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말씀이 드러나게 투명한 설교자
대언자는 하나님에게서 받은 감동을 따라 한편의 설교를 준비해도 한 땀 한 땀 정성을 다해야 한다. 여기서도 조금, 저기서도 조금 하는 식으로 짜깁기해서는 금방 들통 난다. 하나님의 성령은 약삭빠른 말재간꾼에게 역사하지 않고 성실한 말씀의 사람을 들어 쓰신다.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말씀을 전하는 자가 우리 중에 얼마나 있을까? 거의 대부분이 자기가 생각하는 바를 따라 전하고 있지 않은가! 하나님의 말씀이 중심 되지 못하고 자신의 의도가 중심이 되며 말씀 인용은 다만 자신의 논지를 뒷받침하기 위한 신성한 장치로 전락해버린다. 결국 말씀을 빙자하는 죄를 범한다. 당신의 말씀에 권능이 따르지 않음은 당신이 대언자로서 그분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말씀을 빌려 당신 자신의 뜻과 사상을 전하기 때문이다. 주객이 전도된 이런 메시지에 영광이 드러날 리 없고 능력이 따를 리 만무이다.
하나님은 뭇 마음을 감찰하여 모든 사상을 아신다. 이 말은 사람의 생각 배후에 있는 각각의 의도를 파악하신다는 뜻이다. 마음의 순수와 정결을 이루지 못하면 황금빛을 안개비처럼 뿌리는 설교라 한들 영혼을 구원함에는 무기력하다. 설교 작성에서 전달에 이르기까지 오로지 말씀이 확연히 드러나도록 설교자 자신이 투명해야 한다. 하나님께 감출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이제라도 당신과 나는 자기 말을 전하고자 하나님의 말씀을 빌려 쓰던 허물을 벗고 하나님의 말씀을 말씀답게 전하려 애써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고는 삶에 영적 능력이 나타나지 않고 어떤 변화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전하는 자나 듣는 자의 삶에 실질적인 변화의 능력을 가능케 하는 것은 오직 그분의 말씀뿐이다.
성령을 한량없이 받은 말씀사역자
복음은 모든 믿는 자들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인데 능력의 말씀을 도외시하고 시류에 편승하는 말잔치는 사람의 영혼을 살리기는커녕 도리어 죽인다. 능력이 거세된 모든 말씀은 모양만 그럴듯하게 보일뿐 실상은 복음이 아니다. 능력의 말씀을 능력 있게 전하려면 성령을 한량없이 받아야 한다. 성령은 설교자의 내면을 능력으로 채워 그것이 외면에까지 드러나게 만든다. 누가 하나님의 사람인가? 하나님의 대언자다. 누가 하나님의 대언자인가?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는 자다. 누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가? 성령을 한량없이 받은 자다. “한량없음”은 곧 무제한(without limit)이다. 말 그대로 무한 성령이시다.
“오, 하나님이여! 한량없는 주의 사랑, 주의 은혜, 주의 능력, 주의 긍휼을 주옵소서! 주의 성령을 제한 없이 쏟아 부으소서! 인간의 뜻에 막히고 인간의 고집에 꺾이고 인간의 욕심에 멍든 당신의 말씀을 온전케 하옵소서! 바로 제가 하나님의 말씀만 하게 하옵소서! 제가 입힌 언어의 옷이 더럽고 상했다면 찢어버리옵소서! 사람의 귀를 즐겁게 하려는 얄팍함을 제단 숯불로 지져주소서! 소리가 분명치 않다면 저의 나팔을 단박에 부수소서! 저의 말을 죽이고 그 말씀만 기억되게 하옵소서! 뒤따르는 권능으로 아버지의 말씀임이 확인되게 하옵소서!”
대언자 그리스도와 대언의 영이신 성령 사이에 선 자
하나님의 말씀만이 능력이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생명이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생명을 준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온갖 죽은 것들을 살리고 하나님의 말씀만이 살아남는다. 하나님의 말씀이 사라지면 대언자는 허깨비에 불과하다. 살아있는 대언자가 되려면 대언의 영이신 성령을 받아야 한다. 성령을 모시고 그분이 주시는 감동과 지혜를 따라 말씀을 섬겨야 한다. 말씀이신 주님은 하나님 앞에 계신 우리의 대언자이시다. 대언자는 대언의 영이신 성령과 대언자 그리스도 사이에서 영광스런 사역을 잘 감당해야 한다.
사무엘은 최초의 대언자로서 많은 대언자들을 키웠다. 그는 참으로 이스라엘의 영적인 기초를 다진 하나님의 종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그대로 전했기 때문에 대언자가 되려고 그에게 몰려든 사람들이 많았다. 사무엘은 마지막 사사요 첫 대언자로서 자신의 가교적 직무를 성실히 수행했다. 사무엘을 정점으로 한 선지학교는 후대에 이르러 북이스라엘의 엘리야와 엘리사에 의해 확장, 발전되었다. 사무엘 시대가 끝나고 이스라엘에 대언자들이 세워지기 시작할 바로 그때에 사탄도 가라지처럼 거짓 대언자들을 곳곳에 심었다.
