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의 불길을 헤쳐 나온 모세

  • 입력 2021.02.16 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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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사역자에게 고하는 말씀 (38)

한명철 목사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은혜와 평강교회를 담임하며 30권의 저술과 글쓰기를 통해 복음 사역에 애쓰는 목회자다.
한명철 목사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은혜와 평강교회를 담임하며 30권의 저술과 글쓰기를 통해 복음 사역에 애쓰는 목회자다.

기도의 불길을 헤쳐 나온 모세

메신저가 본받아야 할 기도의 모본자 “모세.” 사내로 태어나면 강물에 내다버려야 하는 살벌한 시기에 한 사내아이가 태어났다. 갓난애의 준수함이 부모에게 담대함을 주었고 숨어서 석 달을 키웠다. 아들을 석 달 간이나 양육할 수 있었던 것은 부모의 사랑과 믿음이었다. 더 이상 숨겨 키울 자신이 없었던 부모는 애굽 법령에 따라 아기를 나일 강 하수에 내버렸다. 목욕하러 나왔던 바로의 딸이 갈대 사이로 떠내려가던 상자를 보았다. 이렇게 나일 강에서 “건짐 받은” 모세가 후일 이스라엘을 바로의 학정에서 건져냈다. 애굽 궁정에서의 40년은 중보자가 아니라 바로의 후계자로 보좌에 앉는 법을 배우는 시기였다. 목동으로 보내야 했던 40년은 버려진 환경에서 생존하는 법을 터득하는 기간이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노령기에 접어들어 하나님이 그를 부르셨다. 모세를 만나기 위해 하나님이 호렙 산의 불꽃 가운데 강림하셨다. 모세는 신을 벗었고 여호와 하나님 앞에 엎드렸다.

광야 40년은 모세가 중보자로 세워져가는 시기였다. 완력으로 사람을 쳐 죽이던 혈기도 다 빠져나가고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온유함이 가장 승한 자로 모세는 변했다. 성경은 그의 기도 생활에 대하여 많은 정보를 제공하지 않지만 그에 관해 묘사하는 몇 구절만 보아도 그가 기도의 불길을 헤쳐 나온 기도꾼임을 알 수 있다. 모세는 불멸의 중보 정신으로 기도의 한 차원 높은 지평을 열었다. 모세는 하나님이 세우신 구원자였다. 물에서 구원받아 “건짐 받은 자”로 불렸던 그가 만인의 구원자로 세워졌다. 그의 120년 생애는 대나무의 도드라진 마디처럼 셋으로 분명히 구분된다. 초기 40년은 바로의 정치적 양자로서 궁중 생활을 보냈다. 중기 40년은 이드로의 관계적 양자로서 광야에 머물렀다. 후기 40년은 하나님의 신앙적 양자로서 광야를 지나갔다.

생명책에서 삭제를 내건 강청의 기도

자신을 키워준 바로궁을 떠난 것은 모세가 내린 신앙적 결단이었다. 화려한 궁궐을 떠남에 있어 모세는 추호도 주저하지 않았다. 모친의 젖을 빨면서 익혔던 조상의 하나님 신앙이 그를 영화와 안락의 그늘에서 과감히 벗어나게 만들었다. 그는 갑작스레 불어 닥친 살인, 배신, 지명 수배, 도망자의 현실과 마주치며 위기의 순간들을 헤쳐 나가면서 동족 히브리인의 참상에 조금이나마 눈을 떴다. 척박한 광야 생활을 시작한 모세의 앞날은 불투명했다. 희망의 서광이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모세는 중보자의 사역을 감당하기 위해 애굽에서 배운 모든 학술들을 광야에 묻었다. 그는 더 이상 애굽의 세속성을 추구하지 않고 오롯이 광야의 영성에 길들어져갔다. 그야말로 모세는 인간적이고 세상적인 기준에서의 비범함을 완전히 포기했다. 오직 한 분 하나님만을 의지한 채 자신의 손에 쥐어진 하나님의 지팡이를 놓지 않았다.

