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뜻에 둔감한 잠자는 자
일어남 자체가 능사는 아니다. 일어난다고 모든 것이 제자리를 잡는 것은 아니다. 일어나지 않음보다 못한 일어남도 있다. 요나는 일어났지만 “자는 자”로 불렸다. 일어나도 깨지 못하고 졸음 상태에 머문다면 황당한 일이 아닌가! 때로는 우리가 적절치 않은 상태에서 일어나야 할 경우가 있다. 위기의 때에 무릎 꿇기보다 자리에 누운 모습의 민낯으로 드러날 때는 민망하기 짝이 없다. 요나는 다시스로 도망가면서 남 보기가 창피했던지 아예 배 밑창에 드러누워 잠을 청했다. 작정하고 하나님의 뜻과 멀어지는 항해 길에 나서면서 잠들 수 있었다는 사실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다. 흔들리는 배 안에서 잠들 만큼 요나의 영혼은 하나님의 심정에 대해 둔감했고 삶과 사역은 불순종으로 충만했다.
배는 큰 폭풍을 만나 거의 깨어질 위급한 상황이었다. 배를 가볍게 하려고 선원들이 배안에 있던 물건들을 모조리 바닷물에 내던졌다 이때까지도 요나는 깊은 잠에서 깨어나지 않았다. 선원에게서 보고받은 선장이 배 밑창에 내려와 정신없이 자고 있던 요나를 흔들어 깨웠다. 선장의 일갈이 요나의 정신을 번쩍 들게 했다. “자는 자여, 어찌함이냐? 일어나서 네 하나님께 구하라. 혹시 하나님이 우리를 생각하사 망하지 아니하게 하시리라.”(욘 1:6) 요나가 깨어 일어났음에도 선장은 그를 “자는 자”라 불렀다. 깨어 있어야 할 자가 깨어야 할 시간에 깨어 있지 못하고 잠이 들면 세상 사람들에게 조롱당한다. 요나는 일어나서 할 일이 있었다. 사람들의 물고기 밥으로 화할 절체절명의 순간에 드러누워 잠을 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나님을 거역하고 불순종하면 요나의 경우처럼 하는 일이 죄다 빗나간다. 아귀에 맞지 않는다.
기도와 말씀으로 깨어 있는 자
사람들은 경성의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깨어있지 않은 성도나 교회를 향해 “자는 자여, 어찌함이냐?”며 힐난의 목소리를 높인다. 위기의 순간에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자는 악행자보다 나을 것도 없다. 사무엘이 성소의 불을 밝히고 있을 때 자기 처소에 몸을 눕혔던 엘리나 신랑 오시기를 고대하던 열 처녀가 다 졸며 자던 상황은 생각 외로 우리의 삶에 팽배하다. 깨지 않는 세대를 비평하는 자들 역시 졸음을 이기지 못해 함은 아이러니다. 조는 자가 빨리 깨어나지 못하면 머지않아 자는 자가 되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결코 졸지 않으리라 장담했던 주님의 수제자들도 쏟아지는 잠을 이기지 못해 그 긴박했던 밤에 깨어있지 못했다. 십자가의 쓴 잔을 앞에 놓고 인류 구원의 성패가 달린 대격전장에서 홀로 사투하시던 주님을 위해 적어도 베드로, 요한, 야고보만은 중보로 깨어있어야 마땅했다.
어쩌면 평상시에 잘 깨어있던 우리가 정작 경성이 필요한 위기상황에서 깨어있지 못함은 우리의 영혼이 영의 세계에 민감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면 미몽 상태에서 경성의 메시지를 외치는 격이 되어 말씀이 역사할 여지가 없다. 잠든 영혼의 상태에서 잠든 세상을 향해 깨어 일어나라 소리치는 것처럼 황당한 일도 없다. 진지한 다그침이 아니라 잠꼬대에 불과한 그 소리에 누가 과연 주목할 것인가! 기도와 말씀으로 경성해있는 영혼은 잠든 대언자의 공허한 울림을 안다. 경성한 영혼은 자신의 경고가 잠꼬대가 되지 않기 위해 기도로 깨어 있다. 말없이 주님 발 앞에 엎드려 잠든 엘리가 일어나기를, 코마 상태의 영혼들이 깨어나기를, 교회 공동체의 이삭에 충실한 곡식 열리기를 밤낮 가리지 않고 부르짖고 또 부르짖는다.
하나님께 등 돌린 종은 세상도 등 돌려
배 밑창에서 잠든 요나 신드롬이 개인만이 아니라 공동체의 현상으로 확대되면 시대적인 졸음 현상에 세상은 재난 대처 능력을 잃어버린다. 많은 교회가 세상의 향취에 푹 젖어 있다. 잠든 상태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교회가 세상의 지탄에 아예 무감각해지고 나른해졌다는 사실이다. 선장의 마지막 표현은 참으로 으스스한 기분을 느끼게 한다. 선장은 요나의 신분에 대해 알았을 가능성이 높다. 선실에 누웠던 상황, 그가 하나님 믿는 자임을 알았던 사실, 그에게 기도를 요청한 점 등이다. 하나님께 등을 돌린 종은 세상도 등을 돌린다. 알아주지도 않는다. 그리스도인의 존재 의의와 가치는 그들이 하나님을 위해 가장 확실하게 살고 일할 때 빛난다.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히 어쩌지를 못한다.
