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사역자에게 고하는 말씀 (42)

한명철 목사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은혜와 평강교회를 담임하며 30권의 저술과 글쓰기를 통해 복음 사역에 애쓰는 목회자다.
한명철 목사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은혜와 평강교회를 담임하며 30권의 저술과 글쓰기를 통해 복음 사역에 애쓰는 목회자다.

 

바로의 지팡이 대신 목자의 지팡이를 잡은 모세

레위 지파의 아므람과 요게벳 사이에서 태어난 모세는 아론의 아우요 미리암의 동생이었다. 히브리 민족의 인구 팽창에 위협을 느낀 애굽이 대대적인 종족 말살 정책을 최우선 정책으로 펼치자 그 여파로 모세는 단 석 달 동안 친부모 품에서 양육되다 갈대상자 속에 넣어져 나일강에 버려졌다. 바로의 딸 공주에게 발견되어 느보산 근처에서 죽기까지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의 삶을 강권적으로 이끄셨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구원자였지만 하나님을 만나보기 전까지는 자신조차 구원할 수 없는 무능자에 불과했다. 그는 왕궁에서 바로가 늘 손에 쥐고 있던 권력의 상징인 지팡이(iron scepter)를 보며 지냈다. 언젠가는 대제국 애굽을 통치할 꿈을 키우면서 학문과 실력을 비축해갔다. 총명했던 모세는 오래지않아 애굽의 모든 학술을 배워 말과 행사가 능한 자 곧 문무를 겸비한 왕자가 되었다.

나이 40이 되었을 때 그의 꿈은 충분히 무르익었고 바로의 궁중에서 그의 위치도 막강해졌다. 역사가 요세푸스의 <유대 고대사>(Jewish Antiquities)에 따르면 모세는 에티오피아를 비롯한 당시 중근동 지역에서의 패권 다툼에서 변방 소국들을 점령하고 애굽의 영토를 확장시킨 전쟁 영웅이었다. 바로의 총애와 대중의 추앙을 받던 그는 애굽의 후계자로 낙점되어 있었다. 모세에게 통차자로서의 꿈과 야망이 없었을 리 만무다. 모세의 보장된 미래는 전혀 엉뚱한 곳에서 붕괴되기 시작했다. 압제 당하던 동족을 위해 주먹다짐을 하다 살인하고 꿈의 요람이었던 왕궁을 떠나 인적 끊긴 광야로 도주했다. 언제쯤 모세가 자신의 민족적 정체성에 눈을 뜨게 되었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그는 자신이 히브리 민족 출신임을 잊지 않고 있었다.

어느 날 동족의 억울함을 풀어주고자 내친 김에 완력의 지팡이를 휘둘렀다. 결국 자신의 힘으로 능히 민족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자만심이 그를 지명 수배를 받는 살인자로 전락시키고 말았다. 일약 대권을 손에 쥘 구국 영웅에서 도망자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가 피할 곳은 사람들이 찾아오지 않는 광야뿐이었다. 모세는 살기 위해 인간의 거처를 뒤로 하고 불뱀과 전갈의 땅인 광야로 숨어들었다. 애굽 궁정에서 꿈같은 영화의 40년을 보내며 애굽의 모든 학문과 지혜를 익혔던 모세는 광야에서 그것들을 버리기까지 장구한 40년의 세월을 보내야 했다. 민족의 구원에 있어 인간적인 모든 시도는 무익했다. 인생의 가장 중요한 황금기를 비전이나 사역과 전혀 상관없는 오지 중의 오지, 땅 끝인 메마른 사막에서 장인 이드로의 양떼를 쳤다.

철저하게 세상적일 수밖에 없던 환경에서 성장한 모세는 하나님이 정하신 때가 이르자 살인사건에 휘말려 도망자 신세가 되었다. 바로의 궁정에서 정치적 기반이 매우 탄탄했던 모세는 하루아침에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몸을 숨겨야 하는 처지에 놓였던 것이다. 그는 찬란한 애굽 궁정 생활을 마감한 채 메마르고 거친 땅에 머물면서 바로의 지팡이 대신 목자용 지팡이로 양떼들을 돌보며 목양의 원리와 함께 광야의 영성에 길들여지기 시작했다. 그 시간이 자그마치 40년에 이르렀다. 이 기간 동안 모세가 광야에 남긴 발자국은 무기력과 공허함뿐이었지만 전능의 하나님이 그림자처럼 모세를 따랐다.

무력한 지팡이에 임재하신 하나님의 능력

구원자 하나님을 만나고서야 모세는 비로소 권토중래(捲土重來)의 꿈, 정치적인 재기의 모든 꿈을 사막의 모래 속에 깊이 묻었다. 80 노인이 되어 자기 한 몸조차 주체할 수 없을 나이가 되어서야 권력의 지팡이를 내려놓았다. 완력의 지팡이도 내던졌다. 광야는 하나님이 모세를 다루신 특별한 장소였다. 세상을 버린 모세 곁에는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세상에게 버림당했다고 여겼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광야의 삶에는 영광스러운 과거도 없었고 신비로운 미래도 없었다. 척박한 환경에서 말 못하는 짐승 떼들을 보살피며 이름 없는 목동으로 살아가야 하는 무미건조한 일상만이 그의 삶을 맴돌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하나님이 모세의 걸음을 사막의 이곳저곳으로 이끄셨다. 하나님은 모세의 힘을 다 쏟아놓게 했다. 야망을 버리고 갱신의 야산을 오르내리게 했다. 자신을 잊어 자신을 깨우게 만들었다.

