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사역자에게 고하는 말씀 (32)

한명철 목사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은혜와 평강교회를 담임하며 30권의 저술과 글쓰기를 통해 복음 사역에 애쓰는 목회자다.
한명철 목사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은혜와 평강교회를 담임하며 30권의 저술과 글쓰기를 통해 복음 사역에 애쓰는 목회자다.

넘어진 자리에서 엎드려 기도한 야곱

일어섬보다 중요한 것이 엎드림이다. 달리 말하면 일어서기 위해 엎드려야 한다는 점이다. 물론 그냥 엎드림이 아니라 기도의 엎드림을 뜻한다. 하나님의 권능에 압도당한 영혼은 존재와 의지 자체가 하나님의 사랑에 함몰되기에 온전히 죽은 자아의 모습으로 복종의 부복을 한다. 기도의 무릎은 복종의 순도만큼 강해진다.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20년 종살이를 하면서 술수로 빼앗고 누리던 야곱은 철저히 유린당했다. 라반의 속임과 간계는 야곱보다 지독했다. 속이는 자는 더 큰 속임에 넘어지고 술수에 능하면 더 나은 술수에 걸려듦을 야곱은 인생의 위기에서 뼈저리게 겪었다. 그가 자신보다 한 수 위인 라반의 올가미에서 벗어날 수 있었음은 그나마 벧엘에서 자신을 만나주셨던 전능의 하나님께 무릎 꿇음 덕분이었다. 기도가 없었다면 야곱은 밧단아람의 쇠창살 같은 사지에서 벗어나기 힘들었을 것이다. 하나님 없이 사람을 넘어뜨리기에 능했던 야곱이 인생의 황금기를 온통 속아 살아야 했을 때 그를 지켜준 것은 그래도 기도의 무릎이었다.

넘어진 자리에서 야곱은 라반과 겨루어 이기려 하지 않았다. 대신에 엎드려 자식의 억울함을 하나님께 고하는 자가 되었다. 억울하고 분노가 치솟을 때마다 그는 엎드렸다. 조부와 부친의 삶을 통해 그나마 배우고 익혔던 기도생활이 그를 엎드리게 만들었다. 야곱은 엎드렸기에 일어날 수 있었다. 어느 날 한밤중에 하늘의 씨름꾼이 얍복 나루터에 엎드린 자를 찾아왔다. 천사가 싸움을 걸었으나 집요한 야곱을 꺾지 못했다. 황송스럽게도 야곱은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최초의 인간이 되었다. 무엇이 하나님을 이기게 만들었는가? 기도다. 오직 기도만이 이길 수 없는 하나님을 이기게 만든다. 기도가 아니라면 그 어떤 것도 감히 하나님을 이길 수 없다. 하나님은 불패(不敗)의 존재이시기 때문이다. 기도의 엎드림은 하나님과의 단독 면담이다. 독대(獨對)의 영광은 홀로 하나님 앞에 엎드린 자의 것이다. 진실한 눈물과 보배로운 땀방울 속에서 부르짖는 가난한 영혼만이 “하나님의 황태자”라는 새 이름을 가질 수 있다. 뜨겁고 강한 기도가 영광의 말씀을 대하게 하는 열쇠다.

 

넘어져 오열할 것인가? 엎드려 기도할 것인가?

아무리 무겁다한들 기도로 가벼워지지 않을 짐이란 없다. 아무리 어둡다한들 기도로 밝히지 못할 밤이란 없다. 아무리 거칠다한들 기도로 다듬어지지 않을 성격은 없다. 아무리 흉악하다한들 기도로 사함 받지 못할 죄란 없다. 아무리 지독하다한들 기도로 정리되지 않을 혼돈은 없다. 아무리 감춰진 비밀의 말씀이라 해도 기도로 풀리지 않을 계시는 없다. 인생의 어떤 절망과 고통에도 기도가 있는 한 희망의 아지랑이는 피어오른다. 넘어져 오열하는 자와 엎드려 울부짖는 자의 차이는 하늘과 땅의 차이보다 그 간격이 크다. 하나는 넋두리에 불과하지만 다른 하나는 기도자의 눈물을 닦으시며 환한 웃음을 선사하실 하나님께 직고 함이다. 야곱에서 이스라엘로의 변화는 단순한 개명이 아니다. 그것이 이루어지기까지 목숨을 담보로 하고 상처로 얼룩진 한 영혼이 닳아지기까지 구로 한 결과물이었다.

브니엘의 새 아침은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을 받은 자가 맞이하는 시간이다. “하나님의 얼굴”을 본 이스라엘은 에서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모습을 보았다. 우리가 자주 형제와 자매의 얼굴에서 흉한 형상을 보는 것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얼굴을 뵙는 브니엘의 경험이 없어서다. 오히려 자신에게서 증오의 화신인 사탄의 흉상을 보았기에 어제 사랑의 대상으로 보았던 상대를 오늘은 다르게 본다. 왜일까? 누구나 자신이 본 시선의 힘을 따라 상대를 보기 때문이다. 야곱이 바라본 하나님의 얼굴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기도자가 본 말씀의 영광이 일그러진 원수를 부둥켜안고 함께 눈물짓는 형제로 변화시켰다. 원수의 사슬을 녹여 형제 됨의 반지를 만들어 상대의 손가락에 끼우려면 누구든 야곱이 기도의 무릎으로 천사와 싸워 이긴 자가 되어 새롭게 맞이했던 그 아침의 브니엘을 경험해야 한다. 하나님의 얼굴을 본 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자다. 그 능력만이 이리와 이리, 전갈과 전갈이 되어 싸우는 인류를 화해시킬 수 있다. 증오는 형제(brother) 됨의 다리를 부숴(broken, br이 깨져버림) 타인(other)으로 여기게 만들지만 브니엘의 햇살을 쬔 자는 타인과 타인 사이에 가교(bridge, br이 연결됨)를 놓아 형제(br-other)로 변화시킨다.

