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보자이신 주님을 따르는 중보기도자들

  • 입력 2021.02.02 12:40
  • 수정 2021.02.03 0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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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사역자에게 고하는 말씀 (36)

한명철 목사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은혜와 평강교회를 담임하며 30권의 저술과 글쓰기를 통해 복음 사역에 애쓰는 목회자다.
한명철 목사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은혜와 평강교회를 담임하며 30권의 저술과 글쓰기를 통해 복음 사역에 애쓰는 목회자다.

중보자이신 주님의 포기하지 않는 사랑

모든 메신저가 본받아야 할 기도의 모본자 “주님.” 자기 땅에 찾아오신 주님은 자기 백성들을 사랑으로 부르셨다. 철모르는 아이들처럼 위태한 삶을 고집하는 그들을 향해 주님은 두 팔을 벌리셨다. 그러나 안겼다 싶으면 이내 그 품속을 뛰쳐나가버리는 그들이었다. 주님은 포기함 없이 줄기차게 자기 백성들을 감싸 안으셨다. 쫓고 쫓기는 사랑의 추격전에서 분노와 배신감에 지칠 법도 했지만 주님은 끝까지 신실하셨다. 그들의 고집과 등 돌림은 오히려 주님으로 하여금 더 많은 중보의 눈물을 흘리게 했다. 그들의 외면은 완강했고 완고함의 행렬은 길고 질겼다.

어미의 포근한 품을 거절하는 철부지 병아리 떼처럼 사람들은 주님의 사랑을 거부했다. 공중에는 어린 병아리를 낚아채려는 수리들이 원을 그리며 닭장 주위를 쏘아보고 있었다. 어미닭은 병아리를 품에 안고자 그들 뒤를 계속 쫓았다. 주님은 어미닭처럼 반역하는 자기 백성을 사하시며 기도로 품고 사랑으로 감싸려 애썼지만 소용없었다. 가시와 담으로 막기도 하고 거친 들에서 수백 번을 타이르고 얼르며 달랬지만 배신으로 천 겹 만 겹을 둘러싼 고집스런 인간의 영혼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성경 역사는 도주하는 인간의 뒤를 추적하는 하나님의 줄기찬 사랑과 그 사랑에서 피하여 숨으려는 인간의 무지한 숨바꼭질 같은 것이었다. 하나님도 포기치 않으셨지만 인간 역시 거부의 몸짓을 그치지 않았다. 그 거부의 끝에 바로 십자가 형틀이 세워졌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 되신 주님은 이미 성육신 이전에도 패역한 자기 백성을 몇 번이고 품에 안으려 하셨다. 그러나 그들은 원치 않았다. 주님도 그들의 무관심을 이미 아셨다. 그토록 오랜 세월에 걸쳐 선지자들을 무수히 파송했지만 거절을 일삼던 그들이 아니었던가! 포도원 주인이 파송한 종들을 그들은 심히 때리고 머리에 상처 내고 능욕하고 죽였다. 배척을 일삼는 그들에게 농장주는 마지막으로 자신의 외아들을 보내셨다. 농부들은 주인의 아들까지 죽여 포도원 밖에 내버렸다. 피조물이 창조주를 참살하고 영광의 주님을 오욕의 구렁텅이에 내동댕이친 무지한 인간의 파행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주님은 자기 땅에 찾아오셨으나 외계인 취급을 당했고 주인의 아들이었음에도 종들에게 맞고 상하여 버림당하셨다. 늦은 밤 신부의 처소를 찾아와 문 열어주기를 간곡히 호소했지만 침대에 누운 신부는 신랑의 소리를 묵살했다. 사랑한다 하면서 정작 사랑의 목소리에 귀를 틀어막고 그립다 애원하면서도 찾아온 주님을 매몰차게 외면했다. 유년 기사를 제외하고는 공생애에 들어가시기 직전까지의 주님 생애가 복음서에는 누락되어 있다. 그럼에도 갑자기 광야로 들어가서 40일 금식기도를 수행하신 주님의 모습은 왠지 낯설지 않다. 침묵 속의 청소년기를 주님이 기도와 말씀 위주로 사셨을 것임은 충분히 추정할 수 있는 일이다.

배역의 길을 걷는 자들을 위한 중보의 무릎

겟세마네 동산은 주님께서 습관적으로 찾으시는 기도처였다. 새벽마다 찬 이슬을 맞아가며 엎드렸던 기도처도 여러 곳이나 되었다. 기도의 동산에 올라 불 꺼진 예루살렘을 내려다보시면서 주님은 자주 오열하셨다. 예레미야가 흘린 눈물의 기도를 들으셨던 바로 그 주님이 예루살렘을 위해 울며 기도하셨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주님은 사랑으로 그들을 쫓고 그 백성은 완고함으로 주님의 사랑을 피해 도주했다. 때로는 가시와 담으로 막기도 하고 거친 들에서 타이르기도 하셨다. 주님은 배역의 길을 고집하는 사람들을 위해 중보의 무릎을 꿇으셨다. 주님은 살아서도 중보의 무릎을 꿇으셨고 죽어서도 중보의 사역을 감당하신다. 영광을 받으신 이후에도 주님은 여전히 중보자의 자리를 지키고 계신다.

