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사역자에게 고하는 말씀 (39)

한명철 목사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은혜와 평강교회를 담임하며 30권의 저술과 글쓰기를 통해 복음 사역에 애쓰는 목회자다.
한명철 목사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은혜와 평강교회를 담임하며 30권의 저술과 글쓰기를 통해 복음 사역에 애쓰는 목회자다.

흑암의 심장 같은 현장에 임한 말씀

일어서기 위해 엎드려야 하듯 메신저는 엎드리기 위하여 들로 나가야 한다. 때로는 일상의 익숙함이 메신저의 엎드림을 방해한다. 그 자리에 있으면 꼭 돌봐야 할 일이 있고 챙겨야 할 업무나 해결해야 할 과제가 끊임없이 달려든다. 소중한 것을 잃고서야 번쩍 정신이 들어 엎드릴 장소를 물색하는 우리이지만 늦게라도 엎드림이 엎드릴 줄 모르고 일상의 평온에 거함보다야 훨씬 낫다. 에스겔은 거친 들로 나아갔다. 익숙한 삶의 둥지를 떠나 익숙하지 않은 삶의 저편으로 건너갔다. 세상에 등을 돌리고 고적한 광야로 들어섰다. 제사장으로서 성전에 기거하기를 포기하고 빈들로 뛰쳐나갔다. 예루살렘 멸망의 예표로 아내를 잃고 더 깊은 광야로 나아갔다. 광야의 거친 환경 속에서 에스겔은 강하신 하나님을 만났다. 강한 하나님의 말씀이 권능으로 임했다. “여호와여, 강하게 하소서!”라는 이름 뜻 그대로 그는 말씀 안에서 자신을 강하게 만들었다.

에스겔이 찾은 골짜기 또는 빈들은 마른 뼈들이 모여 있는 곳이다. 장차 일어나 큰 군대를 이루겠지만 아직은 뼈다귀들이 골짜기마다 산재한 곳이다. 절망으로 가득하기에 소망의 메시지가 전해져야 하고, 어둡기에 빛의 말씀이 전해져야 하고, 죽음의 흔적만 남아있기에 생명의 메시지가 전해져야 할 긴박한 말씀 선포의 현장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현장에 임한다. 인간들의 기지와 술수가 난무하는 세상의 한복판이 아니다. 그보다 더 절망적이고 더 음울하며 더 파괴적인 환경이다. 하나님을 배제시킨 세상 한복판은 사실 영적으로 인간들이 깊은 못(深淵)의 나락으로 떨어지기 직전인 ‘땅 끝’이란 현장이다. 이런 흑암의 심장 같은 현장에서 말씀이 빛을 발한다. 인간들의 관심 밖인 땅 끝에서 말씀의 아지랑이가 피어오른다. 단 한 번도 환영받지 못하고 매번 세상의 중앙에서 패대기쳐진 말씀은 변방으로부터 생명의 첫 걸음을 내딛는다.

