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서 사자같이 외치고, 엎드려 양처럼 우는 설교자

  • 입력 2020.10.16 11:55
글자 크기
프린트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한명철 연속칼럼】 말씀 사역자에게 고하는 말씀 (11)

한명철 목사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은혜와 평강교회를 담임하며 30권의 저술과 글쓰기를 통해 복음 사역에 애쓰는 목회자다
한명철 목사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은혜와 평강교회를 담임하며 30권의 저술과 글쓰기를 통해 복음 사역에 애쓰는 목회자다

듣는 이의 변화를 일으키는 메신저로서의 설교자

오늘도 내 부족한 설교를 듣기 위해 찾아와 시선을 맞추고 고개를 끄덕이며 경이로운 마음으로 들어주는 청중이 얼마나 고마운가! 고단한 삶의 무게가 상당할 터인데, 피곤한 몸을 이끌고 온갖 핑계거리를 잠재우며 먼 거리를 달려오는 것은 ‘설교 듣는 낙’(樂) 때문이라니 솔직히 믿기 어렵다. 진지한 표정으로 ‘정말 그렇다’며 머리를 조아릴 때면 눈물이 날 지경이다. 다 이해할 수 없어도, 다 수긍하긴 어려워도, 다 기억하진 못해도 듣고 싶단다. 설교에 공을 들여야 할 이유로 충분치 않은가! 완숙되지 못한 내 설교를 천상의 메시지로 여겨 들으려는 귀가 사방에 포진하고 있다면 만족하고 감사할 일 아닌가?

하늘과 땅을 진동시킬 설교자가 아니어도 괜찮다. 경탄과 흠모의 대상이 아니면 또 어떤가! 그 흔한 대중 집회 강사로 한 번도 외쳐보지 못한들 대수이랴! 당신을 천상의 메신저로 불러 세우시고 투박한 나무 강단이라 할지언정 전할 말씀을 갖고 들을 대상을 바라보며 말씀이신 하나님 앞에서 ‘한 소리’ 되어 섬길 수 있음이 실로 놀랍지 아니한가! 그런데 단지 소리 나는 구리나 울리는 꽹과리에 머물면 메신저로서의 도리가 아니다. 전적으로 듣는 이에게 달린 문제라 할지라도 메신저는 자신이 외치는 말씀을 통해 변화를 일으키도록 전력투구해야 한다. 전함과 실행, 들음과 실행은 동일한 정도로 중요하면서 어려운 문제다. 설교의 신비함이란 같은 말을 듣고도 반응이 다양하지만 다른 말씀을 들어도 동일한 메시지에 이를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 많은 설교를 들었음에도 존재와 삶의 변화를 이루지 못한다면 그렇게 공허할 수가 없다.

가장 정확한 설교비평자는 설교자 자신

헤롯 안디바는 헤롯대왕의 둘째 아들로 갈릴리의 분봉왕이었다. 그가 동생 빌립의 아내였던 헤로디아를 취해 아내를 삼자 세례요한은 그의 불의함을 지적했고 앙심을 품은 헤로디아의 농간으로 목이 잘려 순교했다. 헤로디아가 요한을 원수로 여겨 죽이려 했을 때 헤롯 안디바는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아 보호했으며 비록 그의 말을 들을 때 크게 번민이 되었지만 달갑게 들었다. 결단으로 도약하지 못한 헤롯 안디바는 양심의 괴로움과 요한의 단 말씀 사이에서 우왕좌왕하다가 하나님의 메신저를 사지로 몰아넣은 원흉이 되었다.

듣는 이가 없다면 전하는 자의 존재 자체가 무색하다. 평가도 아무 말 없음보다는 낫다. 호평이든 악평이든 칼날을 세우고 광택을 유지함에는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아무 소리가 없으면 메아리가 들려온다. 메아리는 항상 있는데 주변의 소리가 커 거기 묻혀버려서 우리가 듣지 못하는 것이다. 어쩌면 가장 정확한 설교비평은 설교자 자신에게서 나올지 모른다. 메아리의 정체는 그것을 외친 자의 것이다. 설교 후에 가장 빨리 낙담하고 부끄러워하는 것도 설교자요 청중의 반응 여부에 관계없이 기뻐하며 감사하는 것도 설교자 자신이다. 소위 “죽 썼다!”고 제일 먼저 알아차리는 것은 강단을 내려오기 전의 설교자요 그 다음이 살을 맞대고 사는 배우자다.

설교 후 청중의 반응과 설교자

말씀이신 주님도 무관심 계층이 아니라 관심 계층, 그것도 적극적인 추종자들 중에서 품평이 쏟아졌다. “이 말씀은 어렵다”며 아예 등 돌린 행동파도 있었다. 그것도 소수가 아니라 대다수였다. 오병이어의 놀라운 기적 후에 기적의 진정한 의미를 설파하는 중에 그들은 진중한 말씀에 초를 치고 재를 뿌렸다. 주님이 상심하실 정도였다. 영생의 말씀을 붙든 측근들이 아니었다면 견디기 힘든 순간이었다. 전문적인 말씀 해설자들에 비해 주님의 말씀에는 거부할 수 없는 권세가 느껴졌고 따르는 능력들이 그 말씀을 뒷받침했음에도 사람들은 어깃장을 놓곤 했다. 많은 경우에 오해하고 넘겨짚고 억측을 더했다.

