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향한 열정에 불타는 엘리야
열왕기상 17장 이전까지 이스라엘에는 여호와의 능력을 보일만한 선지자가 없었다. 17장이 열리면서 수염이 덥수룩한 디셉 사람 엘리야가 이스라엘 역사의 전면에 혜성처럼 등장한다. 그가 활동했던 시기를 통해 엘리야는 어둠의 땅 이스라엘에서 유유히 빛을 발하는 항성처럼 존재했다. 잠깐 반짝였다가 아무 영향도 끼치지 못하고 떠돌이별처럼 사라진 유사 별들이 넘쳐나는 중에 엘리야의 존재는 주머니 속의 송곳처럼 뚜렷했다. 그의 질풍노도 같은 사역이 진행되는 동안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장중에 놓여 있었다. 불 말과 불 병거와 함께 회오리바람을 타고 승천했을 때 그는 마치 유성처럼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혜성같이 나타났다 항성처럼 존재하다 유성이 되어 사라진 사람, 그가 바로 능력의 예언자 엘리야였다.
길르앗의 산중 생활을 통해 잔뼈가 굵었던 엘리야는 거친 환경에서 강하신 하나님을 만났다. 그의 사역은 아주 드라마틱했고 놀랄만한 기적과 능력으로 충만했다. 신구약을 통틀어 능력의 예언자로 지칭되는 엘리야의 저력은 그의 지칠 줄 모르는 열성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우상의 세력이 득시글거리는 환경에서 엘리야는 단호했다. 오직 하나님 신앙만을 옹골차게 붙들었다. 잡다한 우상 세력들을 적대시하고 유일하신 하나님 한 분 만을 섬긴 그의 성실함이 열정의 불길 속에 잘 보존되었다. 그에겐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절대 열심이 있었다. 그야말로 열심당원(Zealots)의 효시라 불릴 만했다. 엘리야 스스로 하나님께 자신을 그렇게 연거푸 소개할 정도였다.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 열심이 유별하오니.”
기도의 불씨가 하늘의 불로 역사된 엘리야
그의 강한 기질과 뜨거운 열정은 용광로 속의 쇳덩이처럼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완전히 녹아들었다. 하나님이 준비하신 예언자의 틀 속에 쇳물이 부어지자 산골의 거한(巨漢) 엘리야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변화되었다. 하나님의 능력이 메말랐던 땅에 이 엘리야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나타났다. 그의 출현 이상으로 엘리야가 행한 사역은 극적이었다. 3년 6개월의 기갈 선포와 그릿 시냇가에서의 은거 생활이 그러했다. 갈멜 산에서 갈멜 산에 이르기까지의 불과 비의 사역이 그러했다. 기손 시냇가에서의 당당함과 로뎀 나무 아래서의 소심함이 극적인 대조를 보인다.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올려간 사람, 변화 산에 모세와 함께 나타나 주님의 별세에 대해 얘기를 나누었던 사람, 야고보 사도에 의해 기도의 능력자로 언급된 사람, 엘리야는 죽기를 다한 기도로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준 예언자 중의 예언자였다. 그는 실로 만고(萬古)에 빛나는 영적 거인이었다.
엘리야는 불을 토하는 하나님의 사자였다. 그의 능력은 곧 하나님의 다함없는 능력이었다. 그의 이름 “나의 하나님은 여호와이시다”란 뜻에 걸맞게 엘리야는 하나님으로 충만했다. 하나님의 불 곧 성령으로 충만했다. 엘리야가 엘리야일 수 있었고 세간에 능력의 사람으로 지칭되는 것은 그의 불같은 기도 때문이었다. 그가 심정에 품었던 기도의 불씨가 하늘의 불을 내리게 했다. 하나님이 그의 가슴에 심었던 작은 불씨가 바알 신앙으로 더럽혀진 이스라엘 전역을 태워버리게 만들었다. 그는 끝없이 타오르는 중보의 불길로 살며 일했다. 엘리야 앞에 위압적으로 도열한 바알 선지자 450인과 아세라 선지자 400인은 단지 엘리야의 기도의 불길을 더욱 거세게 만들 불쏘시개에 불과했다.