절망의 현실로 나갈 때 임하는 말씀

에스겔은 세상 사람들이 땅의 중앙으로 모여들고자 애쓰고 있을 때 외롭게 땅 끝을 향해 몸을 돌려세웠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그를 그곳으로 내몰았기 때문이다. 인간 본성은 땅 끝의 현장을 싫어하지만 당신은 이 빈들로 나아가야 한다. 인적이 끊긴 곳에 하나님의 흔적이 오히려 강하기에 하나님의 사람들은 때때로 이런 상황으로 내몰렸다. 인간이 살 수도 없고 스쳐가기에도 부담스러운 그곳, ‘땅 끝의 끝’(地末之末)까지 이르러야 한다. 가고자 하는 의지만 확고하다면 갈 수 있다. 당신이 가지 못해 주저앉으면 하나님의 신이 어떡하든 당신을 이끄신다. 세상천지에서 천애고아보다 더 지독한 고독으로 신음하며 순수한 홀로가 되었을 때 영원한 단독자이신 하나님과의 독대가 이루어진다. “일어나 들로 나아가라. 내가 거기서 너와 말하리라.” 뒤집어 말하자면 빈들로 나아가지 않고는 결코 하나님과의 실제적인 만남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굳이 빈들을 찾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하나님과 대면하여 이루어진 대화는 메시지 중에서도 가장 영광스럽고 존귀한 메시지다. 그런 메시지를 받기 위해 아무도 없는 무인지경인 들로 나아가야 한다면 당신이나 내가 망설일 이유가 전연 없다. 자신의 목숨을 버려 그런 메시지 한 편 받을 수 있다면 목숨인들 아깝겠는가! 그것이 하늘의 메시지를 앙망하는 메신저의 자세다. 에스겔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방도를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일어서서 빈들로 나아가는 것이다. 엎드린 자리에서 일어서고 절망의 현실을 직면하는 것이다. 기도로 엎드린 자리에서 일어서고 안전지대를 벗어나 위험지대로 나아가는 것이다. 에스겔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응하여 일어섰다. 해골들이 나뒹구는 빈들로 발길을 옮겼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에게 권능으로 임해왔다. 에스겔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말씀은 그의 가슴에 고이 간직되었던 기도의 불씨에 붙었고 이내 그의 심장을 태웠다. 하나님의 대언자 에스겔은 불타는 심정이 되어 자기 백성들에게로 달려갔다. 거룩한 정염으로 활활 타오르는 불길을 토해냈다. 그의 존재와 인격 자체가 하나의 이글거리는 불덩어리였다.

엎드려 기도한 후 빈들로 나아가라

이 시대도 말씀을 받는 원리가 동일하다. 엎드려야 한다. 엎드려서 하나님의 말씀을 기다려야 한다. “일어서라!”는 명령이 있기 전까지 기도의 무릎을 강하게 해야 한다. 하늘의 명령이 임하면 기도의 무릎을 받쳐주던 땅바닥에서 결연히 몸을 떨쳐 일으켜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 그곳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그곳이 지옥의 광장이라 할지언정 마다하지 않아야 한다. 에스겔이 도착한 빈들은 사람들이 흔히 경험하는 그런 류의 빈들이 아니었다. 세상의 모든 주검과 슬픔과 절망과 고통이 총망라된 그런 곳이었다. 비록 환상이긴 했지만 에스겔이 목도해야 했던 빈들의 첫 광경은 바로 지옥 그 자체였다. 에스겔 자신만의 뜻이었다면 거기까지 이르지 못했을지 모른다. 하나님의 신이 그를 거기까지 이끈 것은 더할 나위없는 천상의 최고 은총이었다.

오늘 하나님의 성령이 나와 당신을 그보다 더한 곳으로 이끈다 할지라도 우리는 아멘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영성이 에스겔보다 깊거나 우리에게 특별한 장점이 있어서도 아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세상 형편이 에스겔 당시보다 더 참혹하고 종말적이기에 그렇다. 우리의 능력과 믿음이 연약해서 그런 것이지 할 수만 있다면 에스겔이 가닿은 빈들보다 더 깊고 험한 빈들로까지 나아가려 할 것이다. 그런데 그때의 성령이 에스겔처럼 우리를 이끌지 않으심이 현실이다. 결국 우리 자신의 신앙의지로 빈들을 향한 노정에 들어서야 한다. 에스겔처럼 빈들다운 빈들로 나아가야 한다. 버려진 땅, 외면당한 영혼들이 고개 숙인 침울의 장소에 서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권능으로 임하기까지 줄기차게 중보의 불씨를 보존해야 한다. 불씨가 모여 불꽃을 일으키고 그 불꽃이 거대한 불길로 온 세상에 번져가기를 소원하며 거룩한 열정을 불태워야 한다.

