말씀의 능력에 압도당하면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가 된다. 말씀이 지닌 극강의 회복력, 복원력 때문이다.

죄로 인해 상하긴 했지만 사람의 영혼은 말씀을 그리워한다. 번민하면서도 말씀을 달게 듣던 분봉왕 헤롯이 그 전형적인 예다. 흉악한 죄인이 말씀을 들었을 때 간혹 회심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도 사람의 영혼이 말씀을 기다리고 사모해왔다는 증거다. 말씀은 햇빛이나 부는 바람처럼 천지간에 늘 임해왔다. 이 말씀은 세상과 인간의 기다림을 단 한 번도 비껴간 적이 없다. 말씀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기다리던 영혼들에게 임하여 구원할 자를 구원하고 새롭게 할 자를 새롭게 만들었다.

말씀을 떠난 자들에게서 종적을 감춘 말씀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택하시고 애굽을 떠나 가나안 복지로 향하던 그들에게 친히 율법의 말씀을 주셨다. 하나님의 선민으로서 듣고 지켜 살 수 있는 계명을 주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어 십자가의 죽음을 통한 구속 역사를 이루시기까지 자기 백성이 이방인들과 구별된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는 계약의 말씀을 주셨다. 율법을 지키는 경건한 민족으로 세워 그들을 세상 만민의 표본 삼고자 하셨지만 그들은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천대했다. 말씀을 버린 결과 그들은 하나님에게서 버림받았다.

이스라엘 역사는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철저하게 무시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특히 말씀(다바르)이 충만한 광야(다바르)를 지날 때 그들은 말씀에서 가장 멀리 있었다. 시내산에 강림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음에도 그들은 순종과 불순종의 경계를 넘나들며 말씀을 희롱했다. 말씀의 하나님을 경홀히 여겼다. 고질적인 반역과 불순종으로 인해 살리는 율법은 이내 죽은 문자가 되어 사람들을 구속하고 정죄하기 시작했다. 율법 조문들에 대한 연구와 가르침은 오래고 융성했지만 문자에 매여 율법의 정신을 아예 접하지도 못했다. 사람들의 삶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사라지자 패역과 죄악이 이스라엘의 하늘을 뒤덮고 땅을 더럽혔다.

계명의 돌판이 깨어져도 말씀의 사람들이 뒤를 이었다. 하나님은 돌비가 아니라 가슴에 말씀 새긴 자들을 보내셨다. 입술에 말씀을 넣은 예언자들을 부지런히 파송하셨다. 하나님은 가시덤불과 담으로 막고 빈들에서 달래고 타일러 택한 백성을 돌이키려 예언자들을 파송했지만 숙연히 말씀을 듣는 것도 잠간, 이내 그들의 입을 틀어막고 심지어 죽였다. 40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은 말씀이 침묵하는 죽음 같은 시간을 보내야 했다. 말씀 가운데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에게서 말씀이 종적을 감추고 말았다. 말씀은 선택받은 백성에게 외면을 당하고 예언자들은 온갖 조롱과 멸시의 대상이 되었다.

떠나신 말씀이 사람의 몸을 입고 오다

인간의 반역보다 질긴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다. 인간이 하나님을 거절해도 인간을 외면할 수 없는 것이 하나님의 긍휼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버려도 그 사람을 버릴 수 없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다. 반역자들을 징벌하시고 귀순자들을 용서하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다. 사랑과 공의가 충돌을 일으키면 사랑이 공의를 덮어버린다. 공의는 죽지 않고 사랑 안에서 용해된다. 사랑의 밀도가 공의보다 높다. 무거운 코트를 벗기는 것은 차가운 바람이 아니라 뜨거운 태양인 것과 같은 이치다.

그토록 심하게 버림당하고 능욕의 대상이 되었건만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에게 다가오셨다. 사람이 떠났는데, 사람이 떠나서 사라졌던 말씀인데 그 말씀이 스스로 인간을 찾아오셨다. 사람이 버렸는데, 사람이 버려서 상했던 말씀인데 그 말씀이 치유의 능력으로 인간을 찾아오셨다. 하나님은 말씀의 종들 파송하기를 멈추시고 특단의 조처(措處)를 취하셨다. 하나님 자신이 말씀이 되셨다. 그 말씀이 육신을 입고 우리 가운데 찾아오셨다. 은혜와 진리를 그득 담고 찾아오셨다. 스스로 숨어계신 하나님이 자신을 나타내자 세상은 그를 인정하지 않았다. 소수의 경청자(傾聽者)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주님의 말씀에 등을 돌렸다.

문자 속에 숨겨진 주님을 그려내라

결국 말씀이 되신 주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육신의 죽음으로 말씀은 깨어졌지만 그 깨어진 육체 속에서 영원한 생명이 흘러나왔다. 육체는 스러졌지만 말씀의 영광이 세상을 뒤덮어왔다. 역사 속에서 경험된 말씀은 이렇다. 하나님은 영원한 말씀을 육신에 담으셨다가 다시 문자에 담으셨다. 그 생명이 성경의 옥합에 담겨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이 되었다. 주님의 육성은 사라졌지만 성령의 음성으로 말씀은 지금도 들린다. 성경이 성경인 것은 거기에 하나님의 말씀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면 반드시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 성경을 덮은 채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려는 자가 있다면 어리석은 일이다. 달리 방도가 없다. 성경을 펼치고 문자 속에 몸을 숨기신 주님의 모습을 그려내야 한다. 성경이 전하는 생명의 능력을 풀어 놓아 자유하게 해야 한다. 무덤 속에 갇힌 나사로처럼 너무 오랫동안 하나님의 말씀이 문자의 감옥 속에 갇혀 지냈다. 신학이, 잡다한 사상이 옷을 입히고 채색하여 말씀에 기괴함만 더하게 만들었다. 심지어 성경의 권위를 부정해 성경 없이 말씀을 강론하는 비류들까지 설쳐댄다.

말씀 스스로 영광의 광채를 발산토록 하라

사람들이 교회에 모이는 것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을 듣기 원해서이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는 원래 죄로 인해 무한히 먼데 그 끝도 없는 간격을 메워주는 것이 바로 말씀 사역자이다. 그만이 암호를 해독하듯 말씀의 은밀한 뜻을 풀어 해석한다. 감춰진 말씀의 비밀을 드러내는 것은 말씀 사역자의 영광이다. 정당한 해석자가 말씀을 풀어주지 못하면 사람이 영광의 하나님을 뵐 길이 없다. 해석자는 자신의 설교에서 쓸데없이 덧칠한 것들을 과감히 벗겨내 하나님의 생명이 드러나게 해서 말씀 스스로 영광의 광채를 발산하도록 해야 한다.

지난 주일도, 이번 주일도 사람들이 교회를 찾는 것은 단 한 가지 이유 곧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이다.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온라인 예배의 형식을 취하긴 하지만 교회의 모든 모임에는 반드시 말씀이 중심을 이룬다. 현장감이 떨어지는 만큼 말씀 사역자는 한 편의 설교를 마련하기 위해 이전보다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여 연구와 기도에 매진해야 한다. 텅 비다시피 한 회중석을 바라보면서 늘 부족한 자신의 설교를 경청했던 고마움을 새삼 깨달아야 한다. 물론 말씀은 인간의 준비 여부에 상관없이 역사할 능력이 있지만 하나님은 준비된 그릇 사용하기를 더욱 즐겨하심을 명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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