주님을 위한 영광의 보좌는 아버지 우편에 마련되었지만 자기 백성을 위한 중보 사역 때문에 주님은 보좌 옆에 내려 앉으셨다.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아버지의 보좌 앞에 우리의 중보자로 내려앉으신 주님이 우리를 위해 기도드리신다. 영광의 주님께서 수욕의 십자가를 지신 것만도 황망한 일인데 영광의 보좌 우편에서 그토록 오랜 세월 무릎 꿇어 오셨으니 종 된 우리는 다만 유구무언이다. 그 누구를 위한 무릎 꿇음이 아니라 바로 나를 위한 것임을 알기에 감격 또 감격할 뿐이다.

십자가의 죽음과 중보의 사역

주님은 자신의 십자가 죽음이 지닌 중보적 성격을 알고 계셨다. 중보자 성령이 자기 백성들 속에 거하시려면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역사는 응당 전제되어야 했다. 십자가로 구속을 이루시고 부활로 영광을 받으셔야 주님은 만유의 대주재로서 중보자의 사역을 감당할 수 있었다. 십자가의 죽음이 없으면 성령 강림이나 주님의 보좌 사역은 전연 불가능했기에 인간을 위한 중보 역시 이루어질 수 없었다. 주님은 십자가의 죽음이 얼마나 극심한 고통이며 희생인지 아셨다. 전능자이셨기에 인류 구원을 위한 다른 방도를 능히 찾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애초에 작정하신 대로 십자가의 길에서 돌이키지 않으셨다. 십자가의 죽음을 통한 인류 구속의 방도가 하나님의 뜻임을 아셨기에 자신의 의지를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복종시켰던 것이다.

그 쉽지 않은 길의 끝자락을 아셨지만 주님은 포기치 않으셨다. 배역한 인간을 향하신 주님의 사랑은 배역한 고멜을 다시 찾는 호세아의 아픈 사랑보다 더 뼈에 사무치게 각인된 끈질긴 사랑이었다. 주님이 포기하시면 그것으로 모든 것은 끝이었다. 그래서 주님은 기도하고 또 기도하셨다. 울고 또 우셨다. 주님의 애절한 통곡은 인류 구속이라는 중보의 성격으로 인해 한없이 그 깊이를 더했다. 복음서에는 주님의 애절한 기도를 몇 군데 소개하고 있지만 히브리서 기자의 묘사만큼 사실적인 것도 없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중보자이신 주님을 따르는 중보기도자들

주님은 기도를 통해 완전한 순종을 배우셨다. 그 순종이 십자가의 구속 사역을 완성시켰다. 주님은 중보자로서 보여주신 이 끈질긴 간구로 인해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별다른 대제사장이 되셨다. 자신을 위한 속죄가 필요치 않은 그분만이 우리의 영원한 속죄를 담당하실 수 있듯이 자신을 위해 아무런 기도도 드릴 필요가 없는 무흠하신 주님만이 우리를 위해 중보하실 수 있다. 십자가에서의 구속 사역은 끝났어도 보좌 우편에서의 중보 사역은 지금도 지속된다. 우리의 완전한 구원을 위해 주님의 중보 사역은 영광의 그날까지 계속될 것이다. 그를 믿는 자들이 구원받을 수 있는 근거도 중보자이신 주님께서 지금도 계속하시는 기도 사역에 있다. 이 땅의 모든 중보기도자들이 이 귀중한 사역을 계속할 수 있는 근거는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의 중보와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서 드리는 주님의 중보에 있다. 중보자를 모신 성도가 중보를 외면한다면 그날에 이르러 중보자이신 주님으로부터 임할 책망을 어찌 피할 것인가?

주님은 참되고 유일하신 중보자이시다. 영광 받으신 후 하늘 보좌에서 중보의 사역을 계속하시는 주님은 지상에 계실 때 중보자의 모습을 보여주셨다. 요 17장은 중보기도자로서의 주님의 기도 모습과 중보의 내용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요 17:15) 주님은 비교적 긴 중보기도에서 “내가 비옵는 것은”이란 표현을 세 번이나 사용하셨다. 중보기도의 핵심적 내용은 아버지께 소유됨, 악에서의 보전 그리고 상호일치를 통한 세상 사람의 구원이었다. 주님의 중보기도는 당시의 제자들만이 아니라 그들을 통해 주님을 영접하게 될 모든 성도들을 위한 기도였다. 시대를 뛰어넘어 어떡하든지 사람들을 믿게 함으로 구원에 이르게 하려는 주님의 영혼사랑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보좌에서 드리시는 중보는 우리의 변호를 위함이다. 우리가 범죄하고 말씀을 어길 때마다 사탄은 보란 듯이 정죄의 화살을 쏘아댈 것이다. 하늘 법정에서 피고의 영혼을 두고 대제사장 여호수아를 대적하듯이 허물과 죄의 목록을 나열할 때에 주님은 자신의 손과 발과 옆구리의 상처를 보이시며 대속의 사랑을 증언하실 것이다. 이것이 중보다. 주님이 수행하셨던 지상에서의 중보사역과 천상에서 지금도 진행 중인 중보사역은 모든 중보기도자들에게 영감을 준다. 진정한 중보자는 중보의 호흡을 시작하고 난 이후부터 줄곧 중보의 숨을 쉬어야 하고 숨 떨어지는 마지막 순간까지 중보의 호흡을 이어가야 한다. 기도를 쉬지 말아야 하면 중보의 끝도 없다. 경험상 중보는 시작만 있지 끝은 없다. 주님이 진정 내 속게 영으로 실재하신다면 우리는 주님의 중보로 인한 탄식을 어느 정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성령의 신음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아니라면 우리의 중보기도는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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