 

엎드려 기도하는 자와 하늘의 줄기찬 위로

사람들은 영광의 뜀박질을 좋아한다. 걷기도 전에 뛰려 한다. 일어서기도 전에 걸으려 한다. 엎드리지도 않고 일어서려 한다. 엎드림이 없이 걷거나 뛰는 사람은 쉬 지친다. 약속의 성취는 금세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천리를 행군하려면 십리 길부터 주파해야 한다. 정금이 되려면 오랜 시간을 풀무 불에서 담금질해야 한다. 열매는 파종에서부터 수확기를 반드시 거친다. 기도는 기다란 기다림이다. 노다지의 금맥을 쫓는 광부에게는 열정이 있다. 지하 수 백 미터의 갱도 속에서 먼지와 찜통더위를 견디며 단단한 암벽에 수도 없이 곡괭이질 하거나 착암기로 천공(穿孔) 작업함을 단지 황금에 대한 욕심 때문이라 단정 짓기는 어렵다. 광부의 열정은 씨를 뿌려 열매를 기대하는 농부의 부지런에 버금간다. 금맥 찾기나 수확의 꿈은 한결같이 기다림을 전제로 한다.

위로부터의 응답은 기도자의 인내를 요구한다. 타는 목마름으로 긴긴 세월을 기다려야 한다. 참고 견디며 기도하는 힘으로 엎드려 기다리는 자를 하늘의 하나님이 줄기차게 위로하신다. 야고보 사도는 “길이 참음”을 세 번씩이나 강조하면서 이 기다림을 기도와 연결시켰다. 기다림의 모델로 욥을 인용하기까지 했다. 욥은 기막힌 상황에서 전혀 굴하지 않고 기도로 자신의 순전함을 지켜간 강인한 영혼이었다. 그는 숨이 막히는 절대 절망의 심연을 건너뛰면서 생명의 호흡을 이어갔다. 기도는 숨결과 같다. 심장의 박동이 멈추면 죽는다. 기도하는 한 영혼의 심장은 멈추지 않는다. 기도는 해갈용 생수와 같다. 엎드려 무릎 꿇은 자리마다 생기를 북돋우는 영혼의 샘이 솟구친다. 부르짖는 한 영혼은 목마른 법이 없다. 영혼의 목마름을 호소하는 만큼 샘물은 마름 없이 솟아난다.

 

쉬지 않고 지속해야 할 평생의 과업, 기도

기도는 하면 할수록 인간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절감케 한다. 그래서 하나님을 더욱 의지케 만든다. 한두 시간이 아니라 매일을, 한두 달이 아니라 매년을, 한두 해가 아니라 평생을 하나님만 의지케 만든다. 연약한 인간이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은 당연지사다. 가장 활력 넘치는 의지의 형태가 바로 기도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만큼 기도자의 영혼은 강하다. 담벼락에 찰싹 달라붙은 넝쿨처럼 기도로 하나님께 연결된 자의 영혼은 세차다. 얇은 종이는 약한 바람에도 날아가 버리지만 담벼락에 붙은 종이는 강풍에도 끄떡없다. 응당 기도는 쉬지 않고 지속해야 할 평생 과업이다. 기도 쉬는 것을 죄로 단정했던 사무엘의 옹골찬 기상이 사뭇 영혼의 망막에 어른거린다.

기도는 인간의 연약함이라는 무쇠덩이를 갈아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바늘을 만드는 작업과 흡사하다. 기도는 인간의 부족함이라는 암벽을 뚫어 하나님의 충만이라는 대로를 내는 것과 같다. 기도는 불가능의 험산을 뚫어 소통의 길을 마련하는 것과 비슷하다. 기도는 광부의 금맥 찾기요 농부의 수확에 대한 줄기찬 기대며 목적지를 향한 마부의 무한 질주다. 기도함으로 인간의 영성은 빛을 발하고 기도 속에서 그 영성은 한없이 고양되어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에 참여케 된다. 인간의 영혼은 기도의 깊이만큼 신성(divinity)에 가깝다. 소위 중세를 전후하여 성인의 반열에 거론되었던 이들의 공통점은 그들이 기도에 남달랐다는 사실이다. 신격화된 성인(saint)보다 하나님이 칭해주신 성도(saints)가 더욱 영광스럽고 안전하다. 개인으로서의 성인 되기를 거부하고 공동체의 일원으로 성도됨을 기뻐하는 것이 우리의 특권이다.

기도자는 하나님의 영광이다. 기도하는 사람에게 내면의 영기(靈氣, aura)가 뻗쳐나고 기도하는 사람의 삶에 천상의 극광(極光, aurora)이 화려한 춤을 선사한다. 기도의 깊이는 하나님과의 거리를 그만큼 좁힌다. 기도자의 겨드랑이에는 날개가 돋는다. 기도하는 영혼에 돋아나는 날개의 길이는 야곱이 꿈에서 보았던 사닥다리처럼 땅과 하늘을 이어준다. 중보기도자는 천국의 대들보다. 하나님의 비밀 병기다. 지상 교회가 대적자의 온갖 음해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집으로서 제자리를 지킬 수 있음은 주님께서 세계 도처에 심으신 이 비밀 병기 때문이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았던 칠천 인의 은자(隱者)들처럼 지금도 은혜로 택하심을 받은 ‘남은 자’가 이 땅 도처에 숨어 있기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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