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사늑약의 5적은 후세 사가에 의해 단죄되었다. 그들은 부끄러운 조상들로 후손들의 외면을 당했지만 그들이 남긴 매국의 후과는 실로 엄청났다. 일제 36년 아픈 질곡의 역사는 미래로 웅비할 조국의 날갯죽지를 꺾었다. 그 단초를 제공한 원흉들이니 세월이 흐른들 그 죄업을 어찌 다 씻을 것인가! 청룡의 해에 암약하는 갑진5적의 그림자가 어른거림을 모르는가! 나라도 그러하거니와 교회도 그렇다. 도적 패거리를 발본색원하자!
하나님 존재를 부정함에서 출발하는 자유신학은 표현 자체부터 부조리하다. 불신신학이라 칭함이 타당하다.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인간의 이성을 우상시하여 모든 진리의 객관화를 추구하고 계시에서 출발한 성경을 정면 반박하니 과히 교회의 주적이라 할만하다. 하나님을 부인하면서 하나님 이름을 들먹이는 이들의 주장은 괴이하기 짝이 없다. 스스로 버림받은 영혼으로 자처하는 그들을 위한 쉼터는 어디에도 없다. 죄가 심히 크다.
이단사설은 교회가 대적해야 할 난적이다. 교회가 진리의 터에 굳세지 못하면 이단의 숙주가 된다. 이단은 교회 안에 피어난 독버섯이다. 니골라가, 영지주의가, 아리우스가, 이단의 교주들이 이단의 계보를 이어왔지만 이단의 씨는 사탄이 에덴동산에 퍼뜨린 말씀 변형에 기원을 두고 있다. 예언자들 중에도 순전한 말씀에 이질적인 것을 섞어 전해 거짓 예언자로 낙인찍혔지만 오늘의 강단에 이단적 메시지가 난무함을 극도로 경계한다.
박해 속에서 교회는 순수했고 순교의 피를 자양분삼아 교회는 생명력을 키웠다. 카타콤에서 벗어난 교회가 제국의 영광이 되면서 교회는 승전가를 불렀지만 역설적으로 그것은 교회의 황혼을 알리는 조종이 되었다. 교회는 힘을 지녔고 이 힘을 지키려고 권력에 야합하자 교권주의가 싹텄으며 소위 교권주의는 곧장 교회를 가장 이질적인 존재로 탈바꿈시키는데 악영향을 미쳤다. 교파주의와 함께 교권주의는 가장 악랄한 내부의 적이다.
패당이란 원래 군대에서 가장 작은 단위의 부대를 일컫던 말이다. 같이 어울린 무리들에 대한 중성적 표현이 언제부턴가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 패거리는 편 가르기의 전형이다. 내 편, 네 편이 분명하고 경쟁자(rival)보다는 적(enemy)으로 간주해서 매사에 적대적이다. 정치계에는 붕당 수준의 패거리가 단연 돋보이고 교회안팎에도 패당 논리가 괴력을 발휘한다. 일치와 연합을 지향하는 교회에 패당주의는 뿌리 뽑을 주적이다.
이기주의는 지상의 모든 교회가 원점 타격을 실시해야 할 공적이다. 이타주의의 살신성인을 넘어서는 것이 성경의 사랑인데 이기주의는 늘 사랑 반대편에 있다. 교회가 두 얼굴로 매도되는 이유는 입술의 이타적 사랑과 실제의 이기적 행적 때문이다. 행함 없는 믿음의 귀신 닮은 신앙이 낯설지 않음은 자기중심의 안하무인격 이기주의에 익숙하단 반증이다. 바른 신앙은 이기주의를 극복하는 이타성의 회복에 있다. 나를 넘어 우리로 들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