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명철 연속칼럼】 말씀 사역자에게 고하는 말씀 (8)

한명철 목사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은혜와 평강교회를 담임하며 30권의 저술과 글쓰기를 통해 복음 사역에 애쓰는 목회자다
한명철 목사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은혜와 평강교회를 담임하며 30권의 저술과 글쓰기를 통해 복음 사역에 애쓰는 목회자다

가상의 설교자와 가상의 설교

설교자가 설교자다움을 지키지 못하면 과학의 힘이 종교적 영향력보다 비대해지고 기술력이 영력의 밀실을 차지할 때쯤 교회의 설교 문화는 조종을 울리게 될는지 모른다. 가상 설교자와 가상 설교가 쓰나미처럼 한두 번 휩쓸고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신앙생활의 일대 변혁을 일으켜 기존의 가치나 개념 자체를 송두리째 갈아치워 버리든지 사회현상으로 고착화되어 버리면 상황이 비극으로 마감됨은 뻔한 일이다, 최소한의 피해를 고려해도 가상설교자에게 좋은 자리는 죄다 빼앗겨버릴 것이다. 설교자가 필요 없는 시대가 다가옴은 먼 미래의 해프닝이 아니다. 바로 눈앞에 있고 민감한 이들은 그 전조(前兆)를 보며 두려워한다.

워낙 변화의 속도가 빠르고 기술력의 크기가 어마어마해서 한편으로 저어되는 면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무척 궁금하다. 변화의 소용돌이에 교회가 어떻게 대응할는지는 차후의 문제다. 그런 세상 현상에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한 설교란 어떤 내용이며 직업적인 설교자의 입지는 어느 정도일까? 가상세계의 현실이 현실세계의 공상을 능가하는 지경이 되어버린다면 혼돈과 공허 속에서 질서와 조화가 나왔던 창조의 징후가 재현되기라도 할 것인가? 우려가 우려로 끝나버리고 기술력에 의한 영력 부재 상황을 기막힌 현실로 맞아들이지 않으려면 지금 더 많이, 더 자주, 더 깊게 고민하며 말씀 연구와 기도 강훈에 자발적으로 임해야 한다.

설교, 거룩한 기운을 복원시키라

옛 시대 믿음의 선진들이 가능했다면 우리에게도 희망은 있다. 결국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노고와 정성이 기대를 현실로 뒤바꾼다. 말씀과 기도는 몸으로 부닥치듯 실전에서 익히는 것이 안전하고 강력하다. 소위 진리의 파수꾼으로서, 시대의 메신저로서, 구령의 길라잡이로서 호칭에 걸맞은 실력을 길러야 한다. 설교의 원형을 회복하고 원시적 형태의 설교에서 느꼈던 메시지의 어떤 파워, 정확히 형언하긴 어려워도 예언자들의 메시지에서 지금도 감지되는 어떤 ‘거룩한 기운’을 복원시켜야 한다. 바른 설교를 논하고 설교의 담론에 빠져 고민을 나누는 것도 다가올 미래의 침울한 상황에 주눅 들거나 겁나서가 아니다. 우리가 지금 기억하는 옛적 시대의 아우라를 우리의 후손들에게도 전해주고 싶은 마음 때문에 그렇다.

원래 기계라든지 문명의 이기는 성격상 중성이어서 사용자의 의지나 목적에 따라 선기능도 하고 역기능도 한다. 한 때 이상야릇한 종말론에 휩싸여 모든 것을 짐승의 숫자 666에 연결시켜 대중을 오도하던 적이 있었다. 컴퓨터도 666이라 단죄되어 신앙상 이유로 자녀에게 컴퓨터를 접하지 못하도록 하는 부모들도 적지 않았다. 컴퓨터를 비롯한 최신의 전자기기들이 지닌 성능은 정말 대단해서 하루가 다르게 광속의 발전을 보인다. 설령 기계가 설교문 작성을 대행하고 목회의 주변적인 잡무들을 효율적으로 처리하는 그런 날이 도래한다 해도 옛 방식을 고수하려는 설교자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옛날을 기억하라. 역대의 연대를 생각하라. 네 아버지에게 물으라. 그가 네게 설명할 것이요 네 어른들에게 물으라. 그들이 네게 말하리로다.”(신 32:7) 영화의 때나 고통의 때를 막론하고 이스라엘은 과거를 기억하며 물어야 했다. 하나님은 오경의 마지막 책으로 신명기를 허락하셨다. 신명기(申命記)란 “거듭된 명령”의 뜻으로 레위기에 대한 영적 해석이다. 유난히 “기억하라!”는 명령이 잦다. 그들에게는 영광과 치욕의 과거가 있었고 영고성쇠의 길이 나뉘어졌던 시대의 칼날 같은 정황이 있었다. 더군다나 그들에겐 물을 만한 어른들이 있었다. 신명기의 배경을 이루는 광야생활은 그들의 과거와 미래를 의미 짓는 경험세계였다.

