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사역자에게 고하는 말씀 (33)

한명철 목사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은혜와 평강교회를 담임하며 30권의 저술과 글쓰기를 통해 복음 사역에 애쓰는 목회자다.
한명철 목사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은혜와 평강교회를 담임하며 30권의 저술과 글쓰기를 통해 복음 사역에 애쓰는 목회자다.

불가능이란 언어 자체를 불능화(不能化)시키는 기도

기도는 하나님으로 하여금 부동의 사람을 움직이게 만든다. 산을 움직이는 것이 기도이듯, 태양과 달의 운행을 멈추게 하는 것이 기도이듯, 능력의 기도는 모든 움직이지 않았던 것들에서 부동의 요소들을 순식간에 제거하여 움직이도록 만든다. 어떤 있음에서 다른 있음으로 변화시키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무에서 유를 만들어낸다. 기도로 불가능한 것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 기도는 불가능이란 언어 자체를 불능화(不能化) 시킨다. 기도가 모든 것을 바꾸어버린다. 말씀이 칼이라면 기도는 활이다. 말씀은 하나님께 합당한 영광을, 마귀를 찌르고 베며, 문제를 사라지게 만든다. 기도는 하나님을 향해 도움의 화살을, 마귀를 향해 능력의 불화살을, 문제를 향해서는 해답의 화살을 쏜다. 모든 경우에 자유자재로 칼을 휘두르는 것이 말씀의 능력이요, 모든 상황에 모든 화살을 쉴 새 없이 날릴 수 있는 것이 기도의 힘이다.

기도는 인간을 변화시킨다. 변화의 의지만으로는 부족하다. 어떤 것은 변화하지만 대부분 변화시키지 못한다. 기도는 변화되지 않던 모든 것들을 변화시키게 만든다. 기도만이 변화의 능력이다.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곧 마귀의 자식에서 하나님의 아들로 한 인간의 삶에서 전적인 변화를 일으킨다. 삶의 여러 상황을 변화시키는 것보다 더 본질적이며 중요한 변화는 존재의 변화다. 인간이 바뀐다 함은 그의 마음과 생각에 일대 변혁을 일으킬 만큼 영혼 자체가 변화되었음을 일컫는다. 야곱을 이스라엘로 변화시킨 것은 그의 생사를 건 기도였다. 천사와의 씨름은 그의 기도가 얼마나 투쟁적이었음을 보여준다. 기도함으로 그에게 남겨진 것은 육체적인 불편함이었지만 그 순간부터 그의 영적 생애는 시온의 대로를 걷게 되었다. 저는 다리로 뛰다시피 걸었다. 기도의 엎드림이 그에게 삶을 질주하는 파워를 기르게 했다.

그리스도를 위한 영광의 상흔(傷痕)이 있는 기도자

야곱이 이스라엘로 변하자 철천지원수의 얼굴을 맞이할 그 땅도 하나님의 얼굴 브니엘로 바뀌었다. 에서를 향해 외친 야곱의 고백을 단지 살아남기 위한 면피용 아첨으로 몰아세우는 것은 정당치 못하다. 그의 지난 행적을 보면 충분히 그리 생각할 수도 있지만 지난밤에 야곱은 그 누구도 경험치 못한 일생일대의 영적 변화를 겪었다. 얍복 나루터의 생생한 난투 끝에 살아남을 뿐 아니라 천사와 겨루어 이긴 야곱은 분명 영적 경험을 통해 전인적 변화를 이루었고 그런 그에게 원수의 칼날도 두려워하지 않을 담력이 솟아났을 것은 당연지사다. 모세가 하나님의 영광을 접한 후에 얼굴에 광채가 났듯, 생사가 오갔던 그 땅을 “하나님의 얼굴”(브니엘)로 바라본 야곱의 눈에는 에서의 칼날보다 뚜렷한 하나님의 형상이 보였다. 하나님은 그런 그를 통해 약속의 씨앗 70인을 번성의 모판인 애굽 땅 고센으로 이주시켰다. 분명히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번성할 후손의 파종을 목도한 뒤에야 그는 열조의 하나님께로 돌아갔다.

얍복 나루터의 경험은 B.C와 A.D만큼 야곱과 이스라엘의 차이점을 보여준다. 그 둘의 분기점에 소위 상흔(傷痕)이 있다. 하나님 앞에 엎드려 몸부림친 영광의 생채기다. 엎드리는 삶은 꽃길에 드러누움이 아니다. 거친 가시밭길에 엎뎌 뾰족한 가시에 이리 저리 찔리면서 내뱉는 기도의 오열이다. 상한 영혼을 주님의 옷자락으로 감싸는 은혜의 상처다. 기도자는 이 흔적을 지닌다. 바울은 자신의 거룩한 흔적에 대해 고백한 적이 있다. “이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기도자에게는 크고 작은 이런 흔적이 아로새겨져 있다. 고통과 무관한 기도란 없다. 모든 기도에는 엎드린 자가 감당해야 할 아픔의 분량이 있다. 이 분량을 채우기까지 모든 메신저는 부과된 고통을 기쁨으로 감수해야 한다. 바울은 이를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해 자신의 육체에 채우는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라 표현했다. 그리스도를 위해, 그리스도를 인해 얻는 흔적이기에 영광의 상흔이라 칭한다.

