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사역자에게 고하는 말씀 (41)

한명철 목사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은혜와 평강교회를 담임하며 30권의 저술과 글쓰기를 통해 복음 사역에 애쓰는 목회자다.
한명철 목사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은혜와 평강교회를 담임하며 30권의 저술과 글쓰기를 통해 복음 사역에 애쓰는 목회자다.

 

사람들에게 잊혔으나 하나님께 기억된 자 세례요한

세례요한은 제사장 사가랴와 주님의 모친 마리아의 친족인 엘리사벳의 아들이었다. “하나님의 기억”(사가랴)과 “하나님의 서약”(엘리사벳) 사이에서 “사랑받는 자” 세례요한이 태어났다. 계명에 비추어 무흠(無欠)했던 노부부는 하나님 앞에서 의인이었고 그들의 경건한 씨앗인 세례요한도 하나님의 공의에 출중했다. 특이한 출생 이력 때문에 세례요한은 아이 적부터 세인의 주목을 받았다. 절망의 오랜 세월을 버텨온 백성들은 그의 장래를 희망 속에 기대하며 삶을 이어갔다. 존경받던 제사장의 아들로서 세례요한은 유대 백성들 중에 단연 돋보였고 부모의 각별한 보살핌 속에 세례요한은 구별된 인생 수업을 쌓아갔다.

그는 제사장 수업을 받으며 거룩한 통제의 울타리 안에 있었다. 모친을 통해 전해들은 마리아와 예수의 이야기는 자라나던 그의 마음에 강한 인상으로 각인되어 있었다. 그에게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받을 제사장직과 유대 백성들의 기대감 어린 후원이 그의 장밋빛 삶을 기둥처럼 떠받치고 있었다. 어느 날 세례요한은 전격적으로 가출을 단행했다. 성경은 그의 가출 배경에 대해 침묵한다. 어쩌면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는 어떤 힘이 태아 적부터 그의 의식을 뒤덮고 있었을지 모른다. 때가 이르자 세례요한은 보장된 삶의 안락함을 거절하고 거친 광야로 발걸음을 옮겼다. 시대의 기류에 저항하면서 이단아가 될 DNA가 출생 때부터 각인되었는지 모른다. 그의 홀로서기가 각성된 영혼이 내린 결단이 아니었다면 주님의 성령이 그를 떠밀었을 것이다.

세례요한은 세상의 흔적을 완전히 지워버리고 광야에 묻혔다. 세례요한은 세상을 잊었다. 머지않아 세상도 그를 잊었다. 자신조차 자신의 과거를 잊을 즈음에 하나님의 말씀이 구약의 예언자들처럼 그에게 극적으로 임해왔다. 예언자의 영이 그의 마음과 혀를 가득 채웠다. 말라기 선지자의 예언을 통해 엘리야의 심령을 추구하던 세례요한은 메시아의 선구자로 길 닦을 기량을 터득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선지자보다 나은 선지자였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토록 기다려오던 바로 그 엘리야였다. 사람들을 떠나 홀로 광야에 은거하던 그는 말씀의 채움을 받자 사람들에게로 눈을 돌렸다. 사람들에게 잊혔으나 하나님께 기억된 자로 세상의 기초를 뒤집어엎기 위해 광야의 모진 바람을 등지고 세속의 훈풍에 콧노래 부르던 사람들에게로 질풍처럼 내달렸다.

빈들에서 임한 하나님의 말씀 까닭에 광야의 외치는 소리가 된 세례요한

제사장의 후계 수업을 받던 한 유대 젊은이가 세상을 등졌다가 엘리야의 능력으로 대중 앞에 나타났다. 경건한 부모를 통해 전해 들었던 예언의 말씀들을 광야의 비바람 속에서 다듬던 예언자가 400년의 침묵을 깨뜨리고 뜨거운 햇빛처럼 사람들을 비추었다. 징조와 환상 속에 고고성을 터뜨렸던 위대한 인물이 짐승 같은 모습으로 세상에 출현했다. 그는 아직 세상의 초입인, 빈들과 세상의 경계에 자리 잡고 땅 끝에서 땅의 중앙으로 진입할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세례요한이 빈들에 모습을 보이자 입소문을 타고 수많은 사람들이 그에게로 몰려들었다. 개중에는 그가 어렸을 적에 백성의 희망이었던 바로 그 기적의 아이임을 뒤늦게 알아차린 이들이 있었을 것이다. 예언자의 목소리를 기다리던 사람들이 기인의 출현에 맞춰 빈들로 몰려들었다.

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야 했을 세례요한은 힘겨운 광야 생활에 어느덧 익숙해져 있었다. “아이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지며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들에 있으니라.”(눅 1:80)는 말씀에 비추어 세례요한은 이미 유년기부터 빈들 생활을 시작했을 것이다. 수십 년 세월 동안 사막의 영성 위에서 몸과 마음을 다지던 그의 심령은 여물 대로 여물어졌다. 바로 그때 하나님의 말씀이 그에게 임해왔다. 폭풍처럼 휘몰아 닥친 말씀은 준비된 세례요한의 심령에 화살촉처럼 박히고 인같이 새겨졌다. 말씀이 임하자 은거자의 동굴에서 나와 요단 강 부근으로 자리를 옮겨 의의 말씀을 전하기 시작했다.