파란만장한 인생 역정과 굴곡진 신앙의 변곡점에서 천상의 나그네 걸음을 과감히 내딛던 그를 통해 역사하신 하나님의 손길은 놀랍기만 하다. 출애굽의 사건에서 가나안의 여정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은 모세를 철저히 사용하셨다. 모세는 하나님과 백성 사이에 있었다. 그는 자신에게 맡기신 하나님의 백성들이 구원받을 수만 있다면 모든 것을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이었다. 용서받을 수 없는 자리에서조차 그들의 용서를 간청했다. 참으로 모세는 자신의 이름이 생명책에서 삭제되는 경우라 할지라도 그 길을 선택하겠노라 강변했다. 그의 기도는 차라리 억지에 가까웠다. 중보의 영이 없이는 감히 드릴 수 없는 강청기도였다. 이 기도가 하나님을 감동시켰다. 모세의 파격적인 중보기도를 하나님이 받으셨다. 그 결과 모세의 이름은 주님의 기념책에 그대로 남게 되었고 이스라엘 백성은 다시 한 번 용서의 은총 안에 거했다. 모세의 중보기도는 그의 파격적인 기도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아니하시오면 원하건대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시옵소서.”

빚진 자의 자세로 빌고 또 빈 모세

이것이 가당키나 한 기도인가? 반역하고 배은망덕한 회중들을 위해 자신의 영혼을 멸망시키려는 의지는 아무리 사랑의 극진한 표현이라고 하지만 쉽지 않다. 누구나 자신의 존재를 사멸에 이르게 하는 ‘딜릿’(DELETE) 키는 어떤 경우에도 함부로 누르지 않는다. 그런데 모세는 동족 사랑 때문에 과감히 눌렀다. 모세는 그들을 아끼시는 하나님의 뜻을 알았다. “합의하시면”이란 모세가 자신의 의지보다 하나님의 뜻에 맡겼음을 보여준다. 중보는 아무리 남을 위한 기도라 할지라도 자신의 뜻이 관철되기를 주장하면 그릇된 것이다. 중보를 아무리 많이 하고 자주 해도 자신의 성을 쌓는 것 같은 영적 치기(稚氣)는 금물이다. 시혜자(施惠者) 의식은 중보기도자에게 무척 해롭다. 이런 증상을 발견하면 즉시 중보를 멈추고 남이 아니라 위태로운 자신을 위한 기도에 몰입해야 한다. 정작 중보기도가 필요한 것은 자신이기 때문이다. 모세는 백성에게 어떤 빚도 없었고 오히려 그들에게 베푼 섬김과 희생 때문에 채무 이행을 요구할 만했지만 늘 빚진 자의 자세로 이스라엘을 위해 빌고 또 빌었다. 이것이 그를 위대한 중보기도자로서 주님의 예표가 되게 했다.

흰 돌 위에 새겨진 그 이름, 영원한 생명의 징표로 천국 생활을 약속해주는 그 이름, 주님의 얼굴을 상시로 뵙고 영원한 친밀함 속에서 교제를 이어갈 끈인 그 이름이 생명책에서 삭제됨은 세상의 모든 저주를 갖다 쌓아도 모자랄 그런 저주였다. 모세가 그런 기도를 자청하지 않아도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향하신 자신의 섭리를 이끌어 가실 수 있었다. 모세는 단지 자기 백성의 사죄를 위해 자신의 영원한 삶을 맞바꾸고자 했다. 그것도 자신을 몇 번이나 죽이려던 배은망덕한자들, 불순종과 반역과 뻔뻔스러움의 극치를 달리던 후안무치한 족속의 용서를 위해서였다. 이것을 단순한 동족애의 범주에 놓고 이해할 수 있겠는가? 지도자다운 희생의 극치라 치켜세우면 그만인가? 한순간 하나님의 마음이 부어졌기에 모세는 자신의 영혼을 포기하는 극단의 길을 선택해서라도 동족의 멸망을 무마시키려 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틈 사이에 선 중보자

