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일어나 싸우면 용사가 된다
거대한 돌덩이가 당신을 짓누르고 무거운 쇠뭉치가 당신을 내리쳐도 일어서려는 의지만은 포기하지 말라! 당신은 무모한 싸움일지언정 무의미한 싸움을 싸우지 않았다. 무익해보인 듯 한 싸움도 무가치한 순간은 없었다. 당신은 지금까지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로 열심히 싸웠다. 그러다 밀고 밀리는 접전 끝에 적의 창검에 찔러 쓰러졌다. 큰 부상을 당했지만 아직 죽을 정도는 아니다. 죽지 않았다면 이제 당신은 일어서야 한다. 그러나 군사로 일어서지 말고 용사로 일어서라! 군사로 쓰러진 당신을 보고 적은 비웃고 기뻐했다. 그랬던 당신이 일어설 때 적은 놀랄 것이다. 죽음을 거부하고 마지막 호흡을 내뿜으며 용사로 일어난 당신을 보았을 때 적들의 당황하고 움츠려들 모습이 보이지 않는가!
군사로 쓰러졌지만 다시 일어나 싸우면 용사가 된다. 쓰러져 마냥 눌러 앉아 있으면 부상병에 그치지만 일어나 다시 싸우면 영웅이 된다. 피를 흘리면서도 당신은 구급차에 오르지 않고 참호 속에 머물러야 한다.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로 부름 받았지만 이제는 종말의 시점에서 억센 적들과 마주치기 위해 용사다운 거친 싸움에 목숨을 걸어야 한다. 동서양의 역사 속에서 아직도 우리를 감동시키는 것은 영웅들의 끝나지 않은 무용담이다. 영웅은 죽어도 죽은 것이 아니며 쓰러져도 쓰러진 것이 아니다. 노병은 죽지 않고 사라질 뿐이듯 영웅답게 싸우다 사라지는 것이 영웅다운 삶이다. 후세에게 전해질 당신의 무용담은 생사를 초월한 실전에서 쌓여간다. 죽음을 거부하는 삶의 의지, 생사를 넘나드는 위기의 벼랑에서 끝까지 싸우려는 투지가 용사를 버티게 만든다.
텅 빈 자루 같은 인생도 말씀을 채우면 일어선다.
박지성 선수는 <멈추지 않는 도전>에서 이런 말을 남겼다. “누구나 넘어질 수 있다. 그러나 넘어진 모든 사람이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넘어졌지만 일어서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모두가 넘어져도 아무나 일어나지 못함은 우리 모두가 익히 아는 삶의 경험담이다. 넘어져야 할 상황에서 잘 넘어지지 않는 것은 기술의 문제다. 그래도 넘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넘어졌다 다시 일어서는 것은 기술을 넘어선다. 기적은 아니더라도 기술과 기적 사이에서 기적 쪽에 더 가깝다. 넘어지고 퍼진 상태에서 무언가 채워야 할 것으로 채우지 못하면 일어섬에 아무 의미가 없다. 똑바로 설 수 있는 빈 자루란 세상 어디에도 없다. 뭔가 채워져야 채워진 만큼 빈 자루도 몸을 일으킬 수 있다. 텅 빈 자루에 불과한 우리 일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워지기만 하면 우리는 능히 무너지는 세상도 떠받칠 수 있다. 프로메테우스의 형제인 아틀라스는 제우스가 내린 형벌로 손과 머리로 평생 하늘을 떠받쳐야 했지만 메신저는 사명감으로 세상의 기울기를 바로 잡는다.
불가능한 시도일수록 노력이 필요하고 노력하려는 의지가 살아날 때 불가능의 철가면은 벗겨진다. 재기의 스토리가 늘 감동을 주는 것은 추락과 비상의 색다른 과정들과 극적인 반전에 있다. 삶은 늘 진지해야 할 과정이다. 가장 진지한 삶이 가장 극적인 감동을 베푼다. 신화는 재미를 더하지만 실화는 감동을 준다. 신화는 재미있지만 실화만큼 감동적이지 않다. 이는 픽션과 팩트의 차이다. 드라마 같은 삶일지라도 삶은 팩트에 기반을 둔 엄연한 현실이지 결코 드라마가 아니다. 한 사람의 인생경험이 뭇사람들에게 깊은 감동을 전하는 것은 팩트에 근거하여 처절히 살아 생존을 이룬 역전과 대반전에 있다.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한 삶의 이야기가 그런 삶을 일군 영웅들의 서사시가 되어 대중의 마음을 움직인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예루살렘 양문 곁에 있던 베데스다에는 유명한 연못이 하나 있었다. 일종의 간헐천으로서 그곳에 얽힌 전설이 많은 사람들로 언제나 북적대게 만들었다.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그때 가장 먼저 들어간 자는 어떤 병이든지 낫는다는 내용이다. 38년 된 병자가 솔로몬 행각의 한편에 누워 있었다. 주님께서 그 병자를 보시고 낫기를 원하는지 물으셨다. 병자는 물이 동할 때에 자신을 못에 넣어주는 사람들도 없고 자기가 가기 전에 항상 다른 사람이 먼저 들어간 그간의 상황을 호소했다. 주님께서 그를 향해 말씀하셨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요 5:8) 병자는 연못에 들어가지 않고도 치유되었다. 사람들은 신화의 연못에 뛰어들었으나 38년 된 병자는 실화의 주인에게 안겼다. 단 한 번의 기회도 잡지 못했던 절망적인 병자에게 찾아오신 주님은 천사보다 나은 분이셨다. 그때부터 베데스다 연못에 관해서는 신화보다 더 감동적인 실화가 전해졌을 것이다.
