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명철 연속칼럼】 말씀 사역자에게 고하는 말씀 (6)

한명철 목사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은혜와 평강교회를 담임하며 30권의 저술과 글쓰기를 통해 복음 사역에 애쓰는 목회자다
한명철 목사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은혜와 평강교회를 담임하며 30권의 저술과 글쓰기를 통해 복음 사역에 애쓰는 목회자다

소중한 설교? 흔한 설교?

요즈음 하나님의 말씀과 연관된 소주제들을 계속 다루고 있지만 필자의 궁극적 관심은 결국 “설교”에 대한 담론이다. 설교와 연관하여 우리가 사는 동안 얼마나 많은 얘기들을 나누었던가? 많은 고민과 갈등 속에서도 크고 작은 감동의 순간도 있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우리는 매번의 설교에 허전함을 느끼고 설교다움에 배고픔을 절감한다. 설교가 무엇인가? 간략히 말해 크기와 상관없이 어떤 청중을 상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행위다. 예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 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자신의 전문 분야에 따라 소견을 달리 할 수 있지만 암묵적으로 설교라 보는 것이 사실이다. 설교의 절대성까지는 아니더라도 설교의 중요성에 딴지걸 이는 없을 것이다.

일반 청중들은 예배의 각 순서에 나름대로 중요도의 우열을 매기지만 설교의 수위성에 대해 그다지 반론을 제기하지 않는 입장이다. 설교는 그만큼 예배나 신앙생활에서 중요하고 비중 있는 위치를 차지한다. 신실한 사역자는 그래서 늘 한 편의 설교를 마련코자 고민하며 사투를 벌이다시피 한다. 언제까지? 죽을 때까지다. 우리가 직면한 문제는 설교자가 설교를 너무 준비 없이 마련한다는 점이요 교회가 당면한 위기는 그런 홍수의 현실 속에 숱한 영혼들이 둥둥 떠다닌다는 현실이다.

실제 상황에서 우리가 접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성경이요 그 성경을 풀어 전하는 설교다. 설교는 어떤 경우에도 귀하고 소중하다. 설교가 너무 흔한 요즈음엔 설교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식하는 것이 드물고 설교자 자신도 그렇게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안타깝고 부끄러운 일이다. 조국의 성도들은 일주일에도 여러 편의 설교를 듣는다. 새벽기도까지 포함하면 열 편 이상에 이르기도 한다. 그냥 얘기가 아니라 깊이 생각하고 들어야 하는 설교를 자주 듣는 것은 그만큼 피곤하고 힘든 일이다.

하나님의 숨결이 임하는 사건, 설교

설교를 준비하는 사역자의 노고는 더 심하다. 설교가 대략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의외로 일반인들까지 파악하고 있다. “지금 내게 설교하는 거야?” “제발 설교 투로 말하지 마!” 등은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 가질 수 있는 불편함과 반박 심리를 잘 보여준다. 설교를 듣고 ‘은혜가 있니, 없니’ 또는 ‘은혜가 된다느니, 전혀 은혜가 되지 않는다느니’ 평가의 기복도 심하다. 마음에 와 닿거나 영혼에 깊은 울림을 주는 차원에서 그런 표현이 가능하겠지만 올바른 것은 아니다. 한 편의 설교에 대해 청중이나 설교자 할 것 없이 좋은 설교, 나쁜 설교, 힘이 넘치는 설교, 맥 빠진 설교라 평하지만 설교에 대한 흑백논리식 판단은 무의미하다.

모든 설교는 일회성이다. 워낙 강력한 설교는 강진 후의 여진처럼 긴 여운을 남기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것은 듣는 이의 입장에서 그렇게 느낄 뿐 사실과는 무관하다. 설교는 특정 상황, 특정 대상에게 전해지는 특정한 신탁이기에 개인이건 공동체이건 정한 장소와 정한 시간, 그리고 설정된 말씀이라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 설교는 선포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하나님이 내 삶과 인격을 말씀에 여과시켜 불어넣으신 숨을 내쉬는 것이다. 숨을 내쉬듯 선포하면 그만이다.

설교자의 맛, 설교

음식은 역시 손맛이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설교 역시 맛이다. 설교의 맛은 과연 영미(靈味)다. 사람의 영에도 맛이란 것이 있다. 영의 맛이 별로면 설교도 별로다. 영이 강하면 설교도 강하고 영이 약하면 설교도 약하다. 영이 은혜로우면 설교도 은혜롭고 영이 차가우면 설교도 차갑다. 설교자의 영 상태가 설교의 맛을 좌우한다. 당신의 영에는 진리와 은혜가 어우러져 인간 영혼을 살릴 생명의 풍성함이 북돋아질 그런 맛이 깃들어 있는가? 당신 스스로 어떤 맛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 누가 있어 당신이 전하는 한 편의 설교에서 영혼의 감칠맛을 느낄 것인가!