예수의 흔적이 있는 자를 일어서게 하신다

사람마다 흔적(stigmata)은 다를 수 있다. 성 프랜시스는 오상(五傷)의 흔적을 가졌다. 욥은 고난의 깊은 상흔을 지녔다. 다윗은 뼈아픈 회개의 흔적을 지녔다. 에스겔도, 호세아도, 이사야도,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들은 저마다 특기할 만한 흔적을 지녔다. 이 모든 흔적들은 우리 주님의 흔적으로 수렴(收斂)된다. 바울이 말한 “예수의 흔적”이다. 초기의 기독교는 이 흔적을 신비화해서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을 때 양 손과 양 발과 옆구리에 난 다섯 가지 상처로 해석했다. 가톨릭 전통에서는 상흔을 통한 현현의 역사적 사실들을 수백 건 제시한 바 있다. 하지만 ‘흔적’을 너무 신비화하고 가시화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것이 사실이라 해도 그것이 우리를 하나님 앞에 높이 세워주는 것은 아니다. 당사자에게 임한 은혜이기에 감사할 일이지만 이런 신비 경험은 모두에게 적용할 것은 아니다.

바울이 말한 “예수의 흔적”은 보다 일반화하여 해석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그의 사도 된 표식이었다. 복음을 전하다 그가 당한 온갖 핍박을 의미한다. 물론 육체적으로 가해진 몹쓸 형벌들로 인해 생긴 흔적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실제로 거의 죽을 뻔 했던 경험이 그에게 어떤 가시적인 상처를 남겼을 수도 있다. 예수의 흔적은 거룩한 낙인이요 그리스도에게 철저히 소유됨의 표시며 지울 수 없는 천상의 불도장이었다. 지금도 지독한 박해가 가해지는 곳에서는 단지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신체의 일부를 상하거나 죽음도 불사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고난을 겪어야 했던 누군가의 삶과 더불어 그런 상처는 분명 예수를 위한 흔적이다. 이 글의 논지는 분명하다. 흔적을 남기는 기도의 삶을 통해 엎드렸던 자는 일어서라는 주님의 명령에 주저 없이 일어선다. 기도로 일어설 탄력을 축적해왔기 때문에 부르실 때 용수철처럼 튀어오를 수 있다.

아브라함도 일어섰고 야곱도 일어섰다. 베드로도 일어섰고 바울도 일어섰다. 하나님의 때가 이르자 기도로 숱한 밤을 밝혔던 하나님의 종들을 무릎 꿇은 그 자리에서 하나님이 일으켜 세우셨다. 일어선 그들을 하나님이 사방으로 흩으셨다. 주님의 말씀이 필요한 곳, 주님의 말씀을 기다리던 백성에게 가서 그들로 하여금 담대히 말하게 하셨다. 하나님은 기도로 익은 그들의 심령에 말씀을 심어주셨다. 그들은 자신들의 마음에 담긴 빛의 크기만큼 하나님을 보여주었다. 자신들이 받은 말씀의 분량만큼 하나님의 뜻을 전했다. 그들은 혼자여도 혼자가 아니었다. 전능의 하나님이 그들 곁에 늘 계셨다. 세상이 그들을 외면해도 하나님이 늘 동행하셨다. 기도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한 그들이었기에 말씀 사역 속에서 하나님의 동일한 임재를 느꼈다.

기도에 전력한 모본(模本), 엘바주사모

옳다. 말씀을 사이에 두고 그 앞뒤에 기도가 있다. 기도가 말씀을 사모케 만들고 기도가 말씀을 받게 한다. 기도가 말씀을 깨닫게 하고 기도가 말씀을 외치게 만든다. 성경에는 기도의 본을 보일만한 사람들이 참으로 많다. 그 중에서 무릎 꿇어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몇 사람에 초점을 맞추려 한다. 말씀사역자로서 그들만큼 기도의 사역에 전심전력한 이들도 드물다. 기독교 역사를 통틀어서도 그들에 필적할 만한 기도자들은 흔치 않다. 기도의 삶에서 진정한 모본을 보인 이들을 통해 기도자의 자세와 기도의 본질을 배워 행함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다섯 명을 추렸다. 엘리야, 바울, 주님, 사무엘, 모세가 바로 그들이다. 앞 글자를 따면 엘바주사모가 되는데 엘바(섬에 귀양 간 나폴레옹이) 주(님을) 사모(했다)고 문장화시키면 오래 기억에 남겨 묵상하기에 이롭다.

당신이 믿음 안에서 거두었던 승리의 첫 함성을 아직도 기억하는가? 당신이 마지막으로 거둔 승리가 언제쯤인지 혹 기억하고 있는가? 영적 전쟁의 현장에서 죽다 살아나기를 반복하면서 당신은 승리에 목말라한다. 당신이 거둔 승리의 목록을 들여다보면 당신 스스로 거둔 승리는 보이지 않는다. 아무리 작은 규모의 전투였어도 생사의 갈림길에서 당신을 고지에 우뚝 서게 하신 분은 주님이셨다. 주님이 주셨기에 승리는 항상 당신의 것이었다. 강적과의 승산 없는 싸움에서 늘 기도로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은 신묘막측하다. 당신은 오늘도 승리의 행군을 한다. 기도의 엎드림이 있기에 그같이 확신한다. 기도의 용사, 기도의 모본자, 그들의 엎드린 모습에 당신의 기도하는 삶, 그 한 컷이라도 새겨지기를 원한다. 그렇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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