광야에 내동댕이쳐진 사람에게 임한 말씀

오늘날 말씀의 영광을 추구하는 자들은 들로 나가야 한다. 자기 영광의 나라에서 벗어나와 하늘 영광의 문으로 들어가는 성막 동쪽에 서야 한다. 들에는 성막이 포진되어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접했다. 광야(미드바르)는 말씀(다바르)을 받는 곳이다. 오늘의 빈들은 우리 자신을 비우는 삶이다. 모든 것을 주님의 주권 아래 내려놓고 주님의 말씀을 고요히 경청하는 삶의 자리다. 우리의 광야 행(行)은 세속적인 영광을 거절하고 메뚜기와 석청처럼 간소한 삶을 추구하는 수도사 됨에 있다. 은거자가 아니라 도시의 수도사, 시장 바닥의 수도사 됨에 있다. 이는 공명과 이득을 포기하는 것이다. 자기애의 겉옷과 자기의의 속옷을 벗은 채 이사야처럼 벌거벗은 몸으로 행하는 것이다. 광야의 척박한 삶을 사는 말씀의 사람은 예표가 되는 삶을 거부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명령에 순응하여 좌우편으로 누워 불편한 잠을 자기도 한다. 떡을 쇠똥 불에 구워먹기도 한다. 무거운 행구를 목에 걸고 힘든 걸음을 내딛기도 한다.

이렇게 빈들에서 훈련을 통과한 자만이 가야 할 곳으로 가서 해야 할 말을 할 수 있다. 성경에는 호젓한 광야를 비장한 마음으로 달려간 사람들이 있다. 성경만이 아니라 역사적으로도 빈들 중의 빈들로 나아가고자 숱한 이들이 수도사란 이름으로 험산이나 사막을 찾았고 동굴 속과 기둥 꼭대기에 자리를 틀고서 말씀이신 하나님과의 대면을 일평생 추구하곤 했다. 어떤가? 당신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기 위해 빈들로 나가야 하지 않겠는가? 에스겔은 들로 나갔고 하나님의 말씀이 임해왔다. 하나님은 무릎 꿇은 에스겔을 일으켜 세워서는 거룩한 땅으로 보내지 않으셨다. 오히려 평온한 땅을 지나 빈들에 거하게 하셨다. 그곳은 삶의 터전이 아니었다. 생소하고 익숙지 않은 거친 광야였다. 제사장의 거할 곳은 성전이었으나 하나님이 그를 빈들에 머물게 하셨다.

거룩한 성 예루살렘이 멸망당할 것에 대한 예표로 에스겔은 사랑하는 아내를 잃어야 했다. 눈가에 맺힌 눈물이 마르기도 전에 에스겔은 광야 속으로 파고들었다. 먼지와 뜨거운 태양과 목마름, 전갈과 뱀들이 득시글거리는 골짜기에서 그는 또 하나의 마른 뼈가 되어 있었다. 육신적으로는 살았어도 에스겔이 처한 새로운 환경은 마른 뼈와 진배없었다. 생명의 하나님이 그를 찾지 않았다면 에스겔은 산 자보다 나을 것이 전연 없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능력으로 임해왔다. “여호와여, 강하게 하소서!”라는 이름 뜻처럼 하나님이 그를 강하게 붙들어주시지 않았다면 얼마 버티지 못하고 무너졌을 것이다. 하나님의 권능이 그로 하여금 극도의 슬픔도 이기고 무서운 외로움도 극복하면서 말씀 안에서 스스로 강하게 만들었다. 예루살렘 성에 수많은 제사장들이 있었지만 권능의 말씀은 에스겔에게만 임했다. 성전 예배에 안주하면서 백성들과의 평온한 삶에 길들여졌던 제사장들은 하나님의 권능을 맛보지 못했다. 거친 광야에 내동댕이쳐진 것 같은 슬픔의 사람 에스겔에게 권능의 말씀이 위로가 되어 그를 덮개처럼 포근히 감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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