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야로 나가 하늘에서 임하는 말씀을 기다리라

  • 입력 2020.12.15 1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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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사역자에게 고하는 말씀 (26)

한명철 목사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은혜와 평강교회를 담임하며 30권의 저술과 글쓰기를 통해 복음 사역에 애쓰는 목회자다
한명철 목사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은혜와 평강교회를 담임하며 30권의 저술과 글쓰기를 통해 복음 사역에 애쓰는 목회자다

경고와 심판 회복과 소생의 메신저, 에스겔

에스겔이 생각난다. 말씀의 사람 에스겔, 기도의 사람 에스겔, 환상의 사람 에스겔, 메시지에 녹아든 메신저 에스겔, 한 시대를 풍미했던 하나님의 대언자 에스겔이 사무치게 그립다. 오늘 에스겔 선지자가 이다지도 생각남은 웬 일일까? 에스겔은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가 그발 강가의 델아빕에서 살았다. 여호야긴 왕과 귀족들이 잡혀갈 때(주전 598년) 그도 그들 가운데 있었다. 포로 생활이 5년째 접어든 어느 날 선지자로 세움 받은 이후로 23년에 걸쳐 에스겔은 영광스런 말씀의 전령이 되었다. 그의 활동은 환상과 예언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많은 환상 중에 여호와의 말씀이 임했고 예언을 위해 그는 상징적 행동들도 서슴지 않았다. 조국의 멸망을 전후하여 그에게 임한 메시지는 긴박하고 중차대했으니 한편으로는 심판과 파멸의 어두운 메시지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구원과 회복이라는 희망의 메시지였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에스겔의 말씀 사역이 차지하는 비중은 실로 크고 막중하였다.

“하나님이 강하게 하신다,” “하나님이 단련시키신다.”는 이름 뜻처럼 그는 붕괴의 쓰나미를 거치며 누구보다 단단한 영혼의 소유자로 일어섰다. 민족적 배신과 죄의 결과가 주는 엄청난 고통의 무게를 감내하면서 에스겔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경고와 심판의 말씀을 올곧게 전했다. 에스겔서에는 “칼”과 “황폐”란 단어가 각각 89회와 40회 나올 정도로 심판의 이미지가 너무도 선명하고 “온역”과 “기근”이란 표현도 반복되어 사용되었다. 그가 전한 심판의 메시지는 비단 이스라엘 만에 국한되지 않았다. 이웃 나라들에 대한 심판 또한 선포되었다. 에스겔의 사역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예루살렘 성이 함락되어 슬픔 가운데 잠겨 있던 동족을 위로하던 그의 메시지는 이스라엘의 회복과 소생이란 소망의 메시지로 발전해갔다.

말씀을 받고자 어디로든 달려간 메신저

얼어붙은 민족의 가슴마다 말씀의 쟁기로 갈아엎으려던 그의 열정과 신념이 때때로 그를 말씀 사역의 현장에 있게 했다. 나라를 잃은 서글픔보다 하나님을 잃어버린 동족의 영적 참상이 그를 더욱 깊은 슬픔에 잠기게 만들었다. 나라 사랑, 영혼 사랑, 하나님 사랑으로 그의 영혼은 빈 구석이 없었다. 정복자의 땅에서 포로로 살아가는 수치와 고통을 그나마 견딜 수 있게 만든 것은 하나님과의 긴밀한 영적 소통이었다. 수시로 여호와의 신이 말씀의 화염 속에 휩싸인 에스겔에게 임했고 그를 말씀 사역의 현장으로 이끄셨다. 그렇게 그발 강가에서 시작된 에스겔의 사역은 여호와의 전 곳곳을 지나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까지 이어졌다. 여호와의 권능은 그를 강력히 이끌었고 구령열에 붙들린 에스겔은 순종으로 자신의 몸과 마음을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온전히 내맡겼다.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 에스겔은 어디든지 달렸다. 단 한 번도 등을 돌리지 않고 말씀 사역의 현장에 모습을 드러낸 에스겔은 실로 대언자의 참 모본삼기에 충분하였다.

