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의 진리를 땅의 이야기로 전하는 메신저
왜 이 주제를 계속 다루는가? 활자화하지 않아도 현장에서 부딪히는 여러 상황에서 말씀 사역자들이 이미 겪었고 지금도 씨름하고 있으며 죽기까지 극복하기 힘든 난제 중의 난제임이 명확한데 해법 없는 진단과 서술이 더 필요한가? 이렇게 물을 수 있다. 그렇다고 잠잠하면 괜찮은 것인지 되묻고 싶다. 이 주제를 여태껏 붙든 연유는 분명하다. 해법은 없지만 해법에 이르는 길을 알기에 함께 찾아보자는 취지며, 암울한 시대마다 탁월한 설교자들이 파국 직전의 교회를 붙들고 세상의 등불이 되었는데 과거의 흑암기와 견줄 수 없을 만큼 최악의 때를 맞이한 지금 교회의 버팀목이 되고 세상의 길라잡이가 될 만한 등불 같은 설교자 없음을 고민해보자는 마음에서다. 가림막을 제하고 가면을 벗어 꾸밈없이 허심탄회함으로 서로에게 열려서 진리의 아들딸들을 끌어 모을 펄럭이는 깃발로 스스로를 세워보자는 염원에서다.
설교자로서의 명성 얻음은 염원의 뒤 서열에도 끼지 못할 정도로 관심 밖이다. 물론 탁월한 설교자에 대한 평생의 로망을 이룩함도 아니다. 설교 주제에 천착(穿鑿)함은 억지가 아닌 정말 연구에 대한 갈망 때문이다. 설교는 하늘의 진리를 땅의 이야기로 풀어 전하는 신비로운 과업이다. 인간의 지혜나 지식을 뛰어넘어 불가항력적 도움이 없인 진행될 수 없는 일이다. 정신을 계몽시키거나 사상을 전환시키는 일도 힘들지만 영혼을 탈바꿈시키는 일에 비할 바 못된다. 말씀 선포의 타깃은 오직 하나! 영혼 구원에 있다. 구원 받는 영혼이 있고 없고, 많고 적고를 떠나 메신저가 메시지를 작성하고 전달하는 과정에 구령열에서 동떨어져 있다면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 다시 말해 메신저가 영혼에 대한 긍휼이 없다면 기도해서 하나님의 긍휼로 빈 마음을 채우든지 아니면 이 길을 등지는 것이 모두에게 이롭다. 하나님이나 회중이나 자신에게나 그것이 안전하다. 메마른 영혼은 결코 메마른 영혼들을 촉촉하게 만들 수 없다.
섭리의 정점인 영혼 구원을 전하는 메신저
말씀 연구와 한 편의 설교에 공을 들이는 것도 분명한 이유가 있어서다. 인간 영혼의 구원을 위함이다. 이 최종적이고 궁극적인 목적을 잊어버린다면 말씀 연구와 설교는 허공을 치는 주먹질과 소리 나는 꽹과리에 불과하다. 죄가 세상에 들어오지 않았다면 천상의 메신저를 따로 둘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세상은 전혀 다른 형태로 존재했을 테니 말이다. 에덴동산의 연장이든지, 아니면 보다 완전한 형태의 생활공간이 주어졌을 것이다. 타락은 인간에게 불치의 아픔과 슬픔을 안겨주었다. 유다의 배신을 가리켜 “오, 축복받은 죄여!”라 외쳤던 어거스틴은 한때 유다지지자로 지탄받긴 했지만 그의 탄성은 유다의 배신이 있었기에 맛보게 된 예수 그리스도의 한량없는 사랑에 대한 역설적 감격이었다. 결과론적인 해석상 적용일 수 있지만 역시 과한 표현이 아닐 수 없다.
유다의 배신도 아담의 타락이 없었다면 생기지 않았을 것이고 아담의 타락은 사탄의 꼬드김이 없었다면 불가했을 것이니 사탄의 유혹이 주님의 십자가 사랑을 가능케 했다는 식의 적용은 괴이한 결론에 다다를 수밖에 없다. 아니다. 창조와 타락의 전말은 성경이 이르는 대로 자명한 사실이다. 죄는 악이요 타락은 씻지 못할 불순종의 결과물이다. 그로 인해 뚜렷한 형벌들이 가해졌지만 가장 치명적인 것이 찌그러진 인간 영혼이었다. 그래서 하나님 섭리의 정점에는 인간 영혼의 원상회복이 있다. 인류 구원은 하나님의 영원한 뜻이다. 이를 위해 한 민족을 선택하셨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 그들을 선택하신 것이 아니다. 그들을 계약 백성으로 삼아 율법을 주시고 율법을 온전히 준행함으로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 됨의 정체성을 통해 만민을 구원하심에 목적이 있었다. 이 일을 위해 제사 제도도 확립하시고 예언자들도 파송하셨다. 이스라엘은 불순종과 반역의 두 축을 따라 돌며 하나님의 의도를 거스르고 구원의 모델 역할에 실패했다. 그 와중에 하나님은 율법과 예언자들의 말씀 속에 오실 메시아의 이미지를 때때로 부각시키셨다.
