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명철 연속칼럼】 말씀 사역자에게 고하는 말씀 (3)

한명철 목사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은혜와 평강교회를 담임하며 30권의 저술과 글쓰기를 통해 복음 사역에 애쓰는 목회자다
한명철 목사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은혜와 평강교회를 담임하며 30권의 저술과 글쓰기를 통해 복음 사역에 애쓰는 목회자다

우주 만물의 완전한 시작을 이룬 말씀

태초에 하나님은 말씀으로 우주 만물을 창조하셨다.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지으셨다. 세상과 인간은 모두 하나님의 피조물이다. 시작이 되면서(In the beginning) 혼돈이 질서를 잡고 공허는 만상(萬象)으로 채워졌다. 태초는 시간의 시작이었다. 태초라 일컬어진 그 이전에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시간도 없었고 공간이라 할 것도 없었다. 단지 무(無)의 상태였다. 하나님 홀로 계셨다. 하나님이 태초의 문을 열면서 우주 만물이 기지개를 켤 수 있었다. 대자연과 인간이 공존하면서 시간의 태엽과 역사의 수레바퀴도 가동되었다.

이렇게 세상과 우주 만물의 시작이 완전하고 충만할 수 있었던 것은 말씀 때문이었다. 그리스 철학은 ‘무에서 아무 것도 나오지 않음’(ex nihilo nihil fit)을 공리로 삼았지만 유대적 사유를 이룬 성경은 ‘무로부터의 유 곧 창조’(creatio ex nihilo)를 역설하였다. 이를 가능케 한 것은 창조주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이 말씀은 하나님 곁에서 창조자가 되어 영광스러운 사역을 함께 이루셨다. 말씀은 태초의 훨씬 이전 곧 영원 전부터 계셨다. 태초에 나타나 보이신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셨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장막을 치듯 거주하셨다. 영원하신 말씀이 성육신하신 말씀으로 임해오셨다.

스스로 찾아오신 말씀을 외면하는 세대

생전에 주님은 권세 있는 말씀의 증언자로 사셨다. 주님의 말씀과 행적은 기록된 말씀이 되어 우리에게 거룩한 전통으로 남겨졌다. 주님의 행적과 말씀을 전부 담으려면 온 세상도 부족하였다. 하나님은 인간 구원에 필요한 만큼의 크기와 내용으로 성경이 이루어지게 만드셨다. 그것이 거룩한 책으로 인정된 66권의 성경이다. 이제 공교회(公敎會)에 의해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받은 말씀은 온 세상에 퍼져 있다. 문서로서의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란 대전제하에 최종적 권위를 지닌다. 교회사를 통틀어 설교를 중시해 왔음도 하나님 말씀을 해석해서 사람들에게 알린다는 관점에서였다.

사람들은 교회에 모여 하나님께 예배드린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성경을 펼친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싶어 한다. 사람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원한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인간의 목마름은 말씀 듣기가 수월치 않음을 반증하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들의 말에 가려 쉽사리 그 모습을 내비치지 않는다. 구름이 해를 가린 형국(形局)이다. 사람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에서 동까지 비틀거리며 하나님의 말씀을 구하려고 달려 왕래하지만 말씀을 얻지 못한다. 스스로 숨어계시는 하나님처럼 말씀이 어디론가 숨어버렸다. 스스로 찾아오신 말씀을 사람들이 외면하여 말씀이 아예 자취를 감춘 것이다.

막힌 진리의 수로를 뚫는 말씀

칼 같고 불 같던 말씀의 위엄과 위력이 어느 때 부터인가 종적을 감추었다. 뜨거운 눈물샘을 터뜨리고 무덤덤한 영혼을 오열케 하던 말씀이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이런 말씀의 부재는 세상을 위태롭게 만든다. 말씀의 기갈에 허덕이는 종들이 엎드려 말씀의 귀환을 호소해야 한다. 닫힌 말씀이 우리의 눈앞에 다시 한 번 자신을 열어보이도록 해야 한다. 죽은 문자 속에 방치되어 있는 생명의 말씀을 이끌어내야 한다. 탐욕과 세속적인 영광에 가로막힌 진리의 수로를 뚫어 말씀이 자유자재로 흘러가도록 해야 한다.

