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광의 말씀을 담는 칼집이 되라

  • 입력 2020.09.22 08:21
  • 수정 2020.09.22 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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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철 연속칼럼】 말씀 사역자에게 고하는 말씀 (4)

한명철 목사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은혜와 평강교회를 담임하며 30권의 저술과 글쓰기를 통해 복음 사역에 애쓰는 목회자다
한명철 목사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은혜와 평강교회를 담임하며 30권의 저술과 글쓰기를 통해 복음 사역에 애쓰는 목회자다

소명이 직업 되어 순수함을 잃지는 않았는가?

말씀 사역자가 말씀을 제대로 수종을 들지 않으면 영혼을 살리는 말씀이 불충한 종을 징치한다.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함이 사실이라면 순종하는 종이 불순종하는 종에게 경고함은 마땅하다. 말씀의 종들이 금송아지 형상에 가려 말씀이신 그리스도의 형상을 바라보지 못한다면 누군가는 아론을 질책했던 모세처럼 거룩한 종들을 일깨워야 한다. 하나님의 돌비를 깨뜨렸던 모세처럼 영광의 말씀에 도끼질을 가해야 한다. 또 다시 산에 올라야 할망정 더럽힌 하나님의 거룩함을 분노해야 하고 질기디 질긴 악의 축을 제거해야 한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선민임에도 부끄러운 멸망을 당했다. 하나님께서 참감람나무도 아끼지 않으셨다면 하물며 돌감람나무이겠는가? 말씀 사역자는 하나님의 사자라는 자기 최면에서 황급히 깨어나야 한다. 하나님 나라의 대사 운운하는 나르시시즘의 미몽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소명이 직업화해버려 순수함을 잃어버린 영혼에는 말씀의 영광이 임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자체가 말씀의 권위를 뒷받침하지 않음이 사실이다. 말씀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목사나 신학자라 해서 반드시 말씀의 깊이가 더하거나 말씀 해석에 특출 나지 않다는 말이다.

모세인 동시에 아론이 되라

말씀을 홀대하고 무시하는 말씀 사역자에게는 말씀으로 인한 기업이 있을 리 만무이다. 말씀의 바른 길을 버리고 어그러진 길을 고집한다면 결과는 뻔하다. 파국의 벼랑 끝이다. 말씀의 껍데기가 아무리 화려해 보일지라도 그 영광의 능력은 이내 사라져버린다. 반인반수는 인간도 아니고 짐승도 아닌 괴물에 불과하다. 하나님의 법궤와 다곤의 신상은 함께 자리할 수 없다. 다윗이 다윗 되려면 어깨에 걸친 사울의 갑옷을 벗어버려야 한다. 사울의 갑옷을 걸친 다윗은 괴인에 다름 아니다. 사울의 창검을 버리고 물맷돌을 들고 설 때 하나님의 신이 임하고 말씀의 능력이 그 입술을 사로잡는다.

말 잘하는 아론이 기교를 버려 기적을 붙들고 세움 받은 모세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말씀의 통로로 확고히 쓰이면 세상은 천상의 메시지를 듣는다. 모세의 뇌에 박힌 하나님의 말씀과 아론의 혀가 만나면 백성들의 심장은 진리로 진동한다. 아론이 모세의 대언자였음에 비추어 오늘의 설교자는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말씀의 대언자여야 한다. 설교자는 모세인 동시에 아론이어야 한다. 하나님께로부터 말씀도 받아야 하고 그렇게 받은 말씀을 그대로 전하는 말씀의 입이 되어야 한다.

말씀이 인박히고 도장처럼 새겨지라

하나님의 말씀이 사라지면 말씀 사역자는 외투를 벗고 강단에서 내려와야 한다. 받은 말씀 없이 청중의 기대감을 만족시키려고 외치다 보면 설교자의 영혼이 먼저 폭망한다. 강단은 사수해서 보존되는 것이 아니다. 진정으로 말씀을 섬기는 사역자라면 영광의 말씀이 훼손당하지 않도록 말씀이 막힐 때 스스로 물러설 수 있어야 한다. 말씀이 사라진 사역자가 그 자리를 비울 때 말씀의 영광이 오히려 손상되지 않는다. 정직한 설교자는 위로부터 임한 말씀이 없을 때 차라리 침묵의 길을 선택한다. 그것이 옳다.