가장 현실적이면서 초현실적인 실체를 다루는 메신저
때가 되자 하나님의 의지를 실현시킬 메시아 곧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다. 율법의 완성과 예언의 성취로 오신 그분은 제사 예법의 모형과 예언서에 언급된 그대로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셨다. 선민 이스라엘의 불완전한 그림자를 뒤로 하고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실체, 교회라는 구속공동체가 세상 한 가운데 자리 잡으면서 만인구원의 대업이 본격 가동되었다. 바울은 로마서 9-11장에서 이방인을 통한 유대인의 구원 문제를 깊이 있게 다룸으로 선민을 통한 이방인 구원이 실패했지만 어떻게 교회 안에서 이방인을 통한 유대인의 궁극적 구원이 이루어질 것인지를 통찰력 있게 설파했다. 교회는 마지막 때의 만인구원 사역에 있어 중추적인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하나님은 교회에 여러 직분을 세우시는 중에 목사를 허락하셨다. 그 목사에게 말씀의 해석과 메시지 전달이라는 막중한 사명을 맡기셨다. 제사장이 아니지만 제사장적 사역을 포함하며 예언자가 아니지만 예언자의 사역도 감당해야 하는 목사의 여러 임무 중에서 가장 돋보이는 것이 말씀 사역이다.
말씀의 정수(精髓)에는 영원을 앞에 두고 펼쳐진 공간과 시간이 마치 날줄과 씨줄처럼 직조(織造)되는 그 사이에 인간이 역사의 주체가 되고 하늘과 땅의 천변만화를 이루는 모습이 여지없이 드러난다. 땅의 이야기만이 아닌 하늘의 요소가 중심을 차지하고 과거, 현재, 미래의 시간만이 아닌 영원이 꿈틀댄다. 다시 말해 사람들이 이승과 저승이라 표현하는 금세와 내세의 삶이 메시지의 주요 배경을 이룬다. 구원, 영화, 천국, 영생은 메시지의 핵심 주제인데 현실에서의 부분적 경험과 함께 내세에서의 완전한 경험을 포함하기에 성경적 메시지는 가장 현실적이면서 초현실적인 실체를 다루게 된다. 깊이 있는 연구가 반드시 필요한 이유로 충분치 않은가! 우주과학자가 아님에도 우주과학을 섭렵해야 하고 철학자가 아님에도 철학적 사고가 필요하고 문학자가 아님에도 독서와 글쓰기 훈련에 진력해야 한다.
복음의 진수를 세상에 퍼뜨리는 메신저
팔방미인이 되라 함이 아니다. 말씀과 기도에 능한 메신저이면 족하다. 열두 사도와 바울 사도는 여러 면에서 비교된다. 모두 대단한 사역들을 이루었지만 바울이 기독교에 끼친 공헌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말씀과 기도의 영역에서는 거의 엇비슷했을 것이다. 메신저의 관점에서 볼 때 바울은 능히 사표가 되기에 넉넉한 존재다. 그의 삶과 사역만이 아니라 메신저의 관점에서 특히 그러하다. 그의 학문적 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였다. 고린도교회 교인들 중에서 바울에 적대적이었던 무리들은 “편지들은 무게가 있고 힘이 있으나....... 그 말도 시원하지 않다”(고후 10:10)고 빈정거렸는데 바울의 글이 지닌 무게를 그들도 인정했음을 알 수 있다. 말에 관한 그들의 시비나 바울 자신의 “내가 비록 말에는 졸하나 지식에는 그렇지 아니하니.”(고후 11:6)란 고백처럼 바울이 설교에 능력이 부족했다고 여기는 것은 잘못이다. 오히려 그 반대다. 사도행전에 비쳐진 바울의 설교는 힘이 넘쳤고 논쟁자들의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아레오바고에서는 에피큐러스학파와 스토익 학파의 철학자들이 바울을 말쟁이라 칭할 정도로 그는 변론에 능한 자였다. 바울을 고발하기 위해 대제사장 무리들은 전문적인 말쟁이였던 변사 더둘로를 앞세워 바울을 논박했으나 바울의 논리 정연한 진술을 당해내지 못했다. 바울은 동시대의 논객들이나 철학자들을 침묵시킬 정도의 탁월한 연사였다. 그는 바리새인으로서 율법에 정통했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고 난 이후부터는 복음적 관점에서 당시의 성경에 누구보다 통달했다. 그만큼 연구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서신들은 그가 얼마나 구약에 정통했으며 복음이란 안경으로 재해석된 그 내용들은 당시의 크리스천들에게 영적 지침서로 활용되었으며 정경에 포함되는 영광을 얻었다. 편지 한 구절을 써도,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 복음을 전하든 인간 영혼을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자식에서 하나님께로 이끌려 했던 그의 메시지에는 하나님의 마음이 담겨 있었고 능력을 끌어당겼다.
바울처럼 글과 말을 통해 복음의 진수를 끄집어내 세상에 퍼뜨리는 메신저가 되자는 취지가 이 오랜 시리즈의 연재에 담겨 있다. 바울을 바울 되게 하신 전능의 하나님께서 뜻하신다면 우리 각자가 ‘반드시 되어야 할 그 메신저가 됨’에 무슨 하자가 있으며 어떤 장애가 있을 것인가! 하나님이 빚으신 메신저의 모습으로 그에 합당한 메시지 창출에 애쓰는 자화상을 그림은 말씀의 종 된 자가 누릴 기쁨이다. 이런 갈망 때문에 앞으로도 계속 이 주제와 연관된 글을 이어갈 것이다. 오늘 우리에게는 설교 준비에 집중, 몰입할 수 있도록 돕는 여러 편이한 체제와 안전한 도우미들이 주변에 기립해 있어 부족한 것이 전혀 없다. 기도에 전념하며 말씀에 파묻히면 살아 역사하는 메시지의 전달자가 되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다. 그럼에도 시도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부끄러운 종들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