기도의 무릎으로 하늘 빗장을 연 엘리야
불같은 기도의 사람 엘리야가 입을 열었다. 3년 6개월 동안 메마른 이스라엘 땅에 비를 부르는 기도가 갈멜 산꼭대기에 메아리쳤다. 갈멜 산꼭대기에서 불을 내리게 했던 불의 사자가 하늘의 비를, 은혜의 단비를, 능력의 소낙비를 위해 다시 엎드렸다. 하나님이 닫으셨으니 하나님만이 열 수 있는데 기도를 통해서만 그와 같은 역사가 가능하기에 엘리야는 바짝 엎드렸다. “아합이 먹고 마시러 올라가니라. 엘리야가 갈멜 산꼭대기로 올라가서 땅에 꿇어 엎드려 그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고.”
그는 칼을 휘두르는 능력의 종이기에 앞서 하나님 앞에 깊이 무릎 꿇은 기도자였다. 그의 중보기도의 능력은 하늘의 굳게 잠긴 빗장을 열게 만들었다. 아름다운 땅 갈멜, 그 “과수원”(Carmel)에는 비가 필요했다. 그곳에서 무너진 단을 수축했던 엘리야는 기도로 불을 내리고 또 다시 기도로 비를 내리게 했다. 갈멜에서 갈멜까지 엘리야의 사역은 불과 비의 차이만큼 능력 안에서 종횡무진 했다. 그는 땅바닥에 엎드려 머리를 무릎 사이로 집어넣었다. 이는 기도 속에서 단련된 유연함이 아니면 취할 수 없는 동작이었다. 그의 기도자세는 오랜 기도생활 끝에 터득한 기도의 관절꺾기였다. 그의 몸은 높은 머리를 낮은 무릎 사이에 넣을 만큼 유연했다. 그는 언필칭 기도의 달인이었다. 간구의 마에스트로(maestro)였다.
기도로 맞은 새벽이슬이 응답의 소낙비로
성경의 역사는 엘리야의 기도 계보를 이어갔다. 기독교 역사를 통해서도 이 기도의 계보는 한동안 지속되는 듯했다. 불같은 기도의 사람들이 천지 사방에서 불을 내뿜는 기도를 쏟아냈다. 갈멜 산에 불을 내리게 했던 기도의 불길은 끊어질 듯 이어지고 사그라질 듯 다시 타오르면서 흑암 세상에서 구별된 땅 고센처럼 빛났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이 기도의 계보가 끊겨버린 느낌을 지울 길 없다. 아, 엘리야의 하나님은 어디 있는 것인가? 이른 비의 역사로 엘리야가 이스라엘 역사에서 중보기도의 능력을 발휘했다면 이제 늦은 비의 역사를 실현하기 위해 오늘 우리들 중 그 뉘라서 엘리야의 후예로 무릎 꿇을 것인가? 기도의 무릎을 꿇을 수만 있다면 영원히 앉은뱅이가 된다 할지언정 그럴만한 값어치가 있지 아니한가?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았다(Elijah was a man just like us). 그러나 그의 기도는 우리와 달랐다(His prayer was not just like ours). 그는 “간절히”(earnestly) 기도했다. 우리도 간절히 기도하지만 엘리야의 간절함에는 한참을 뒤진다.
머리를 무릎 사이에 파묻고 드린 간구가 손바닥만한 작은 구름에서 거대한 비구름을 보게 했다. 엘리야의 손만한 작은 구름은 36개월 메말랐던 땅을 적실 큰비의 전조였다. 아무도 몰랐지만 기도의 사람 엘리야는 그것이 보통 구름이 아니라 응답의 빗방울임을 깨달았다. 손만한 구름에서 거대한 빗줄기를 보는 것은 씨에서 열매를 볼 수 있는 하늘의 시선이다. 성령께서 밝히 비춰주시는 혜안이 없으면 열매를 보아도 열매인지 모른다. 우매자다. 씨에서 씨를 보고 열매에서 열매를 보는 자는 평범한 사람이다. 열매에서 미래의 씨를 보고 씨에서 탐스런 열매를 보는 자는 비범한 자다. 기도는 평범한 자의 안목을 비범하게 만든다. 제대로 파종한 자는 곧 이를 추수에 대비한다. 온전한 기도의 분량을 채운 자에게 나타나는 깨알 같은 징조는 태산 같은 응답의 신호탄이다. 기도로 새벽이슬을 머금으면 징조로 응답의 소나기를 경험한다.
