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사역자에게 고하는 말씀 (40)

한명철 목사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은혜와 평강교회를 담임하며 30권의 저술과 글쓰기를 통해 복음 사역에 애쓰는 목회자다.
한명철 목사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은혜와 평강교회를 담임하며 30권의 저술과 글쓰기를 통해 복음 사역에 애쓰는 목회자다.

하나님이 당신의 종들을 만나는 광야

광야는 하나님이 자기의 종들과 만나는 곳이다. 하나님은 번성의 도시 갈대아우르에서 아브라함을 거친 광야로 이끌어내셨고 이삭과 야곱을 광야에서 다양하게 훈련시키셨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은 실로 광야의 하나님이셨다. 광야에서 하나님은 모세를 만나 친구처럼 대면하여 말씀을 나누셨다. 광야에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세심하게 다루셨다. 광야 길을 걸으면서 세례요한은 말씀의 검을 예리하게 갈아 날을 세웠다. 회개를 외치고 독사의 자식들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를 불같이 토해냈다. 광야에서 마귀의 시험을 이기신 주님은 성령의 권능으로 갈릴리에 돌아가셨다. 볼로냐의 광야에서 경고의 칼날을 벼린 사보나롤라는 허영과 광기에 지쳐 있던 피렌체에 폭풍처럼 임해 ‘통곡하며 기도하던 무리들’(piagnoni)을 일으켰다. 광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신성한 장소다. 광야에는 말씀의 영이 깃들어 있다. 그러기에 말씀을 들으려면 누구나 광야로 들어가야 한다. 세상의 시끄러운 환경을 벗어나와 하나님 앞에 홀로 서야 한다.

광야로 나가지 않으면 안방의 점술사로 전락하기 쉽다. 말씀을 빙자하여 귀한 영혼을 현혹하고 자기 심령을 따라 예언하기 쉽다. 탐욕에 빠져 사람의 영혼을 삼키는 배역자가 되고 허탄한 이상에 빠져 거짓말하는 거짓 선지자로 변질된다. 그러면 결과가 비극적이다. 맘몬에 회유되어 발락을 오도하는 발람의 후예가 된다. 돈은 효용 가치를 넘어 맘몬의 야릇한 영을 통해 이미 사람들의 영혼을 야금야금 파먹었기에 누구도 이 끈질긴 마력에서 자유롭기 어렵다. 대언자가 돈 맛을 보면 중이 고기 맛을 아는 것보다 더 위협적이다. 오늘날 돈과 연관된 스캔들에 휘말린 이들은 아무리 손사래를 쳐도 맘몬의 종, 발람의 제자임을 부인할 수 없다. 그래서 모른 체하며 죽을 영혼을 살리고 살릴 영혼을 죽이는 화의 목자가 된다. 빈들은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빈들로의 호출이 있을까보아 도성에서의 사역이 화급하고 필연적임을 애써 강조한다. 광야라는 개념 자체를 싫어한다.

하나님의 예비하신 비밀의 처소, 빈들

빈들은 그래서 늘 빈 상태를 벗어나지 못한다. 빈들이 채워야 할 사람들로 채워진다면 ‘찬들’이란 명칭이 생겨날는지 누가 알겠는가? 어쩌면 하나님과의 독대를 원하는 이들을 위해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비밀의 처소가 빈들일는지 모른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유독 빈들에 엎딘 영혼을 지나친 적이 없으셨다. 백이면 백, 모두 만나주셨다. 우리가 아직 하나님 만남을 경험치 못했다면 우리가 빈들이 아닌 도성 한복판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가다듬어지기 전에 누리기 바빠 빈들은 아예 엄두도 내지 못한다. 누가 빈들로 나아갔는지 아는가? 소수에 불과하다. 많지 않은 하나님의 사람들만이 영원하신 말씀과의 접촉을 위해 빈들을 배회했다. 하나님의 참 예언자들은 빈들로 나아갔다. 성경에서 빈들에 나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자들 중에 호세아, 세례요한, 모세, 아모스, 바울사도, 이렇게 다섯 명만 선정했다.

가장 신약적인 메시지를 함축하고 있는 호세아서는 구약의 복음이라 할 만하다. 공의의 예언자인 아모스와 대조적으로 호세아는 언제나 사랑의 예언자로 불린다. 호세아는 북 왕국 이스라엘의 마지막 예언자로서 나라가 처한 복합적인 위기를 양 어깨에 짊어지고 있었다. 그는 하나님의 존귀한 예언자였지만 결코 행복할 수 없는 환경에 휩싸여 있었다. 호세아는 북 이스라엘이 여로보암 2세의 40년 통치로 인해 정치적 안정과 경제적 번영을 누리고 있을 때 소명 받아 예언 활동을 시작했다. 솔로몬의 황금기에 필적할 만큼 영토 확장을 이룬 여로보암 2세는 탄탄한 정치적 입지를 기반으로 이스라엘을 다스렸지만 영적 타락상은 심각한 수준에 달하였다.

이스라엘의 운명과 호세아 세 자녀의 이름

호세아는 지도자들과 백성들의 죄를 준엄하고 꾸짖으며 심판이 이르기 전에 하나님께로 돌이킬 것을 강력히 촉구하였다. 누구도 그의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로부터 30년 후 북 왕국 이스라엘은 앗수르의 살만에셀에 의해 수도 사마리아가 함락됨으로 멸망하고 말았다. 누가 호세아 선지자를 행복하다 말할 것인가? 호세아는 방탕한 여인을 아내로 맞아야 했다. 사랑이 아니라 사명 때문에 그 여인을 품어야 했다. 아내 고멜이 다시 음부가 되었을 때는 비싼 값을 치르고 그녀를 집으로 다시 데려와야 했다. 원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명하셨기에 호세아는 무거운 발걸음을 자주 내디뎌야 했다. 사역을 위해 불행한 가정생활을 이끌어야 했던 그, 배신을 밥 먹듯 하는 음부를 아내로 두어야 했던 그, 아무리 사명을 위해서였고 하나님이 함께 하셨다 해도 그를 행복하다 말하기란 여간 쉽지 않은 일이다.

