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사역자에게 고하는 말씀 (43)

한명철 목사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은혜와 평강교회를 담임하며 30권의 저술과 글쓰기를 통해 복음 사역에 애쓰는 목회자다.
한명철 목사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은혜와 평강교회를 담임하며 30권의 저술과 글쓰기를 통해 복음 사역에 애쓰는 목회자다.

이스라엘의 죄 짐을 진 아모스

“나는 선지자가 아니며 선지자의 아들도 아니라” 고백하던 아모스에게 엄중한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다. 아모스는 드고아의 목자였다. 그것도 자신의 양 무리를 소유한 목자(노케르)가 아니라 남의 양떼를 돌봐주는 목동(보케르)에 불과했다. 혹자는 그를 비천한 출신의 가난한 농부가 아니라 출신 성분이 높은 야인으로 해석한다. 그가 보케르가 아니라 노케르였다면 목축과 과일 재배를 겸업한 부유층일 수도 있다. 둘 중의 어느 해석을 취하건 그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고 그 부름에 응해 자신의 주업인 농업과 목축업을 버리고 하나님의 메신저로 나섰다는 점이 중요하다.

어쨌든 그는 뽕나무를 재배하던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아모스는 어떤 형태의 예언자 수업도 받지 않았다. 그는 목양의 들판에서 자기 일에만 묵묵히 임하고 있었다. 그런 그를 하나님이 손수 찾아주셨다. 그에게 예언의 말씀이 임했다. 그의 심령을 진동시키고 가슴을 열기로 들끓게 하며 입술과 혀를 주장한 능력의 말씀이 넣어졌다. 예언자 아닌 예언자로서 그의 메시지에는 가장 예언자다운 목소리가 실려 있었다. “짐을 지고 나르는 사람”답게 그는 이스라엘의 죄 짐을 지고 하나님 앞으로 날랐다. 그는 기도로 그 노역을 감당했다. 말씀과 기도를 양 날개 삼아 아모스는 완고한 백성들의 광야를 쉼 없이 운행하였다. 남북의 지리적 경계를 허물며 종횡무진 예언의 메시지를 흩뿌렸다.

예리하고 날카로운 공의의 메스(mes)인 말씀

남조 유다 출신으로서 북조 이스라엘에 가서 예언 활동을 하기란 매우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곳까지 하나님이 부리시는 짐꾼으로 말씀의 짐을 묵묵히 날랐다. 형제국이면서 적국인 그곳에서 아모스는 하나님의 공의를 담대하게 외쳤다. 외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만큼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공의의 메시지에 녹아들어 있었다. 그는 선지자의 아들도 아니요 선지자도 아니었지만 하나님의 아들, 선지자 중의 선지자로서 이스라엘 역사에 길이 그 이름을 남겼다. 그에게는 살아 있는 하나님에게서 받은 시퍼런 말씀이 살아있었다. 그가 외친 메시지는 왕궁이나 성전에도 예외가 없었고 왕과 귀족도, 제사장과 선지자 그룹, 백성의 장로들과 두령들도 그가 휘두른 말씀의 칼날에 사정없이 베임 당했고 재앙의 그림자가 그들 삶의 현장에 연기처럼 스며들었다.

아모스서는 죄의 지적과 도피할 수 없는 심판의 선고로 말씀을 열고 있다. 그의 메시지는 하나님에게서 받은 말씀의 무게를 느끼게 할 내용으로 가득하다. 아모스는 하나님의 공의를 칼날같이 세웠다. 그 어떤 선지자의 검보다 더욱 예리하고 날카롭게 번득였다. 굽힐 수 없는 정의와 담즙 같은 말씀의 알약은 그의 메시지에 신성한 권위를 부여했다. 아모스는 자신이 받은 묵시의 말씀을 전하면서 맨 먼저 사자의 울부짖음을 연상시키는 ‘하나님의 포효’를 전했다. 참고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외면한 이스라엘은 움키는 사자의 밥이 될 수밖에 없었다. 찢겨진 하나님의 사랑은 이미 덧난 상태여서 긍휼의 약을 바르기 전에 공의의 메스(mes)로 농 난 부위를 도려내야 했다. 위로와 긍휼의 메시지는 들리지 않았다. 완악한 죄의 백성은 영벌의 재앙에 이르기 전에 부패의 온상을 뒤집어야 했다. 지도자들이 이 일에 앞장서야 했다. 치유는 그 다음의 일이었다.