성경이 인류에게 주어졌음은 그것이 우리 모두를 위한 말씀임을 뜻한다. 말씀은 단순히 사람들의 도덕적 훈계나 정신적 수양을 위해 세상에 남겨진 것이 아니다. 종교적 계율로서 사람의 영혼을 속박하기 위한 도구도 아니다. 성경은 정확히 이해하여 구체적인 삶의 정황에 적절히 응용되어야 할 생명의 원리다. 기독교인들을 위한 경전만이 아니라 만민이 접해서 구원에 이를 수 있도록 허락하신 하나님의 선물이다.

말씀 통달의 크기가 은혜의 강도를 결정

동시대의 설교자들이 동일한 본문에서 다른 메시지를 만들어 내거나 다른 본문에서 비슷한 의미를 추출해내는 것은 성경 말씀이 단순한 문자를 넘어선 하나의 생명체임을 보여준다. 말씀은 생물이요 생명이기에 활력이 넘치고 이 기운에 접한 영혼은 생기를 마음껏 발산한다. 설교자는 자신이 체득한 생명력의 크기만큼 청중들에게 생명력을 전할 수 있다. 관의 크기와 꼭지의 구경이 식수량을 결정하듯 매개자가 통달한 말씀의 깊이가 진리와 은혜의 강도를 결정한다. 말씀 통달의 척도가 설교의 깊이와 은혜의 역사 크기를 저울질한다.

바른 진리에 서 있다면 다양한 말씀들이 가리키는 것은 하나의 중심점처럼 한분 예수 그리스도여야 한다. 그리스도가 알파와 오메가임은 진리의 출발과 도착점이 곧 그리스도요 설교의 시작과 끝이 오직 핵심인 그리스도에게만 수렴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바른 해석의 원리를 따라 풀어내면 모든 말씀이 다양성의 씨줄과 통일성의 날줄에 의해 분명한 개체 곧 그리스도의 한 인격에로 직조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다시 말해 성경 어디를 살펴도 예수 그리스도의 향취로 가득하다는 말이다. 사람의 영혼에 무한한 생기를 불어넣는 것이 바로 태초부터 존재한 말씀 곧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성령의 통제 아래 말씀을 해석

하나님의 말씀을 담고 있는 성경이 우리에게 있긴 하지만 이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기란 결코 수월치 않다. 여러 세기에 걸쳐 많은 저자에 의해 기록된 말씀은 저마다 다른 시대적 상황과 역사적 배경을 지니고 있다. 교회의 역사는 말씀에 대한 해석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양한 장르에 따라 해석의 방법 또한 그만큼 복잡해진다. 예언의 경우에는 고도의 숙련된 해석이 요구된다. 성경의 어려운 내용들은 반드시 신중한 해석을 필요로 한다. 억지로 풀면 해석자나 청중이 모두 죽는다.

교묘한 해석일수록 경계해야 한다. 잘못된 영이 해석자의 관점을 흐리고 사고의 틀을 얼마든지 뒤틀리게 만들 수 있다. 누군가 새로운 계시를 이야기하면 일단 부정하는 것이 지혜다. 하나님의 계시는 성경으로 이미 끝났고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기에는 성경의 계시만으로 이미 충분하다. 성경 이외의 계시를 주장함은 그것이 어떤 형태를 띠고 있다 해도 잘못이다. 말씀의 해석자는 무엇보다 바른 영을 지니고 늘 진리의 영이신 성령의 통제를 받아야 한다. 건전한 해석으로 말씀을 제대로 풀어주어야 한다. 지혜와 계시의 영에 사로잡혀야 하고 마음의 눈 또한 밝아야 한다.

해석자의 눈에서 비늘이 제거되어야 하고 성령의 안약이 발라져야 한다. 성령의 기름 부음 없이는 진리의 조명에 이를 수 없다. 성령이 계시의 말씀을 조명하여 해석자로 하여금 바른 해석을 하도록 만든다. 청중도 말씀 안에서 하나님을 발견하듯이 말씀 사역자 역시 말씀 안에서 하나님을 보아야 한다. 말씀 안에서 말씀을 듣지 못한다면, 다시 말해 성경의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뜻과 마음을 읽지 못하면 단 한 줄의 문장도 옳게 해석할 수 없다. 성경의 메시지에 통해야 바른 해석의 지평이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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