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임재 속에 머문 기도의 모본자 사무엘

  • 입력 2021.02.09 1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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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사역자에게 고하는 말씀 (37)

한명철 목사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은혜와 평강교회를 담임하며 30권의 저술과 글쓰기를 통해 복음 사역에 애쓰는 목회자다.
한명철 목사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은혜와 평강교회를 담임하며 30권의 저술과 글쓰기를 통해 복음 사역에 애쓰는 목회자다.

하나님 임재 속에 머문 기도의 모본자 사무엘

메신저가 본받아야 할 기도의 모본자 “사무엘.” 에브라임의 한 산지에서 산 사나이의 아들로 태어나 평범한 삶을 보내야 했을 사무엘을 하나님이 택하셨다(대상 6:33-34절에 따르면 레위 족속에 속함). 사무엘은 모친 한나의 사무친 기도 열매이면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리신 선물이었다. 그가 태어날 당시 이스라엘에는 하나님의 이름이 없었다. 하나님의 이름이 외쳐지고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가 끊이지 않았지만 이스라엘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종적을 감춘 지는 이미 오래였다. 하나님은 사무엘의 출생을 기해 잃어버린 자신의 이름을 되찾으려는 징조를 주셨다. 그것이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한 관점에서 사무엘의 출생이 갖는 영적 의미였다. 사무엘이 태어나서 자라나는 과정 그리고 죽음에 이르기까지 그가 보여준 성소 중심의 삶과 일관된 기도의 자세는 “하나님의 이름”이라는 이름 뜻 그대로 하나님의 이름을 드러낸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손색이 없었다.

사무엘은 나실인으로 태어났다. 태어나기 전부터 하나님께 바쳐진 헌신의 사람이었다. 실로의 성막에서 자라난 사무엘은 늘 하나님의 임재 속에 있었다. 하나님이 그와 함께 계셨다. 하나님은 사무엘의 말 한마디도 땅에 떨어지지 않도록 그에게 영적인 권위를 부여하셨다.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의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사무엘을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 세우신 선지자로 인정했다. 눈이 어두웠던 시대의 유일한 눈이었던 엘리가 죽고 아벡 전투에서 하나님의 법궤를 빼앗긴 지 20년이 지난 절망의 때에 이 사무엘이 나타나 붕괴되어가던 이스라엘을 극적으로 회생시켰다. 실로에서 다져진 그의 영적 인품은 그를 사사 중의 사사, 선지자 중의 선지자로 세우기에 실로 부족함이 없었다. 기도의 소명자로 부름 받은 그의 영적 여정은 일생 동안 단단히 여물어서 후세의 모든 기도자들이 본받을 만한 확고한 사표가 되었다.

기도로 돌보고 기도로 다스리는 사무엘

마지막 사사 엘리의 비극적인 마지막으로 이스라엘은 파멸 직전에 있었다. 사사가 사라지고 선지자가 출현하기 직전의 과도기에서 사무엘은 마지막 사사와 첫 선지자의 소임을 잘 감당했다. 물론 하나님이 이스라엘 역사에서 세우신 첫 선지자 모세를 필두로 미리암과 사사 시대의 드보라도 선지자로 불렸으나 본격적인 예언자 시대의 관점에서 사무엘의 위치는 특출했다. 그는 사사와 선지자 뿐만 아니라 제사장의 역할까지 수행했다. 사울의 등극으로 왕정 국가가 출발하기 전이었기에 사무엘이 이스라엘을 다스린 기간은 사사로서 활동한 시기라 보아 당연하다. 여하튼 미스바의 집회를 필두로 강적 블레셋을 함몰시킨 사무엘은 하나님의 대리자인 사사로 어엿이 등장했다. 미스바의 집회는 기도로 시작되었다. “내가 기도하리라”는 선언은 그의 중보자로서의 자세를 잘 보여준다.

