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은 흰 돌과 검은 돌을 가려 나는 살고 상대를 죽여 집의 우세로 승패를 가린다. 가로 세로 45cm를 넘지 않는 바둑판에 17, 289개의 착점을 두고 자웅을 겨룬다. 전도사 시절 교회에서 잠시 만났던 서능욱 9단에게 하루에 몇 시간 바둑을 두느냐?” 물었고 최소 3시간은 됩니다.”란 답변을 들었다. 말씀을 전하는 자로서 흰 돌, 검은 돌이 아니라 천국과 지옥을 사이에 두고 하나님 말씀을 하루에 세 시간도 읽고 연구하지 못함을 회개했다.

말씀에 몰입하는 만큼 기도에 집중해야 함은 두 말할 나위도 없다. 기도와 말씀, 말씀과 기도는 타원의 두 중심점처럼 불가분리요 삶과 사역의 핵심이다. 솔직히 말이 좋아 기도생활이지 우리의 기도는 너무 형식화되고 천편일률적이 되었다. 모양새는 완벽한데 품격 같은 영격(靈格)이 없다. 영의 기도는 제자리걸음이고 마음의 기도는 기술력만 돋보인다. 마치 얼굴에서 얼이 빠져나간 굴과 같다. 알맹이가 사라지면 껍데기는 아무 짝에도 쓸모없다.

원수의 기세는 막강하고 적의 군세는 하늘을 찌를 듯하니 스스로의 형세를 살펴 채비하지 않으면 매전필패는 목전의 일이다. 이제 노고의 땀을 흘리지 않으면 이내 피 흘려 상할 것을 어찌 모르랴! 연골이 닳아 없어져도 무릎 꿇을 일이고 입술이 터지도록 부르짖을 일이다. 언제까지 말씀 타박이고 기도 타령이냐고 핀잔해도 사실을 사실 아닌 것처럼 꾸밀 수는 없는 노릇이다. 청룡의 용트림을 상상하면서 한가한 푸념을 늘어놓을 때가 아니다.

 

무릎 연골이 닳도록

입술이 터지도록

부르짖을 때

 

그대(내 속에 있는 나)의 밥상에서는 떡 부스러기가 쌓여 가는데 그것을 주워 먹을 이들이 나타나지 않음은 어인 일인가! 입술의 사랑타령은 여전한데 마른 손이 여태껏 펴지지 않음은 어인 일인가? 부르짖는 기도 소리가 쩌렁쩌렁한데 기도하는 집이 군데군데 갈라져 틈이 벌어짐은 어인 일인가? 외치는 말씀에 가격당하는 이가 없고 소리 나는 구리만 번쩍이니 어인 일인가?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곡을 하여도 가슴 치지 않음은 어인 일인가?

그대에게는 어린양이 계시다. 죽임 당하신 어린양이 아니라 이기신 어린양이 계시다. 그분은 유다 지파의 사자이시다. (Lamb)과 사자(Lion)의 정체성으로 자신을 보이신 주님은 그의 신부들이 양의 탈을 튼 이리를 대적하는 양, 울부짖는 사자로 변장한 사탄을 대적하는 사자가 되기를 그토록 원하신다. 어린양의 순결한 신부가 되지 못하면 사탄의 정부로 전락해버린다. 깨어 말씀에 굳게 서고 기도로 불 밝히지 않으면 신부로는 부적격이다.

번지르르한 말들에 휘감겨 더욱 비쩍 말라버린 말씀의 황송한 모습에 통자하!(통회 자복하노라!) 열리지 않는 마음으로 닫힌 지갑에 눈물짓는 그대의 긍휼을 바라보며 통자하! 이단의 주구가 되어 지옥행 군무를 추고 있는 옛 친구에게 침묵으로 일관하는 그대의 거짓 사랑을 보며 통자하! 그대 식의 끼리끼리는 통 큰 연대에 한참 미치지 못하는 씨족사회 수준이니 이 또한 작지 않은 허물이라 통자하! 이에 큰 소리로 울며 곡하지 않을 수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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