세례요한은 자신이 받은 말씀을 낱낱이 토해냈다. 서릿발 같은 기상으로 백성들의 죄를 지적하고 하나님 앞에 그들을 고발하는 그의 외침은 능력 자체였다.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자신들의 죄를 자복하고 하나님의 권능 아래 무릎 꿇었다. 그는 빈들에서 임한 하나님의 말씀 까닭에 광야의 외치는 소리가 되었다. 아무도 세례요한과의 동행을 원치 않았다. 빈들로 나가기 직전까지 세인들의 주시대상이었던 그의 곁에는 유력한 자들이 진을 쳤을 것이다. 어려서부터 주님의 손길이 함께 하셨음을 아는 그들로서는 세례요한에게 거는 기대가 그만큼 남달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례요한은 이러한 사람들의 기대를 저버렸다. 하나님의 기대를 따르기 위해 대중의 갈망을 포기했다. 보장된 종교 엘리트의 길을 포기하고 불확실한 미래에 자신을 내맡겼다. 그의 결정은 이해하기 어려웠고 누가 생각해보아도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아들의 신비로운 출생을 익히 아는 부모 역시 세례요한의 돌출 행동을 완전히 수긍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밀물처럼 밀려들었던 호사가들이 썰물처럼 물러가고 세례요한은 혼자 남겨졌다. 사람들이 등 돌린 그 고독한 현장에 홀로 한분이신 하나님이 나타나셨다.

 

세상의 낮은 자로 임했지만 주 앞에 큰 자로 세상에 드러난 세례요한

그를 다루시는 하나님의 손길은 강하고 세밀했다. 사막의 황량한 환경에서 세례요한의 영혼은 어둠을 길들이는 빛의 사도로, 죄를 부서뜨리는 의의 분쇄기로 놀랍게 고양되었다. 그는 하나님의 손에 들려진 채찍으로 몰려든 군중들에게 사정없이 휘둘렀다. 말씀의 검에 베인 영혼들은 불같은 회개를 통해 새로운 변화를 이루어갔다. 세례요한은 진리에 굶주린 대중들을 향해 그들의 신분과 지위 고하가 어떠하든 “독사의 자식들!”이란 폭언으로 말문을 열었다. 그리스도도 아니고 선지자도 아니고 다만 사막에서 외치는 소리에 불과한 그였지만 그의 메시지가 전한 충격과 역사는 선지자 급이었고 왕의 길을 준비하는 자다웠다.

세례요한은 인본주의적인 타협을 거부하고 하나님의 공의를 외쳤다. 독사의 자식들을 겨냥하며 직격탄을 날리던 세례요한은 무리들에게 자비와 긍휼의 삶을 실천하기를 명했다. 세리와 군병들을 향해서는 부정과 포학을 버리고 바르게 살 것을 명했다. 세례요한은 백성들의 죄를 꾸짖고 준엄한 심판을 줄기차게 외쳤다. 예언자가 끊어진 400년의 암흑기 동안 서릿발 같은 예언자의 말씀에 목말라하던 대중들은 깊은 광야로 모여들었다. 하늘의 음성을 듣고자 함이었다. 일상의 삶을 잠시 뒤로 하고 사막의 은거자를 찾은 그들에게 세례요한은 자신에게 임한 말씀을 담대히 전했다.

선지자들의 글에 남겨진 메시지들을 상기시키는 세례요한의 비수 같은 말씀이 그들의 가슴뿐 아니라 영혼 깊숙이 후벼 팠다. 죄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력과 물러서거나 타협을 모르는 그의 옹골찬 모습은 엘리야와 아모스를 그대로 이은 예언자의 영성 바로 그것이었다. 세상의 낮은 자로 임한 세례요한은 주 앞에 큰 자로 세상에 드러났다. 사람들을 피해 숨었던 그를 때가 되자 하나님이 내보이셨다. 사람들의 기억에서 지워지자 사람들이 몰려들어 알려지게 하셨다. 사람들은 당당한 진리의 선포에 전율했고 임박한 심판으로 인해 두려움에 떨었다. 크게 울며 통회 자복했다. 그로 인해 회개 운동이 유대 고을들 사이로 퍼져나갔다. 그의 사역은 폭풍같이 빨랐으나 번개처럼 순식간에 종언을 고했다. 말씀이 권력자의 부정한 삶과 부딪히자 세례요한은 기꺼이 목숨을 버렸다. 광야의 모래 폭풍 속에서 다졌던 영성을 따라 한 알의 모래로 화해버리고 말았다.

누구나 세례요한의 길을 답습하기는 어려워도 그가 보여준 메신저로서의 어엿함은 새겨둘 만하다. 하나님의 의로 단련되고 공의의 충만함으로 세움 받지 못하면 서릿발 같은 기상을 견지하기란 지난(至難)한 일이다. 오늘 사람들은 빈들로 나아가기를 꺼린다. 번성하는 시장과 도시의 불빛 속에서도 소위 메시지들을 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영혼을 길들이기보다 사람들의 욕구에 길들여진 말씀, 시대를 깨우는 각성제 같은 메시지보다는 곤한 영혼을 편케 하는 안마용 메시지가 형형색색의 보자기에 싸여 원하는 이들을 위해 진열되어 있다. 죄를 지적하고 심판을 경고하고 의를 표방하는 말씀들은 외면당하기 일쑤다. 시류를 역행하며 순교의 피를 흘리기까지 죄의 심판과 지옥불의 화염을 생생하게 전하는 메신저는 과연 환영에 불과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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