하나님은 불순종과 반역을 거듭 일삼던 이스라엘을 쓸어버리고 순종하는 종 모세를 통해 경건한 나라를 세울 뜻을 내비치셨다. 죄악 된 세상을 홍수로 파멸하시고 노아를 세워 새로운 인류의 조상 삼으셨던 하나님께서 패역한 선민을 제하시고 새로운 선민을 택하여 모세를 조상 삼으려 하셨다. 모세는 일언지하에 하나님의 제안을 거절하고 오히려 자신이 속한 공동체가 사죄의 은총을 입어 약속의 땅을 향한 순례 여정에 차질 없기를 바랐다. 자신의 이름으로 세워질 신국(神國)의 가능성을 포기한 채 배역하고 완악한 그 백성을 위해 용서를 구했던 이 모세의 기도를 하나님은 들으셨다. 영원한 생명을 걸고 하나님의 진노를 누그러뜨리려 한 모세의 기도는 의인의 숫자를 놓고 하나님과 흥정을 시도했던 아브라함의 중보 정신을 능가했다.

모세를 통해 이루어질 새로운 나라는 하나님의 대안이었다. 순종하는 자 모세를 정점으로 일으킬 나라는 큰 나라일 수 있었지만 모세는 이 일로 인해 이스라엘을 선택하고 구원하신 하나님의 이름이 원수들에게 조롱당할 수 있는 이유를 내세워 하나님의 제안을 거절했다. 그의 관심은 나타날 새나라가 아니라 사라질 이스라엘에게 있었다. 새 나라의 창업자가 되느니 동족과 함께 진멸되기를 원했다. 사실 동족 사랑보다 앞선 것은 그의 중보 정신이었다. 완악한 이스라엘 백성들과 하나님의 틈 사이에 서서 모세는 자주 중보의 무릎을 꿇었다. 이런 중보 정신은 인간의 성품을 훨씬 뛰어넘는다. 본능적 반응과 이성적 이유를 죄다 죽여 버리고 절벽에서 떨어지기 직전의 원수를 살리려는 이 마음은 외나무다리에서 맞닥뜨린 원수의 위급한 상황을 못 본 체하여 지나가지 않고 은혜를 베푼 사마리아인의 모습이다. 아니 솔직히 그 어떤 인간의 살신성인 같은 희생도 감히 견줄 수 없을 자기 포기다. 하나님은 이런 모세의 중보 정신을 높이 평가하셨다.

모세의 위대성은 자신의 영혼을 저당 잡히려고까지 했던 무모할 정도의 희생정신에 있었다. 그의 간청은 기도를 위한 기도로서의 립 서비스가 단연코 아니었다. 그의 기도 중심에는 진심이 덩어리져 있었다. 자기의 영혼을 버려 배역한 동족의 용서를 간청한 모세의 진심을 보신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죄를 사하셨다. 이는 중보기도의 좋은 표본이다. 희생과 섬김으로 일관된 40년 광야 생활을 통해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었건만 약속의 땅 가나안을 목전에 두고 죽어야 했다. 죽을 때 눈이 흐리지 아니하고 기력이 쇠하지 않았던 모세가 아니었던가! 위대한 사역에도 불구하고 작은 허물로 인해 중보자 모세는 그렇게 영광스럽지 못한 말로(末路)를 맞이했다. 백성 중에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지 않음으로 모세는 희미한 종말을 고했지만 중보자로서의 광채만은 그의 얼굴에 빛났던 광채에 버금간다. 그는 주님의 별세 문제로 변화산상에 엘리야와 동행하여 나타남으로 영계에서 그가 지니고 있는 존귀한 위치를 가늠하게 했다. 영원한 생명을 담보로 한 모세의 중보기도는 바울의 경우와 함께 신구약에서 쌍벽을 이룬다. 동족 사랑의 측면에서 이들 두 사람이 보여준 중보자로서의 자멸 의지는 그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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