진리의 전신상(全身像)을 펼치는 설교

우리에게도 기억할 만한 옛적 시대라는 것이 있다. 역대의 연대도 대체로 기억에 선명한 편이다. 그런데 자주 묻지 않는다. 한쪽에서는 물을 만한 어른이 없다고도 하소연한다. 설교와 연관된 옛날 일을 기억하는 것도 우리로선 필요한 일이다. 짧은 기독교 역사라 해도 기억할 만한 역대의 연대기가 기술된다. 영욕의 세월도 켜켜이 쌓여있다. 하지만 예민한 질문에 진솔한 답변을 제공할, 정확하고 상세히 설명해줄 ‘어른들’이 있는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말씀의 메신저로서 부끄럽지 않으려 함은 설교문화가 옛 골동품으로 화하게 될 미래의 어느 날 오늘을 기억하고 물어볼 깜찍한 후손들에게 대답하고 설명할 어른이 되기 위해서다. 허공을 때리는 공허한 울림이 아니길 갈망하면서 소리쳐 외칠 소이(所以)도 여기에 있다.

우리의 목소리는 변성되고 청아했던 음성이 탁하게 거칠어져도 그 음성에 실린 메시지로서 소리의 입자들은 분명 살아있다. 성경과 기독교 역사를 통틀어 설교란 이름으로 전해졌던 무수한 메시지의 편린(片鱗)들이 지금도 우주공간을 떠다니고 있다. 소리는 사멸되지 않고 가느다란 진동에 실려 우주 멀리로 퍼져간다. 과학적 능력의 도움으로 우주에 있는 주님의 음성을 발췌할 날이 이른다면 성경에 문자로 수록된 말씀만이 아니라 주님의 육성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천지창조 때 창조를 명하셨던 그 말씀의 실체도 접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꿈같은 일이 우리 생전에 일어나지 않더라도 성경을 통해 간접적이나마 주님의 음성을 생생히 듣는 것은 큰 행운이다.

설교는 말씀을 원만히 해석하여 삶의 현안과 영적 필요를 잘 융합해서 일반 대중이 능히 이해하고 적용할 수 있도록 만드는, 고도의 기술과 노력이 요구되는 작업이다. 설렁설렁 때우거나 주먹구구식으로 넘어갈 사안이 결단코 아니다. 한 마디로 설교는 청중들에게 주님의 생생한 음성을 들려주는 것이다. 말씀에 담겨진 깊은 의미와 함께 풀이된 진리의 전신상(全身像)을 펼쳐 보이는 것이다. 아무리 어려워도 기꺼이 감당해야 할 존귀한 특권이다. 현실에서 최선의 설교자를 꿈꾼다면 현실을 넘어 태고의 시작점으로 눈을 돌려야 한다. 교회가 태어난 그 시점, 교회를 시작하고 유지시키며 부흥을 활성화함에 원동력이 되었던 실체로서의 성경적 설교에 밀착해야 한다.

오늘 충실히 설교하라

세월은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는다. 지나가는 시간은 뭔가 유의미한 시도를 향한 의지와 할 수 있는 여력까지 깡그리 앗아간다. 세월을 아껴야 하는 것은 가고 다시 아니 오는 외곬 행보 때문만은 아니다. 실제로 우리에게 남은 때가 너무 촉박해서다. 주님이 정하신 우리 날의 길이가 손 넓이만 함은 시적 음미를 넘어 피부에 와 닿는 엄연한 현실이다. 눈 한번 깜빡 하는 사이 반백년이 ‘훌쩍’이다. 더 노쇠해지기 전에 설교의 황무지를 옥답으로 개간할 때마다 추임새를 달 수 있으려면 득음을 넘고 득도를 통해 득설(得說)에 이르러야 한다. 그냥 얻어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말씀과 기도에 통달하기까지 상상 이상의 시간을 바치고 실전 못지않은 강훈에 임해야 하는 것은 당연히 치러야 할 희생이다.

<죽은 시인의 사회>(Dead Poets Society)는 아직도 기억에 생생한 수작이다. 주체적 삶의 화두를 파격으로 이끌던 키팅 선생은 야망제조소 같은 명문사립학교에서 밀려나지만 그가 전한 “오늘을 붙들라”(Carpe Diem)는 필름 밖의 인생들에게까지 각별한 메시지로 다가섰다. 오늘을 붙들지 않는 이에게 내일의 시간은 오지 않는다. 와도 그냥 스치고 지나가버린다. 오늘을 놓친 자에게 미래가 붙잡히는 일은 없다. 처절하고 철저하게 오늘의 매순간을 붙들고 터득을 위한 몸부림을 지속해야 한다. 한 마디 더 첨가하라면 “죽음을 기억하면서!”(Memento mori) 내일 죽을 자인 것처럼 생각하며 그렇게 오늘을 충일하게 사는 것이다. 그런 심정으로 준비해서 그런 각오로 외치는 것이다. 산 자로 강단에 올라 죽을 각오로 외치고, 여전히 호흡한다면 그렇게 오르고 내리는 설교자의 일상을 이어갈 것이다. 설교자로 세움 받은 자긍심에 기대어 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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