 

들판의 목동에서 하나님의 짐꾼으로

다윗은 그 형제들이 사무엘의 기름 부음 대상이 되고자 집안에 있을 때 집밖에 있었다. 한밤에 아버지의 양떼를 지키는 목양의 들판에 있었다. 사울의 후계자로 뽑히는 왕의 예선전에 다윗은 열외였다. 아버지 이새마저 다윗을 사무엘의 시선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 두었다. 목양의 들판에서 살을 에는 추위를 견디며 목양의 밤을 밝혀가던 다윗에게 하나님의 기름 부음이 임했다. 사무엘의 시선이 그럴 만한 자들에게 내리꽂힐 때마다 하나님은 고개를 내저으셨다. 부당할지라도 아버지의 명령이기에 한밤의 목양에 성실했던 다윗을 하나님이 사무엘 앞에 세워주셨다. 베들레헴의 목자들은 한밤에 자기 양을 치고 있었다. 목양의 들판에서 자신들을 구원할 메시아를 그리며 고난의 어두운 밤을 보내던 무명의 목자들에게 구주 탄생의 소식이 주어졌다. 오늘 주님께서 맡겨주신 자신의 양떼를 지키며 외로워도 성실히 목장을 돌보는 사역자들에게 주의 권능의 말씀이 임할 것이다.

롯이 기름진 들판을 택했을 때 아브라함은 메마른 광야에 길을 내며 하나님 신뢰의 걸음을 옮겼다. 롯과의 결별을 통해 거룩한 분리를 이룬 아브라함은 그렇게 하나님 앞에 선 외로운 단독자로서 땅의 약속에 이은 하늘의 약속까지 받아 천지의 주재이신 하나님의 친구, 하나님의 선지자 곧 대언자로 우뚝 섰다. “짐을 지고 나르는 자” 아모스는 외관상 번영의 시대에 살며 영적 빈곤상태에서 무거운 죄의 짐을 짊어진 백성들에게 나타났다. 죄에 속박당한 영혼들이 살아가는 세상에는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처리해야 할 무거운 짐들이 산적해있다. 죄의 짐을 비롯한 온갖 문제의 짐은 개인만이 아니라 나라와 민족의 전진을 더디게 만든다. 시대의 예언자라 일컬어지는 하나님의 대언자란 하나님이 이끄시는 방향으로 무거운 짐수레를 끌고 나아간다. 짐꾼이 없으면 시대는 더 깊은 나락으로 빠져버리는데 아모스는 짐꾼의 삶을 마다하지 않았다.

아모스처럼 시대의 짐꾼 되기를 꺼려하지 않는 이에게 시대를 깨우는 경성의 메시지가 주어질 것이다. 외로운 사막, 궁벽한 땅에서 고독을 하나님과의 독대 경험으로 승화시키는 이, 말씀이 사라진 시대에 말씀의 씨를 뿌리고 싹을 틔워 말씀의 강수로 온 세상을 그득 채우려는 이, 천상으로부터 아무 소리 들리지 않아도 끊임없이 부르짖으며 침묵 속에 들려오는 하나님의 소리를 메아리로 받아들이려는 이에게 거룩한 임재가 지면을 뒤덮는 새벽이슬처럼 임할 것이다. 아모스는 뽕나무를 재배하던 농부요 양떼를 따르던 목자로 목양의 들판에서 평범한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어제와 다름없는 오늘의 삶에 치중하고 있을 때 그의 일상을 눈여겨보시던 하나님께서 들리셨다. 하나님은 들판에서 자기 일에 열중한 아모스를 찾아오셨던 것이다. 일상의 삶을 충일하게 살던 그에게 말씀을 들려주시고 그의 눈을 열어주셨다.