사무엘은 사역의 본거지를 라마에 두었지만 거기에 안주하지 않았다. 벧엘, 길갈, 미스바와 라마를 오가며 순회 사역에 힘을 쏟았다. 그의 순회 사역은 기도로 다스리고 기도로 돌보는 일이었다. 그가 스쳐 지나가는 곳마다 죽었던 영혼들이 소생하고 견고했던 사탄의 진영들은 하나둘 무너지기 시작했다. 문제는 해결되고 어둠은 걷히고 막힌 곳은 뚫리고 닫힌 곳은 열리고 터진 곳은 보수되었다. 천상에서는 축제의 연속이었지만 지옥은 비탄과 슬픔의 날이 한동안 지속되었다. 기도의 용장 사무엘은 사탄의 노략으로부터 하나님의 백성을 지키는 방패막이였다. 사무엘은 기도자의 한 모본을 우리에게 제시한다. 그에게는 삶과 죽음의 경계는 있어도 기도의 경계선이 없었다. 그는 기도로 하늘과 땅, 현세와 내세를 종횡무진 누비며 영계의 큰 별로 자리매김했다. 그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위대한 기도자의 반열에 든다. 노아, 다니엘, 욥과 더불어 모세와 사무엘은 하나님이 인정하신 기도의 사람이었다.

불모의 돌산을 옥토로 개간하는 사무엘의 기도

그는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기도하는 것을 본업으로 삼았다. 그는 이 본업 외에 그 어떤 부업도 갖지 않았다. 본업에 매진하기에도 그의 일생은 짧았고 하루 24시간을 모조리 중보로 메워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그는 중단 없는 기도로 해맞이, 달맞이를 반복했고 분초를 다투며 중보의 삶을 엮어갔다. 사무엘은 아이 적부터 성소에서 기도 훈련을 익혔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기도의 향불 사이에서 자라났다. 이 사무엘로 인해 성소의 등불은 꺼지지 않았다. 깨어 부르짖어야 할 엘리가 자기 집에 누워 있을 때 자기 침상에서 쉬워야 할 아이 사무엘은 성소에서 깨어 기도드렸다. 이런 모습으로 소년 사무엘이 지켜간 기도의 등불 하나가 온 이스라엘의 어두움을 밝히고도 남을 빛을 뿌렸으니 하나님이 세우신 중보자 한 사람의 영향력은 실로 대단하다 할 것이다.

백성의 사사와 선지자로 나서면서부터 사무엘은 이전에 해왔던 대로 중보의 무릎을 꿇었다. 완악한 그 백성을 위해 가파른 중보의 돌밭을 일궈나갔다. 거드는 이가 없었지만 홀로 불모의 돌산을 깨뜨려 옥토로 개간하는 중보의 비탈길에 섰다. 그의 깃발 아래 모인 선지자의 생도들이 희망이라면 작은 희망이었다. 사무엘에게 있어 중보란 쉴 수 없는 호흡과도 같았다. 씻어낼 수 없는 표범의 반점 같은 것이었다. 부르지 않을 수 없는 노래 같은 것이었다. 외치지 않을 수 없는 구호 같은 것이었다. 사무엘은 중보의 삶을 멈추지 않았다. 길 없는 길에 길을 만들어가며 중보의 지경을 한없이 넓혀갔다.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하지 아니 하고 선하고 의로운 길을 너희에게 가르칠 것인즉.”

기도를 위해 태어난 사람 사무엘

그가 생존한 동안에 하나님은 사무엘의 기도 까닭에 지도자들에게 긍휼을 베푸셨다. 자기 백성을 돌아보셨다. 원수의 세력을 저지하시고 자기 백성을 지키셨다. 사탄이 사울을 조정하고 악령들이 그의 악행을 부추겼지만 그럴수록 사무엘의 중보는 더욱 강화되었다. 백성을 위한 사무엘의 부르짖음은 평생에 걸쳐 호흡한 들숨과 날숨이었다. 사울을 위해 온 밤을 새웠던 그의 슬픔은 긍휼에서 비롯된 마음 찢어짐이었다. 죽기까지 대면을 거부했던 그의 칩거는 기도의 사람이 보인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그는 엎드려 있음으로 아름다운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다. 엘리사가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이었듯이 사무엘 역시 이스라엘의 방패였다. 그의 중보기도는 통일 이스라엘의 간성이 되었고 법궤와 함께 승리의 깃발을 펄럭이게 했다. 모세처럼 그의 곁에 아론과 훌 같은 이가 없었지만 사무엘은 기도의 팔을 내리지 않았다.

