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럽다. 사이비를 성토하고 삯군을 비웃던 자가 탐욕과 명리에 눈이 멀어 사탄의 으름장에 겁을 먹고 유혹을 견디지 못하다 선을 넘었다. 어제의 다윗이 오늘에 골리앗이 되어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니 억장이 무너진다. 버젓이 교회 아랫목을 차지하고 지옥의 앞잡이 노릇을 하고 있으니 기가 막힐 뿐이다. 오랜 세월 다져온 거룩한 기업과 피로 써내려간 교회 역사를 내버리고 원수의 품에 안겼으니 가히 니골라가 탄식하고 가룟 유다가 울고 갈 고라의 직계가 틀림없다.

삼손처럼 장렬한 죽음을 맞지 못하고 구차한 목숨을 이어가며 사탄에게 빌붙어 사는 몰골이 차마 부끄럽구나. 무슨 낯으로 심판주 하나님을 뵈올 것인가? 무슨 낯으로 옛 성도들을 대할 것인가! 아아, 원통하고 분하다. 떠난 옛 세상을 다시 기웃거리는 천만 신자들이여, 살았는가? 죽었는가?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 2천년을 끈덕지게 이어온 복음정신이 허망하게 존망의 위기에 놓였으니 이를 어이 할 것인가? 원통하고 또 원통하다. 성도들이여! 오늘에 목 놓아 크게 우노라!

영혼을 갉아먹는 1적은 탐욕이다. 내려놓았음에도 또 내려놓고 다시 내려놓을 욕망의 찌끼들이 거미줄 같다. 십자가에 정과 욕심을 다 못 박은 줄 알았는데 시시때때로 고개를 내미는 탐욕의 면상이 정말 흉물스럽다. 바울은 그리스도라는 지고지선의 가치를 위해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겼는데 아직도 악취를 향기로 여기는 끈질긴 영적 후각에 몸서리친다. 스스로를 찢어발겨 탐심의 뿌리를 캐내지 않으면 파멸은 불을 보듯 뻔하다.

영혼을 갉아먹는 2적은 나태이다. 충성을 인정받아 맡은 직분이고 열심의 끝자락에서 늘 거두던 헌신인데 이젠 삶은 고사하고 그런 말 자체가 거북하고 부담스럽다. 열정이 식어버리니 의욕은 사라지고 남는 건 예전의 유물 같은 무용담이다. 이전의 충성담과 헌신담을 간증삼아 전하다보니 살이 붙고 기교가 생겨 실제보다 부풀려졌다. 실제의 능력은 사라졌는데 간증에도 유효기간이 있어야 하지 않나! 나태한 영혼이 보이는 추태이다.

영혼을 메마르게 하는 3적은 고집이다. 금강석보다 더 단단한 자의식이 꺾일 줄을 모른다. 자아에 지나치게 집착함으로 자신의 뜻이 돌처럼 굳어버린다. 고집이 자기중심적이 되면 아집으로 변형되어 가히 요지부동이다. 일마다 때마다 고집하는 어깨를 내어민다. 목이 굳은 경청 불가의 상태여서 타이르는 말도 야속하고 권면이나 충고 역시 쓸데없는 간섭으로 치부된다. 사지로 달려드는 불나방의 무모함이 본능 되어 파멸에 이른다.

영혼을 파리하게 만드는 4적은 분노. 모든 화는 지옥불에서 나온다. 화는 먼저 스스로를 태우고 주변에 있는 모든 것들을 삼키는 화마이다. 화를 일으키게 하는 원인을 남의 탓으로 돌리고 환경 때문이라 변명할 수는 있지만 결국 화의 주체는 자신이다. 다스림 받지 못하는 화는 제어되지 못한 마음에서 발화되고 억제되지 못한 생각으로 타오르며 통제되지 못한 말로 번져간다. 화를 다스리면 영혼이 편하고 죽이면 크게 이롭다.

영혼을 괴롭히는 5적은 불순종이다. 순히 따르면 살 길이 열리는데 굳이 거슬려 등을 돌린다. 모든 배신과 반역에는 불순종의 DNA가 박혀 있다. 동기가 불순하면 따르지 못한다. 따라도 따름이 아니다. 첫 인간도, 선민의 첫 왕 사울도 불순종으로 죄의 정상에 올랐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문신처럼 새겨졌던 불순종이 새로운 이스라엘이라 불리는 교회사에 드러남은 수치이다. 역사의 거울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니 참 부끄러울 뿐이다.

한명철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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