당신이 신화를 좇으면 누운 자리에서 일어나기 힘들다. 엄밀히 말하자면 불가능하다. 그러나 실화 중의 실화인 진리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면 일어날 수 있다. 아담이 흙에서 잠을 깬 것은 얼마 후의 일이었던가? 영겁을 두고 그는 영원히 깰 수 없는 존재였다. 흙으로 완벽하게 조성되고 장부와 신경 세포가 빠짐없이 이어졌지만 생명의 기운인 숨이 없으면 단지 그럴싸한 모양의 흙덩이에 불과하다. 그런데 생명의 하나님께서 생기를 불어넣자 그는 살아 일어났다. 하나님의 숨이 에덴의 흙덩이를 아담으로 존재케 하셨다. 살리는 영이신 성령이 당신에게 임하면 당신은 죽은 영의 상태에서 일어난다. 첫 사람이 일어나야 에덴도 제 구실을 할 수 있었다. 살리는 영의 공급이 있었기에 누운 모습의 잘 조각된 흙덩이에 생명의 기운이 전해져 아담으로 일어설 수 있었다.
일어나 일하라 여호와께서 함께 계실지로다
미국 뉴욕 시에서 북쪽 35마일 지점에 위치한 수양관(Stony point Center))은 약 150년 전에 장로교 목사의 네 딸에 의해 건립되었으며 주로 에큐메니칼 운동을 위한 회의나 신앙 모임을 위한 장소로 잘 알려졌다. 수양관 입구에 커다란 액자가 하나 걸려 있는데 한문으로 흥기(興起)라는 글귀가 씌어있다. “일어나라!”는 뜻이다. 세계의 교회가 하나 되기 위해 일어나자는 뜻이며 하나 되어 세계를 품기 위해 일어나자는 뜻일 것이다. 현대 교회의 문제는 하나같이 일어나자는 구호와 달리 실제 몸을 일으키려 하지 않는다는 언행의 충돌에 있다. 일어날 힘조차 없음은 더 큰 문제다. 번영과 축복의 한 세월을 축복으로 간주하고 맘껏 누리느라 엎드려 기도로 비상의 능력을 축적치 못하고 나른함에 젖었기 때문이다. 기도가 배제된 인간의 모든 엎드림은 실존적 무기력 상태를 유지토록 해서 실질적인 일어남이 불가능하다.
일어남은 일을 위해서다. 일어나자마자 곧장 주저앉을 것이라면 애당초 일어날 이유가 없다. 쉬거나 기도하기 위해 앉았다면 전진과 사역을 위해 다시 일어나야 한다. 역대상 22장에는 성전 건축과 연관하여 다윗이 아들 솔로몬을 격려하는 말이 나온다. 다윗은 하나님을 많이 사랑했다. 그의 소원은 생전에 자기 손으로 성전을 지어 하나님께 봉헌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다윗의 마음만 받으시고 성전 건축의 사명을 그의 아들에게 돌리셨다. 이유는 다윗이 전쟁을 통해 피를 많이 흘렸기 때문에 평강의 사람인 솔로몬을 적임자로 간택하셨다. 다윗의 중심과 변치 않는 헌신을 아셨지만 하나님은 그의 선한 소원을 물리치셨다. 다윗은 실망할 수 있었지만 평강의 성에 봉헌될 성전 건축에 자신보다 더 적합한 솔로몬을 선정하신 하나님의 뜻을 수긍했다.
다윗은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곧 나이 어린 아들이 엄청난 역사를 잘 감당할 수 있도록 모든 물자와 일꾼들을 넉넉히 준비하여 확보시켰다. 그는 금 3,400톤(4톤 트럭 850대 분량), 은 34,000톤(8톤 트럭 4,250대 분량), 무수한 놋과 철과 나무와 돌을 자신의 생전에, 환난 중에, 그리고 죽기 전에 준비시켰다. 다윗은 이제 겨우 15살 난 아들에게 모든 준비를 끝내고 격문과 같은 당부의 말을 잊지 않았다. “너는 일어나 일하라.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실지로다.” 평생 일어나 하나님의 일에 열심이었던 다윗은 이제 누울 때가 가까웠다. 편히 앉아서 아버지를 바라보며 신앙과 삶을 배워가던 솔로몬은 다윗을 이어 하나님을 위해 일어난 자가 되어야 했다. 솔로몬은 하나님의 일을 위해 몸을 일으켜야 했고 분연히 일어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