대중적 인기를 앞세운 거짓 선지자들
구약 역사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참 예언자들보다 거짓 예언자들이 우세했고 백성의 마음을 얻거나 세상에 영향을 주는 면에서 월등했다는 점이다. 하나님에게서 멀어진 인간의 마음이 거짓으로 채워졌기에 바른 소리보다 거짓 외침에 더 잘 이끌렸다. 처음부터 거짓 신들의 메신저로 드러난 이들도 있지만 중도에 거짓 예언자로 돌변한 이들이 많았다. 왕의 주변에나 백성들 곁에는 이런 자들이 늘 머물러있었다. 그들은 거짓 가르침으로 미혹하고 꿈과 환상과 계시를 들먹이며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그들의 배후에는 거짓의 아비 사탄이 있었다.
이 시대에는 바른 대언자들의 무리가 떼를 이루도록 애써야 한다. 거짓 대언자들로 혼란의 세월을 보내야 했던 이스라엘 역사처럼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대언자, 그리스도의 대언자, 성령의 대언자, 말씀의 대언자를 사칭한 무리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신학 교육을 받은 적은 없지만 자신이 이룬 학문적 위업 아래 대중적 인기를 내세워 성경을 가르치거나 신학 강연을 주도하는 거짓 선생들이 교회 담장을 허문다, 이상야릇한 신천지는 교주를 유일한 대언자라고 주장함으로 말씀 사역자들의 대언 사역을 총체적으로 부정한다.
사라진 말씀의 영광을 재현시킬 대언자들
대언자가 대언 사역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거짓 대언자들이 활개를 친다. 하나님에게서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받는 길은 말씀 통달과 깊은 기도뿐이다. 참 대언자들이 사라진 말씀의 영광을 재현시켜야 한다. 거짓 대언자들을 부끄럽게 만들 참 예언자들이 말씀 사역의 현장에서 역사해야 한다. 참 대언자(파라클레토스)이신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로서 모든 그리스도인은 대언자의 정체성을 지녀야 한다. 하물며 말씀 사역에 임하는 종들의 경우겠는가! 대언자라 일컫기에 말씀 사역자들은 수시로 주님의 말씀을 얻어먹으면서 자양분을 공급받아야 한다.
불같은 말씀의 일렁거림에 마음과 생각이 데이더라도 말씀을 온 가슴으로 품어야 한다. 칼 같은 말씀에 마음과 생각이 베이더라도 말씀의 검무를 익혀야 한다. 어떤 형태로든 위로부터 말씀이 주어지지 않으면 대언자는 살아도 산 것이 아니다. 대언의 말씀이 임하면 지워지지 않는 얼룩처럼 그 말씀들이 마음과 생각의 언저리를 계속 맴돈다. 꿈속에서까지 말씀의 내용이 전개된다. 이럴 때는 말씀을 방치해선 안 된다. 말씀의 보자기들을 풀어 헤쳐야 한다. 그것이 다독거리는 말씀이든지 찌르는 살 같은 말씀이든지 주님의 백성들에게 전해야 한다. 그들의 눈치가 아니라 성령의 뜻을 살피며 그들의 반응이 아니라 성령의 감동을 유념해야 한다.
섬광처럼 번득이며 영혼을 파고드는 말씀
하나님이 주신 말씀이라면, 성령의 빛에 조명된 말씀이라면 단 한 마디의 말씀이라 할지라도 영혼 깊숙이 역사한다. 때로는 천하보다 귀한 한 영혼을 깨우고 세상을 진동시키기 위해 많은 말씀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한두 말씀이면 족하다. 스스로가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지는 한두 말씀이 능력이 되고 생명이 되며 위대한 역사를 일으킨다. 섬광처럼 번득이며 영혼을 파고드는 말씀, 쏜 살 같이 날아와 심장을 꿰뚫는 말씀, 대언자의 영에 쐐기처럼 박힌 말씀은 금보다 소중하고 보석보다 더욱 존귀하다.
대언자 자체가 여호와의 손의 ‘아름다운 면류관’(a crown of splendor)이나 하나님 ‘손의 왕관’(a royal diadem)처럼 귀하다. 그의 말씀이 역사하는 영역은 결코 ‘버려진 땅’(Deserted)이나 ‘황무지’(Desolate)가 아니다. 이런 자존감이 있을 때 대언자는 이 사역에 목숨을 걸 수 있다. 밤을 쪼개가며 자신만의 황금 시간대에 한 땀 한 땀 바느질하듯 말씀의 역사를 숙고한다. 더 많이 엎드리고 더 깊이 기도함으로 주님의 지혜를 구한다. 비천한 육체로 주님의 영광을 접하게 해달라고, 말씀이 권능으로 임하게 해달라고, 말씀에 사로잡혀 하나님의 말씀을 말씀답게 보일 수 있게 해달라고 가슴속에 지펴진 거룩한 열망을 계속 토해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