요나 선지자를 생각하면 참 특별한 기분이 든다. 지나친 민족주의로 인해 세계를 품으신 하나님의 가슴에 주먹질을 한 반항아가 아닌가! 신앙이 없는 것도 아닌데 감히 하나님을 향해 어깃장을 놓은 그의 행위 자체만 본다면 이해하기 어렵다. 아무리 좋게 생각해도 괘씸하기 짝이 없는 불순종의 종이다. 그래도 하나님께서는 그 종을 버리지 않으셨다. 하나님을 모르던 니느웨 백성까지 품에 안으신 하나님께서 요나를 내칠 리 만무했다. 하나님이 요나를 책벌하지는 않으셨지만 원만한 빛을 거부한 그 종에게 일말의 교훈은 필요했다. 그래서 큰 물고기 뱃속에 집어넣어 3일 동안이나 깊은 흑암에 처하게 했다.
무성의한 요나 그러나 뜨거운 성령의 역사
재미있는 것은 요나의 반응이다. 고기 뱃속에서 강력한 위액에 녹아내릴 상황이었지만 요나는 거기에서 자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가장 기도다운 기도를 드렸다. 그가 지금까지 드렸던 수많은 기도보다 더 절박하고 간곡한 심령으로 자신을 흑암 속에 버려두신 빛의 하나님께 부르짖었다. 기도도 짤막한 문장이 아니었다. 내용상 회개의 기도이니 조용히 기도했을 까닭도 없고 더욱이 묵상기도를 드렸을 리도 없다. 요나는 끈적끈적한 위액을 뒤덮어 쓰고 창자 사이로 요동치면서 거의 발악적으로 기도했을 것이다. 더 오래 있었으면 요나는 강력한 위액에 녹아 뼈만 앙상하게 남은 모습으로 변했을 것이다.
다행히 물고기는 요나에 비해 순종적이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자 물고기는 즉각적으로 요나를 토해냈다. 하나님은 불순종한 요나를 순종하는 물고기를 통해 살리셨다. 세상의 빛을 다시 보고 신선한 공기를 호흡하면서 요나는 기적적으로 생환했다. 그런 요나에게 두 번째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다. 불순종으로 인한 생사의 고비에서 살아난 요나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했고 사흘을 걸어 니느웨 성에 도착했다. 도착하자마자 요나는 하루 동안 성읍을 돌아다니며 큰 소리로 외쳤다.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그것은 메시지라 하기보다는 차라리 저주에 가까운 예언이었다. 요나가 주어진 메시지를 전하긴 했지만 그의 마음은 여전히 굳어 있었다. 요나는 불순종의 사람에서 성의 없는 전도자로 약간 바뀌었을 뿐이었다. 하나님이 누구신가? 요나는 니느웨의 돌이킴이 가능한 없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무성의한 몇 마디를 던졌지만 하나님은 니느웨 백성들의 마음을 움직이셨다. 요나의 무성의한 전도를 통해 니느웨 백성들의 마음을 뒤흔든 건 하나님의 성의였다. 주의 성령이 그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자신의 감정을 넘어 하나님의 마음을 전하라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회개의 표징으로 왕부터 일반 백성에 이르기까지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심지어 짐승에게까지 굵은 베옷을 입게 하고 재 위에 엎드렸다. 왕은 온 백성이 금식하며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왕명으로 선포했다. 전 민족적인 회개의 역사가 일어났다. 하나님은 이내 뜻을 돌이켜 아무 재앙도 니느웨에 내리지 않으셨다. 이방인이 돌이켜 하나님을 믿는다면 보통 선지자라면 기뻐했을 것이다. 완고한 요나는 그들의 신앙적 반응을 아주 싫어했다. 그들이 회개해서 멸망당하지 않은 것도 싫었고 그들에게 재앙의 뜻을 돌이키신 하나님도 못마땅했다. 하나님과 한바탕 설전을 벌인 요나는 성읍 동쪽 높은 곳에 올라가 혹시라도 성에 무슨 나쁜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었다.
비뚤어진 요나의 마음은 아직도 제대로 펴지지 않았다. 그는 내심 니느웨가 폭삭 망하기를 기원했다. 메시지를 전한 후에 청중이 메시지를 거부하길 바라는 메신저도 있을까? 없을 것 같은데, 없어야 하는데 그런 메신저가 우리 가운데 있음이 부끄럽다. 요나의 속 좁음을 비판하며 옹졸한 영성에 침을 뱉지만 우리 역시 요나의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함을 부인키 어렵다. 우리의 사역에 재를 뿌리는 자들, 우리를 못 살게 굴던 반대자들, 긁고 찌르고 빈정대던 죽정이 같은 세력들이 깡그리 불쏘시개 감으로 화하길 빈다. 눈앞에서 잿더미로 화하는 모습을 보길 은근히 바란다. 세상의 희망이 되고 세상에 구원을 가져오는 것은 메신저의 메시지 자체가 아니다. 메신저의 본심이 어떠한가가 관건이다. 자신의 의지나 감정에 관계없이 메시지에 확실히 담긴 하나님의 뜻을 오롯이 전해야 한다. 어느 경우이건 멸망하기로 작정되었던 자라 할지라도 그의 패망을 달갑게 여기는 마음을 털어버려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