상한 껍질이 벗겨져야 오히려 생명의 알갱이가 드러난다. 썩은 환부를 도려내야 몸을 건강하게 보전할 수 있다. 말씀 사역자가 말씀을 말씀답게 보존할 때 말씀 또한 말씀 사역자를 보호한다. 어떤 경우에도 진정한 말씀 사역자는 말씀의 영역을 벗어날 수 없으니 영광의 광채에서 숨을 수가 없다. 말씀의 종은 입을 넓게 열어 가득 채워주시는 주님의 말씀을 받아야 하고 눈이 열려 그 말씀의 기이함을 보아야 하고 살아있는 말씀이 마음에 인처럼 박히고 도장같이 새겨져야 한다.

말씀이 임할 때까지 침묵하라

말씀이 떠난 말씀 사역자는 어두운 밤길을 등 없이 걷고 빛없는 길을 더듬어 나갈 수밖에 없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진다. 말씀이 없음에도 강단에 머묾은 주님을 욕되게 한다. 일곱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로 다니시는 인자의 형상을 조금이라도 상상한다면 당신은 두려워서라도 한시인들 그곳에 머물 수 없을 것이다. 받지 않았음에도 받은 척하고 전하는 것처럼 허무맹랑한 일도 없다. 받은 것처럼 꾸민 말씀이 소리를 높일 때 진리의 성령은 탄식하고 사탄은 응원가를 부른다. 오늘 우리 시대는 덧칠하고 포장된 말씀들이 그 어느 때보다 횡행한다. 속이 비어 허한 말씀은 듣는 이를 공허하게 만든다. 허섭스레기 같은 말씀들이 고귀한 영혼을 얼룩지게 만든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지 못하면 침묵해야 한다. 참 예언자들은 말씀이 임했을 때만 외쳤다. 이스라엘의 파수꾼으로서 높은 망루에 섰던 하박국 선지자는 하늘을 쳐다보며 말씀 임하기를 기다렸다. 말씀이 임했을 때 그는 세상 한복판을 힘차게 달렸고 만민을 향해 담대히 외쳤다. 외치기 전에 전할 말씀을 채우는 것이 우선이다. 말씀이 없으면 젖 뗀 아이처럼 심령을 고요하게 만들어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기를 사뭇 기다려야 한다. 말씀이 임하지 않으면 임할 때까지 기다리면서 입을 봉해야 한다. 받은 말씀 없이 지절거리는 것은 영혼의 비계덩이만 키울 뿐이다.

우리는 받은 것 없이 너무 많이 지껄여왔다. 간증이란 미명 하에 받은 말씀을 계속 반복하기를 즐겨했다. 간증은 일회성의 역사가 아니라 지속적으로 새로워져야 할 생생한 체험임에도 불구하고 그러지 못했다. 외침이 열정에서 솟구치는 것이라면 침묵은 영적 내공에서 비롯된다. 말씀 사역자들이 쉽게 탈진하거나 기진맥진하는 것은 말씀과의 접촉이 무디어졌기 때문이다. 막힌 전극의 첨예한 끝 부분을 날카롭게 갈아야 한다. 마모된 부분을 과감히 절단하여 새로운 예각(銳角)을 뾰족하게 만들어야 한다.

영광의 말씀을 담는 칼집이 되라

하나님의 말씀은 무뎌질 수 없다. 양날이 시퍼렇게 선 이한 검이기 때문이다. 말씀의 날카로움은 확신에 정비례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목소리에 확신이 결여되면 좌우에 날선 검은 검광(劍光)을 잃고 둔탁한 목검이 되어 영혼에 다가간다. 영혼에 타격을 가해도 겨우 안마 수준이다. 전율도 없고 감동도 없고 변화는 더더욱 없다. 칼집을 새롭게 해야 한다. 보검은 아무렇게 보관하지 않는다. 보검이 들어있는 칼집 또한 보배롭다. 말씀의 주인이 영광스러우면 말씀의 종 또한 영광의 모습을 간직해야 한다. 말씀 사역자는 영광의 말씀을 담는 칼집이다.

세상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다린다. 세상은 하나님의 말씀을 본성적으로 거부하면서 영원한 말씀을 기다린다. 세상의 시작과 끝은 말씀에 매여 있다. 말씀으로 시작된 세상은 말씀의 심판으로 끝을 본다. 창조와 종말 사이에 이루어지는 우주와 만물의 역사는 역시 말씀에 좌우된다. 죄로 관영한 세상이 여태껏 파멸되지 않고 지탱될 수 있는 것은 그나마 말씀의 기운이 세상의 기초를 붙들어주기 때문이다. 하늘과 땅의 토대는 시작부터 끝까지 영원한 말씀 위에 세워져 있다. 그런 말씀의 영광 주위에 포진한 설교자의 영광은 형언할 수 없을 정도이다. 결코 가벼이 다룰 수 없는 당신과 나의 말씀 사역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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