사실 케이스를 따져가며 비교한다면 우리의 경우는 엄청 봐주는 편이다. 대놓고 칼날을 세우지는 않는다. 물론 대형교회 설교자들의 메시지에서 공격거리를 찾기 위해 꼼꼼하고 빈틈없이 조사하는 “검사꾼”(scrutator)”들도 있지만 일반적인 현상은 아니다. 우리의 청중은 편안하고 예의바르다. 설교 후에 다가와 간단한 멘트를 남기는 것도 대부분 긍정적인 덕담이 우세하다. 어쩌면 의례적인 인사말에 길들여져 더 이상 전진하고 상승하는 기운이 감퇴되었는지 모른다. 격려와 후원은 힘이 되지만 실제보다 조금 부풀린 덕담은 뼈아픈 비평보다 낫지 못하다. 여하튼 설교자를 무지막지하게 혹평하는 세력은 없는 셈이다.

서서 사자같이 외치고, 엎드려 양처럼 우는 설교자

“은혜 받았습니다!” 하는 인사말을 듣고 마주 잡은 손을 살며시 흔들 때(지금은 코로나 사태로 인해 안 되겠지만) 사실이면 감사와 자긍심으로, 사실이 아니면 격려와 경고음으로 아로새기면 된다. 우리는 이미 완성된 작품(being)이 아니라 되어가는 도중에 있는(becoming) 미완의 그릇이기에 자만도 자학도 금물이다. 어차피 한 사람의 설교자로 세워진 이상 완전히 강단을 내려오기까지 세평에 시달리는 것은 피할 수 없다. 일희일비할 이유가 없다. 감정적으로 대응하기 시작하면 걸려든 올무를 벗어나기란 쉽지 않다. 무소(인도의 외각 꼬뿔소)의 뿔처럼 단호하고 당찬 마음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설교자로서의 일생을 졸작으로 만들지 걸작으로 만들지는 전적으로 자신에게 달려 있다. 세인의 평, 동역자들의 시샘이나 방해, 목회환경은 설교의 미숙에 어떤 변명도 되지 않고 시절 탓, 시운론(時運論), 흙수저 타령 같은 그럴싸한 푸념도 설교의 완성도와는 아무 상관없다. 하나님 앞에 사는 길은 죽은 듯이 사는 것이고, 서서 사자같이 외치려면 엎드려 양처럼 울어야 한다. 유다 지파의 사자와 유월절 어린양이 한 인격에서 오버랩 될 때 한 사람은 탁월한 메신저로서 전할 메시지를 뇌로 받고 가슴에 새기며, 입으로 전하고 온몸으로 절규한다. 설교비평에 대해서는 지난번에 조금 다루었기에 여기선 더 이상 다루지 않겠다. 설교자가 하나님의 영광이요 자랑이듯 청중은 설교자의 영광이다.

성경의 엑기스가 성도의 골수에 박히는 설교

이동원 목사는 한국의 대표적 설교자 중의 한 사람이다. 은퇴 이후에도 꾸준히 설교에 관련된 사역을 하고 있다. 그가 2018년 7월 11일 경기도 가평의 필그림하우스에서 열린 <설교 클리닉>에서 “적어도 사흘은 성경본문만 갖고 씨름하라”는 요점으로 강의를 전개해갔는데 어떤 상황에서도 필히 적용할 만한 설교 금언이다. 자신의 설교 작성 과정을 요약한 내용을 약간 인용한다. “월요일 아침 눈뜨면서부터 설교 준비를 시작하는데 목요일 아침까지는 성경 본문만 갖고 씨름하고 다른 어떤 것도 보지 않는다. 거실, 책상, 침대 옆, 화장실 등 곳곳에 성경 번역본을 두 개씩 놔두고 본문의 핵심이 무엇인지 그것만 생각했다.”그는 남의 강해집이나 주석서를 먼저 읽으면 영향을 받거나 심지어 표절의 위험이 있어 그 대신 영어, 헬라어, 히브리어 등 다양한 성경 번역본을 놓고 주제가 뭘까, 메인 아이디어가 뭘까 생각하며 읽는다는 것이다. 능력 면에서 개인적 편차가 있으므로 모두가 적용하기 어렵겠지만 성경 분문에 사흘 집중하는 것은 누구도 할 수 있는 것이기에 가장 확실하고 훌륭한 방법이라 생각된다.

설교는 하나의 생명체이기에 사람의 인체 구조와 연결시켜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예를 들어 전술한 이동원 목사의 성경 본문 강조는 설교의 골격 형성에 절대적이다. 아무리 명문으로 완성된 설교라 해도 성경에서 뽑아낸 엑기스가 골수에 박히지 못하면 그 설교는 무골증이다. 설교의 메시지 전달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보조적으로 붙이는 예화나 이야기는 살을 입히는 것과 같다. 설교의 문장화는 신경세포를 적절히 연결시키는 작업이며 고저강약의 음성에 표정과 몸짓 등은 몸을 단장시킴에 해당한다. 매 주 설교를 하는 횟수만큼 새로운 생명을 창조하는 수고와 작업이 힘들수록 기쁨 또한 배가하는 법이다. 산모가 오랜 기다림 끝에 아이를 맞이하는 날, 그것이 난산을 극복한 역경의 열매일 때 환희와 행복감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과 다르지 않다.

 

저작권자 © 본헤럴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기사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