애굽의 술사들이나 박사들이 아니라 광야의 기후와 들짐승들 사이에서 삶의 이치를 배우게 하셨다. 권력자들은 사라졌으나 자연이 그의 곁을 지켰다. 광야가 학문과 재주를 익힐 장소는 아니었지만 노동과 묵상의 유익을 익혀가기에는 더없이 좋은 장소였다. 세상적인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미디안 광야에서의 40년은 무의미한 낭비였다. 그러나 영적인 안목에서 음미할 때 그의 이 시기는 거룩한 허비요 비상을 이루기 위해 날개를 퍼덕인 중요한 시간이었다. 바로의 후계자라는 정치적 양자에서 이드로의 후계자라는 종교적 양자의 과정을 거쳐 모세는 일약 하나님의 대언자라는 신앙적 양자로 변모되었다. 광야의 훈련은 영원하지 않았다. 하나님은 학습을 마치시고 모세는 광야의 모든 과정을 수료했다.

하나님이 광야 한 가운데 우뚝 솟은 호렙 산으로 모세를 부르셨다. 산꼭대기의 가시덤불 불꽃 가운데서 하나님이 모세에게 나타나셨다. 빈들 꼭대기에 선 모세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해왔다. 힘의 상징인 지팡이를 내려놓고 육신적인 힘도 포기한 모세, 목자로서의 무력한 지팡이만을 쥐고 있던 그에게 하나님의 능력이 스며들었다. 아무 것도 없는 공허의 땅 광야에서 모세는 철저한 하나님 임재를 경험했다. 임재의 은혜가 능력이 되어 때때로 하나님의 기적을 세상에 보여주었다. 바로와의 궁중 대결에서는 나일 강이 피로 변하고 개구리 떼, 이 떼, 파리 떼, 메뚜기 떼가 하늘 끝과 땅의 사방에서 몰려들고 심한 악질과 독종과 병마가 전국을 휩쓸며 불 섞인 큰 우박과 흑암과 장자 몰살로 인한 통곡이 애굽 전국을 덮쳐왔을 때 그는 약속의 성취자로 히브리 민족의 선두에 섰다.

말씀이 임한 모세와 대변자 아론의 협력

홍해의 거친 물결을 육지처럼 건너고 기도함으로 하늘 양식 만나와 메추라기로 그 백성을 배불리 먹이며 반석에서 물이 샘솟게 하는 등 10가지 큰 기적으로 그들을 이끌어냈지만 히브리 민족은 열 번이나 하나님을 시험하고 대적했다. 갖은 우여곡절 끝에 하나님 임재의 사람 모세는 히브리 민족을 약속의 땅인 가나안 땅 면전까지 이끌었다. 모세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능하고 무력한 상태에서 오히려 말씀의 전령자로 부름 받았다. 모세가 투항의 백기를 든 그 자리에서 하나님은 승리의 깃발을 준비하셨다. 모세가 모든 것을 포기한 그 자리에서 하나님은 전혀 새로운 시도를 하셨다. 하나님은 인생의 패배자를 호렙 산의 불타는 가시덤불로 이끌어 연기가 피어오르지 않는 불길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하셨다. 말씀의 종으로 세우신 것이다.

아론이 그의 대변자가 되었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모세에게 임했다. 광야 생활 40년을 보내면서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을 수없이 받았다. 말씀의 임함이 가장 극적으로 경험된 곳이 바로 시내 산이다. 십계명은 그가 받은 말씀의 요약이라 할 수 있다. 이 사건은 광야가 곧 말씀의 장소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때로는 범접할 수 없는 영광 속에서 모세에게 말씀하시기도 했고 때로는 친구와 얘기를 나누듯이 대면하여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모세와의 독대를 즐기셨다. 하나님은 마치 사환처럼 충성한 종 모세에게 자신의 거룩한 이름을 알려주시고 모세의 소원을 받아들여 자신의 뒷모습을 보여주기도 하셨다. 그만큼 말씀의 주 받음에 있어 하나님과 모세의 관계는 파격적이었다.

하나님은 천사의 손을 빌어 모세에게 율법을 주어 이스라엘에게 전수케 하셨다. 모세는 말에 능하지 못하였으나 아론은 하나님이 인정하실 정도로 언변이 탁월했다. 그들이 오늘의 상황에 놓였다면 분명 모세는 모세대로, 아론은 아론대로 특유의 말씀 사역을 펼쳤을 것이다. 당시의 하나님은 말씀 사역을 이원화하여 두 종을 적절히 사용하셨으며 하나님과 모세, 아론과 백성은 그렇게 말씀으로 긴밀히 연결되었다. 오늘 우리의 어려움은 모세 같은 우선적 말씀 수령의 종이 없고 아론처럼 모세의 대변인으로 만족하려는 그림자 역할의 종도 없다는 점이다. 우리는 모세보다 혈기는 승하나 능력에 있어 박하다. 우리는 아론의 공교한 입술에 한참 미치지 못하고 혀마저 양날 가진 검처럼 갈라졌다. 한 사람보다 두 사람이 나음을 알지만 둘의 협력 사역이 성공한 사례는 경험상 극히 드물다. 이런 암울한 시대에서 한 사람의 인격 속에 모세와 아론의 기능이 일체화되지 않으면 메신저로서의 정체성을 갖기 힘들다는 사실이 우리를 힘들게 만든다. 그렇다한들 달리 방도가 없기에 이런 메신저 되기에 힘을 다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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