음식 맛이 기대 이하일 때 우리는 “영 맛이 없네!”란 표현을 쓴다. 이 말은 ‘전혀 맛이 없다’는 뜻이다. 사실 ‘영 맛’(靈味)이 없으면 영 맛이 없다. “영 맛”에서 “영”을 단호하게 “영”이라 읽으면 ‘영의 맛’이란 뜻이 되고 “영”을 “여엉~”이라 길게 발음하면 ‘전혀 맛이 없다’는 뜻이 된다. 사람들이 당신의 설교에서 맛을 느끼는 것은 당신의 영이 지닌 특미(特味) 때문이다. 이 맛은 불변 상태가 아니라 늘 변한다. 사람의 영(靈) 상태가 고정되지 않고 가변적이듯이 설교가 풍기는 맛 또한 그렇다. 75억 인구의 얼굴 모습이 엇비슷해보여도 제각각이다. 쌍둥이마저도 다르다. 하물며 보이지 않는 영의 모습이란 얼마나 다르겠는가! 각기 다른 영이 다양한 맛을 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말씀과 기도의 수레바퀴가 끄는 설교

영적 상태를 좌우하는 것이 바로 말씀과 기도다. 다시 말해 말씀과 기도에 강한 자가 영이 강한 자다. 통찰력으로 강화된 밝은 눈과 엎드림으로 강화된 무릎의 견고함 없이는 사람의 영이 강해질 방도란 없다. “말씀과 기도” 하면 ‘당연한 소리를 왜 하느냐?’는 식으로 꼬나보거나 ‘누군 당신처럼 말씀 안 보고 기도 안 하는가?’며 시큰둥해지는 모습엔 뭔가 문제 있는 징후는 아닐까! 말씀과 기도 얘기만 나와도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인다면 우리 내부에 이질적인 세력이 똬리를 틀고 있다는 증좌다. 폐일언하고 말씀과 기도를 수레바퀴 삼아 끄는 마차만이 세상의 험로를 거침없이 달린다.

설교의 실제에 들어가 보자. 대개 설교는 큰 틀에서 볼 때 문어체와 구어체로 나뉜다. 구어체는 듣기에 편하고 문어체는 보기에 즐겁다. 대중적인 설교자는 주로 구어체에 강한 편이다. 구어체를 활자화하면 들을 때와 현격한 차이를 느낀다. 그래서 유명 설교가의 설교집을 읽으면 들을 때의 감동에 한참 미치지 못한다. 격하게 말하자면 도저히 건질 게 없다. 문어체의 설교는 청중의 사고능력에 따라 저울질되기에 일종의 ‘층’이 맞으면 대박이 되기도 하고 청중의 호응도가 떨어지면 쪽박이 되어버린다. 설교자가 동일 본문에서 동일 메시지를 받아 전할 경우에도 도시와 시골 지역, 노년과 아이 같은 연령층에 따라 표현의 가미는 불가피하다.

문어체와 구어체가 적절히 배합된 설교

주님의 설교는 결코 구어체가 주를 이루지 않는다. 복음서에 수록된 주님의 설교나 바울의 설교를 보면 문어체 일색이다. 그 내용을 읽고 지난 2천년 동안 숱한 학위 논문과 연구 자료가 태어나지 않았는가! 그냥 쉽게 읽어갈 내용은 하나도 없다. 한 문장, 한 문단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깊이 생각하고 증거 본문을 구약이나 어떤 전범으로부터 찾아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비유를 활용하여 대중성을 높였다. 문어체를 구어체로 보강하였다는 말이다. 씨 뿌리는 비유를 예로 들자. ‘농부가 씨를 뿌렸다. 씨가 이곳저곳에 뿌려졌다. 새들이 씨를 먹었다. 시들거나 마른 씨도 있었다. 어떤 씨는 자랐다.’

이런 식이다. 주어와 동사로 문장이 완성되고 목적어와 보어만 추가되어도 완벽하다. 바울도 주님만큼은 아니어도 비유를 사용하였다. 문어체와 구어체가 적당히 배합된 그런 문장엔 힘이 있다. 그런데 메시지는 힘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비유는 메시지의 본체가 아니라 본체를 지탱해주는 거치대임을 숙고해야 한다. 오늘 우리의 설교 경청 능력을 사장시키는 원흉이 강단에 도사리고 있음은 재앙이다. 소위 만담이나 저질 코미디로 흉물스럽게 변질된 ‘썰’, 설교라 일컬어지나 결코 설교일 수 없는 ‘설난’(說亂), 성구 몇 절과 그럴듯한 예화들로 치장된 말장난들이다. 그런 설교자가 스타로 대접받고 민중의 메신저로 추앙되는 강단에는 악취가 물씬 풍긴다. 그런 냄새를 맡아보지 않았다면 당신의 영적 후각은 이미 마비되어버렸다. 축출되어야 할 강단의 망나니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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