간절함에 목숨 건 기도자
일곱 번까지 끈질기게 엎드린 그의 간절함이 마른하늘에서 큰 비의 소리를 듣게 했다. 엘리야가 간절함으로 보고 들었던 그대로 메마른 땅에 이내 단비가 쏟아졌다. 그 간절함이 하늘의 불까지 땅으로 끌어내리지 않았던가! 구름의 크기가 문제가 아니다. 그것이 누구의 구름이냐? 가 중요하다. 엘리야의 구름이 아니라면 그것이 집채만한 구름을 이루고 산만한 구름이 하늘을 빼곡히 채워도 빗방울 하나 내리지 않는다. 지극히 작은 크기의 구름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엘리야의 구름이라면 비를 부르는 구름이다. 엘리야의 구름은 그가 드린 간절한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화답이었다. 엘리야가 간절히 기도하지 않았다면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기적의 씨앗이었다. 응답의 위대한 역사는 간절함을 뒤쫓는다. 간절함이 하나님을 감동시키고 간절한 기도가 하늘의 보좌를 움직인다. 간절함이다. 당신의 성정은 과연 엘리야와 다를 바 없다. 당신의 기도 역시 엘리야의 것과 유사할까? 당신도 간절히 기도하지만 그 간절함이 엘리야의 간절함에 미치지 못한다. 그래서 당신의 사역은 그와 다를 수밖에 없다. 기도의 차이! 현격한 기도의 차이 때문이다. 사역의 차이는 오로지 기도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엘리야와 당신의 하나님은 다르지 않다. 하나님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으시다. 변한 것은 당신이다. 당신의 간절함이 절대적인 간절함에 미치지 못한다. 당신의 간절함은 하나님의 저울에 달려 이미 그 부족함이 드러났을는지 모른다. 이 시대의 벼랑 끝에서 기울어지는 끓는 가마를 보고 익은 과일이 나뭇가지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면서 기도하지 않음은 씻지 못할 죄악이다. 땅을 뒤덮은 황충 떼의 날개 부딪히는 소리를 듣고, 큰 바다를 삼킨 후에 육지까지 삼키려는 불을 보고, 다림줄을 잡고 계신 주님을 보고, 여름 실과 광주리를 보고, 단의 기둥머리가 부서지고 문지방이 움직이는 것을 보면서도 기도하지 않는다면 재앙이다. 심판의 칼날 위에 세워진 것 같은 위기 상황에서 당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란 바로 기도하는 일이다. 나직이 엎드려 높으신 하나님을 뵙는 일이다. 우리 중에서 간이 저릴 정도로 치열한 간절함에 목숨을 거는 기도자가 나와야 한다.
아직도 치열한 간절함에 미치지 못하는 당신과 나의 부족함이 통탄스러울 뿐이다. 이 시대의 패역상과 절망적인 현실이 능력의 기도자를 더욱 애타게 기다리는데 우리는 여전히 부족함으로 서성인다. 엘리야의 하나님은 우리 모두의 하나님이시다. 엘리야와 같은 특심으로 엎드려 간절히 부르짖으면 당신의 중보기도는 아래로 지옥의 터를 뒤흔들고 위로 보좌에까지 울리게 될 것이다. 천군 천사들이 들을 수 있는 비상벨로 울려 퍼질 것이다.
“오, 하나님! 우리의 무릎을 꿇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의 무릎이 낙타 무릎처럼 딱딱하고 돌같이 굳는다 해도 기도로 그리 될 수만 있다면 그리 되게 하옵소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