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롱은 상대를 무시해서 말이나 행동으로 비웃거나 깔보는 것이다. 면박을 가하는 경우도 있지만 본인이 없는 곳에서 더 활발하다. 아이들의 놀림에서부터 어른들의 농익은 모욕에 이르기까지 조롱의 인격 침탈이나 비인간화 작업도 드물다. 조준 사격에 확인 사살까지 일삼는 조롱의 저격수는 제거되어야 한다. 빈곤은 가난에 짓눌려 옴짝달싹하지 못할 지경을 일컫는다. 나라도 구하지 못할 가난을 환경이나 개인 탓으로 돌림은 해결책이 아니다.

 

교만은 오만, 자만, 거만, 설만 5형제 중 맏이다. 교만은 마음이 한껏 부풀린 상태로서 패망의 선봉(16:18)이며 하나님께 항상 물리침 당한다(4:6). 첫 사람들을 실족시킨 것도 교만이요 루시퍼를 나락으로 떨어지게 만든 것도 교만이었다. 눈을 부릅뜨고 살펴 교만이 똬리를 틀지 못하게 하는 것은 영혼의 우선 과업이다. 반항이 양지의 빛을 머금으면 개혁의 선봉이 되고 음지에 웅크리면 역도가 된다. 이유 있는 반항은 부끄러울 수가 없다.

 

완고함은 고집이 습관으로 다져지고 인격으로 굳어져 존재 자체로 경직된 상태이다. 자기 생각과 주장에 사로잡혀 다른 가능성을 일체 배제하는 독단성이다. 완고함(stubbornness)은 우직한 황소머리 같음’(bullheadedness)으로도 표현된다. 이사야 선지자는 완고한 자를 가리켜 네 목의 힘줄은 무쇠요 네 이마는 놋이라묘사하였다(48:4). 이스라엘백성의 완고함은 목이 곧고 뻣뻣함으로 표현되었는데 죄의 유혹을 피해야 완고함에서 벗어난다.

 

유혹은 나쁜 의도로 누군가를 끌고 가는 힘이다. 유혹의 주체도 악하지만 유혹당하는 본인 역시 결과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사탄의 본성 중에서도 으뜸가는 것이 유혹이어서 그는 유혹자(The Tempter)로 불린다. 성경은 유혹에 넘어진 자와 극복한 자들의 삶을 극명하게 대조시킨다. 인간을 죄로 이끄는 최초의 에이전트가 바로 유혹이다. 유혹에 끌려 미끼를 덥석 무는 순간 다양한 죄의 열매들이 맺히면서 영혼을 파국으로, 삶을 파멸로 이끈다.

 

고통(torment)은 심신이 괴로움의 가시에 찔려 고통(pain)이 극에 달한 상태이다. 이 절정의 통증을 완화시키는 어떤 처방약도 존재하지 않기에 전 존재가 아픔에 노출되고 방치된다. 욥기는 지극한 고통을 어떻게 겪어가는 지에 대한 생생한 기록이다. 한 주간의 지옥 같은 고통을 감내하면서 입을 뗀 욥의 탄식 평강도 없고 안온도 없고 안식도 없고 고난만 임하였구나!”는 그가 당한 지독한 고통의 정도를 독자에게 조금이라도 상상토록 만든다.

 

방탕은 정도를 버리고 곁길로 들어서 저지르는 망동이다. 마음이 들떠 걷잡을 수 없는 삶의 스타일이다. 주색잡기에 빠져듦이요 난봉을 피움이다. 신자로서 이런 삶을 살지 않겠지만 영적으로는 장담하기 어렵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버리고 애굽, 앗수르, 바벨론과 번갈아가며 애정행각을 벌인 것이나 주님의 비유 중에서 아버지를 떠나 외국에 가서 허랑방탕했던 탕자의 무절제함은 본질적으로 같다. 영적 방랑의 시간이 길어지면 방탕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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