호세아는 아내가 자신에게 불성실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에 대한 성실함을 끝까지 지켰다. 이는 마치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불성실했지만 끝까지 사랑과 긍휼로 임하셨던 사실과 부합된다. 호세아는 이스라엘의 거듭된 무관심에 아랑곳없이 줄기차게 회개와 심판의 메시지를 전했다. 그는 불성실한 아내에 대해서도 성실했고 예언자로서의 사명에도 성실했다. 세 자녀가 태어났다. 아내와의 관계는 사랑이 아니었어도 호세아가 세 아이를 향해 느낀 것은 본능적인 자애였다. 그러나 이번에도 호세아는 마음에 없는 이름을 자식들에게 붙여야 했다. 그것은 차라리 저주라 할 만큼 섬뜩한 이름들이었다. 큰 아들의 이름은 이스르엘이라 지었다. 이스르엘은 예후가 대량 학살을 자행했던 곳으로 이스르엘이란 곧 “살육의 도시”를 뜻한다. 둘째는 딸이었는데 로루하마로 지었다. 이는 “긍휼이 없음”을 뜻한다. 막내아들마저 로암미로 지어야 했다. 이는 “내 백성이 아님”을 의미한다. 호세아는 인생의 중요한 시기마다 하나님의 메시지를 위해 희생적 삶을 강요당해야 했다.

세 자녀의 이름은 역사적으로 실현된 이스라엘의 비극적 운명과 그 원인을 설명해준다. 장자의 이름은 이스라엘의 비참한 최후를 보여주고 차녀의 이름은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원인을 알려주며 막내아들의 이름은 원인을 가능케 한 단초를 가르쳐준다. 이스라엘의 모든 도시는 앗수르의 대군에 의해 살육의 도시로 화할 것이다. 그들 가운데 임했던 긍휼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긍휼의 떠남은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 된 신분을 잃었기 때문이다. 이것을 거꾸로 막내아들부터 둘째와 첫째 순으로 이름 뜻을 적용하면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 된 신분을 상실하여 긍휼을 잃고 하나님의 긍휼이 사라진 결과로 폐허더미에 놓이게 되었다는 말이다.

호세아의 비극을 택하신 하나님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호세아는 빈들에 버려진 존재였다. 한 마디로 그는 불행한 결혼의 광야에 있었다. 세상 사람들의 비웃음과 냉대를 한 몸에 받아야 했다. 어느 누가 호세아의 삶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까? 그는 인간 세상에서 철저히 외면당한 이단아였다. 제사장 그룹과 선지자 그룹에서 그를 성토하는 목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왕도, 백성들도 그를 우습게 여겼다. 그의 강렬한 메시지는 빗나간 결혼 생활로 인해 종종 그 빛이 바래졌다. 호세아가 스스로 할 수만 있었다면 예언자의 사역을 금세 포기했을 것이다. 평생을 내우외환에 시달려야 했던 호세아가 견디기에는 너무 가혹한 짐이었다.

그의 예언 활동은 단기간에 끝나지 않았다. 이스라엘의 여로보암 2세 때 시작된 그의 활동은 이스라엘 백성이 앗수르에 포로가 되기까지 25년간이나 계속되었다. 정치, 경제적으로 가장 번성한 시기를 거쳐 역사상 가장 어두운 시대에서 예언 활동을 했다. 호세아는 이 모든 고통을 겪으면서도 예언자로서의 길을 벗어나지 않았다. 그랬기에 그가 심적으로, 영적으로 겪어야 했던 고통과 번민은 우리의 경험과 상상을 초월한다. 이스라엘은 본 남편인 하나님을 배신하고 풍요의 여신 바알과 정을 통했다. 그들은 하나님과 맺었던 계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했다. 하나님은 그들의 돌이킬 것을 간절히 권했지만 이스라엘이 마지막 택한 길은 배역이었다. 뼈마디가 삭도록 이미 음욕의 노예가 되어버린 이스라엘에게는 더 이상 어떤 희망도 없었다. 걷잡을 수 없는 파멸의 길이 그들 앞에 놓여 있었다. 음부(淫婦)의 삶을 고집하는 그들에게 음부(陰府)가 입을 벌리고 있었다.

하나님이 호세아를 예표로 세웠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향해 배역과 고집의 어깨를 내밀 때부터 하나님은 이미 긍휼의 마음으로 그들을 포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목적을 위해 하나님이 호세아의 비극을 택하셨다. 호세아는 스스로 자신의 삶을 선택할 수 없었다. 호세아는 하나님을 거스를 수도 없었다. 척박한 빈들에 홀로 처한 그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강하게 임해왔다. 호세아의 자기포기가 없었다면 하나님 사랑의 위대성이 그처럼 가슴에 와 닿을 수 있었을까? 그의 자발적 순종이 없었다면 핏빛이 선연하고 공의의 칼날이 번득이는 구약의 한가운데 과연 신약적 사랑의 메시지가 자리할 수 있었을까? “여호와께서 구원하시기를” 기대하고 기도하면서 일생을 광야의 길손으로 내려앉았던 그는 이 시대의 말씀사역자들에게 희생 깃든 사역을 요구하고 있다. 더 이상의 호세아는 없을 것이지만 그가 지녔던 정신만은 말씀 사역자의 후예들이 결코 놓쳐서는 안 될 귀중한 유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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