 

천상의 보좌에서 보내는 모스(A morse)부호 아모스(Amos)

하나님의 말씀을 받기 위해 때로는 특별하고 비범한 삶이 요구되기도 하지만 평범한 일상 가운데서도 말씀은 부족함 없이 임한다. 말씀을 보내시고 말씀의 종을 세우시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이다. 대언자의 인격이나 삶 자체에 어떤 강점이나 돋보임이 있어서가 아니라 한 사람을 세워 사용하심은 온전히 하나님의 은혜요 긍휼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자 하나님은 아모스의 눈을 열어 이전에 보지 못하던 환상들을 보게 하셨다. 황충, 불, 다림줄, 여름 실과의 환상이 그의 마음을 채웠다. 너무도 선명하고 두려운 환상들을 본 아모스는 부정부패로 하나님의 영광에 흠집을 내던 이스라엘 백성들과 지도층에게 가감 없이 전했다. 통렬한 하나님의 심판이었다.

아모스는 구원이 아니라 심판, 복이 아니라 화를 내리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알았다. 그런 아모스였기에 그의 메시지에는 공의의 불길이 늘 타올랐다. 그는 자신의 강력한 메시지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이 움직여 재앙에서 건짐 받기를 원했던 것이다. 사무엘 시대 이후부터 예언활동의 중심지로 알려진 벧엘에서 아모스는 거침없는 강성 메시지를 퍼뜨렸다. 결국 평민 예언자인 아모스는 직업 예언자인 아마샤와 대치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특히 메뚜기/불/다림줄이란 구체적이고 연속적인 재앙의 선포에 아마샤는 노골적인 적대감을 드러냈고 여로보암 왕에게 아모스를 국가 전복을 기도한 모반자로 몰아세웠다. 벧엘의 제사장으로서 직업적으로 예언활동을 해오던 아마샤는 자신의 입지가 약화될 것을 우려하여 아모스에게 벧엘에서의 예언활동을 그치고 유다 땅으로 돌아가라며 윽박질렀다.

비천한 이중 직업(뽕나무 재배, 목동)에 주로 종사하면서 예언 활동은 파트타임 정도에 불과했던 아모스는 화려한 왕궁이나 예언의 도시 벧엘이 아닌 한적한 시골 드고아의 들판에서 예언의 꽃을 피웠다. 예언의 중심지로부터 쫓겨나 예언의 변방에서 활동했지만 그의 예리한 예언은 벧엘만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왕궁 벽을 넘어 이스라엘 전역으로 퍼져갔다. 그의 예언은 거짓 예언자들의 죽은 언어들에 비해 생명력이 흘러 넘쳤기에 의에 굶주렸던 심령들을 환호시켰고 벧엘의 예언자들은 이런 아모스를 두려워했다. 왕궁의 실력자들도 그의 예언을 껄끄럽게 여겼다. 그는 예언자들의 아들 그룹에 속하지는 못했지만 하나님의 아들에 속했다. 목양의 들판에 임한 하나님의 말씀이 그에게 무시 할 수 없는 예언자의 능력을 덧입혀 주었다.

하나님이 부패한 가톨릭의 천년 아성을 무너뜨리고자 사용하셨던 하나님의 망치 루터처럼 아모스는 패역한 이스라엘 백성을 징치하기 위해 가다듬은 하나님의 철 채찍이었다. 아모스(Amos)는 죄로 인해 소통이 단절된 인간 영혼에게 하나님의 비밀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채택된 “하나의 모스 부호”(A morse)였다. 아모스를 통해 계시된 하나님의 메시지는 공의의 충만이었다. 거룩이었다. 사랑과 긍휼의 서곡이었다. 아모스가 그토록 공의에 집념했던 만큼 하나님은 그 백성들을 향한 긍휼에 정성을 쏟으셨다. 이 시대에 말씀으로 섬기는 모든 사역자들은 아모스처럼 뭇 영혼들이 짊어진 무거운 짐을 대신 져 나르며, 수시로 천상의 보좌에 SOS(구조 신호)의 ‘모스 부호’(A Morse=AMOS)를 보낼 수 있는 메신저 됨에 결격사유가 없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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