사무엘은 기도를 위해 태어난 사람이었다. 어렵고 힘들게 태어난 그였기에, 서원의 열매로 얻은 아들이었기에, 어미 품이 아닌 성소에서 자라나야 했다. 태아 적부터 유년기에 이르기까지, 마지막 사사요 첫 선지자로 세움 받기까지 사무엘은 기도의 테두리를 벗어난 적이 없었다. 사무엘의 중보 사역은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 정신적이며 영적 초석을 세움에 있어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다윗 왕국이 세워질 수 있는 근간을 제공했다. 그는 여호와의 이름을 불러 응답을 얻어낸 간구의 사람이었다. 시편 기자의 묘사는 정확하고 은혜롭다. “그의 제사장들 중에는 모세와 아론이 있고 그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 중에는 사무엘이 있도다. 그들이 여호와께 간구하매 응답하셨도다.”(시 99:6) 오, 아름다운 기도의 사람 사무엘이여!

기도의 밀도를 높이는 사무엘의 믿음

파란 신호등이 고장 나고 빨간 신호등의 불빛만이 반짝일 때 파란 빛을 보면서 기도드릴 수 있는가? 빛이 전혀 없는 캄캄한 흑암 속에서 오로지 기도에 몰입함으로 작은 빛을 만들어가며 기도의 등불을 밝힐 수 있는가? 전대미문의 팬데믹 상황에서 흔들리지 않는 경외심으로 주님을 앙망하며 영화로우신 그분의 이름을 찬양드릴 수 있는가? 우리가 확신의 기도를 드려야 하는 것은 그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때문이다. 믿음이 없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방법은 없다. 능치 못할 것이 하나도 없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듣고 응답하시겠다며 수없이 약속하셨는데 그 말씀을 믿지 않고 기도한다면 우리의 불신이 하나님의 능력을 무기력하게 만드는 것이다. 주님의 약속은 해가 동쪽에서 뜨는 것 이상으로 확실하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요 16:23) 사무엘은 아버지께 제대로 구했기에 간구하는 바를 응답받았다.

어디 사무엘만이겠는가! 믿음의 기도가 믿는 사람의 기도라면 모든 믿는 자들에게 적용되어야 한다. 그러나 여기에서의 믿음이란 단순한 믿음이 아니라 ‘그득한 확신’(full assurance)을 일컫는다. 의심이 제거된 순수한 믿음에서 드리는 것이 확신의 기도다. 확신은 우리의 마음에서 의심이나 불신의 불순물이 완전히 제거된 순백한 상태의 믿음이다. 투명한 영혼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거리끼는 것이 없으니 확신 속에 기도드릴 수 있다. 기도가 확신 속에 이루어지면 응답은 필수적이다. 응답은 확신과 함께 단단히 동여매어 있다. 우리의 믿음이 모양에 걸맞은 위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은 확신이 그득하지 못해 밀도가 떨어지기 때문이다. ‘기도의 밀도’(the density of prayer)를 높이려면 지금까지 거론된 엘리야, 바울, 주님, 사무엘, 그리고 다음 주에 다룰 모세까지 연결된 엘바주사모에서 공통된 핵심을 살피는 일이다. 다섯 분의 차이는 여러 면에서 드러나지만 어느 방향에서 바라보아도 한 점으로 수렴되는 공통분모가 있으니 그것이 바로 기도의 강력한 밀도이다.

가장 위대한 확신은 하나님의 침묵 속에서 진행된다. 예전에 우리의 기도를 듣기 즐거워하시던 하나님께서 일체의 반응도 없이 꼭꼭 숨어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들 때 하나님을 더 없이 신뢰하는 것이다. 그 많은 기도가 헛되게 느껴지고 주변 상황이 최악으로 치닫는 때 기도의 목소리를 더욱 키우는 것이다. 사무엘의 기도를 배우는 이 시대의 메신저라면 자기에게 속한 기도의 샘을 더 깊이 파면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기쁨으로 묵상해야만 한다. 확신만이 의심을 죽인다. 우리가 사무엘의 생애를 통해 이 모습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아무 유익이 없다. 사무엘의 기도 학습은 실제적이어야 한다. 그러려면 지금 우리에게 익숙한 기도의 방식과 영적 체질을 갈아엎어야 한다. 체질과 영적 관습으로 굳어버린 온갖 영적 체제를 부숴버리는 것이다. 이것이 기도의 체질 개선 곧 “묵은 땅을 기경(起耕)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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