그렇다. 에스겔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자 빈들로 달려갔다. 번잡한 도성과 희생 제물의 연기가 그치지 않는 성전을 떠나 광야로 향했다. “나 제사장 에스겔”이라 할 만큼 제사장으로서의 자의식이 강했던 그는 성전예배를 벗어나 과감히 예언자의 선포 사역에 들어섰다. 아무 것도 없는 그곳, 인적이 끊긴 그곳, 사람이 절망을 선언한 바로 그 자리에 에스겔은 멈추었다. 마른 뼈들이 아무렇게나 버려진 저주의 땅에 홀로 엎드렸다. 도저히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지 않을 것 같은 황량한 처소에 자리를 잡았다. 그것은 에스겔 스스로 선택한 길이 아니었다. 하나님이 에스겔의 발걸음을 깊은 계곡으로 손수 이끄셨다. 거기서 하나님이 없기에 아무 희망도, 생명의 기운도 느낄 수 없는 자기 백성의 실상을 직시했다. 마른 뼈들은 하나님을 버려 하나님께 버림당한 자기 동족에 다름 아니었다. 그것은 또 다른 절망이 있을 수 없는 절망의 끝자락이었다. 언필칭 절대 절망이었다.

말씀 사역의 도약대, 광야

에스겔은 그 캄캄한 어둠의 깊이와 절망의 무게에 압도당해 나직이 엎드렸다. 기도해야 하기에 엎드렸다. 기도할 수밖에 없기에 엎드렸다. 기도할 수조차 없기에 엎드렸다. 기도의 언어마저 파괴된 자리에 남은 것은 가느다란 신음에 섞인 하소연이었다. 몸과 마음은 지칠 대로 지쳐있었고 영혼도 파탄되기 직전이었다. 벼랑 끝에 매달린 자세로 그를 버티게 만든 것은 오직 하나님의 긍휼이었다. 그를 찾으시고 지키시며 감동을 주신 것은 전적으로 그를 향하신 거룩한 사랑이었고 자비였다. 에스겔은 하나님의 자비에 감싸여 엎드려 부르짖고 끝없는 침묵 속에서 한참을 기다렸다. 아무 징조도 없고 음성도 없고 환상도 없었지만 그렇게 할 수밖에 없어 에스겔은 바짝 엎드려 보좌에 계신 그분께로 자신의 지치고 곤한 영혼을 쏟아놓았다. 낮도 밤 같은 어둠의 연속이었고 밤은 또 다른 아침을 맞이할 수 없을 만큼 깊은 흑암의 두께를 더해만 갔다.

이윽고 긴 터널이 끝나고 세상을 뒤덮었던 홍수의 마지막 빗방울도 그쳤다. 에스겔이 감내해야 했던 고통의 끝자락에서 하나님은 영광의 말씀 사역을 위한 도약대를 준비하셨다. 이제 강할 만큼 강해지고 단련될 만큼 단련된 하나님의 대언자 에스겔이 본격적인 메신저로 나서야 할 때가 이른 것이었다. 광야로 이끄심을 거부했거나 중도에 광야를 벗어났다면 하늘로부터의 거룩한 명령은 임하지 않았을 것이다. 에스겔은 끝까지 광야에 남아 땅 끝에서 하늘 중심을 꿰뚫은 자가 되었다. 과연 광야(다바르)는 말씀(다바르)을 받기에 최적의 장소다. 이스라엘 백성이 말씀을 받은 곳도 광야였듯, 광야에 엎딘 에스겔에게 사막에 길을 내게 하는 말씀이 임했다. 고적한 광야의 어둠 속에 엎드려 한 줄기 빛을 기다리던 바로 그 에스겔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치료하는 광선으로 임했다. 그것은 최초의 환상 중에 “일어서라!” 명하시며 순종하여 일어선 에스겔의 입에 임했던 바로 그 권능의 말씀이었다. 다른 것은 메시지의 내용이었다. 그때는 심판의 말씀이었는데 이제는 회복과 부흥의 말씀으로 다가왔다. 반석과 몽둥이로 사용하던 그를 위로자로 삼으셨다.

광야로 나가 하늘에서 임하는 말씀을 기다리라

에스겔은 광야에서 지독한 외로움을 견디며 기도의 깊이를 더해갔다. 광야생활을 시작하기까지 에스겔은 긴박한 말씀 사역에 혼신의 힘을 다하였다. 그발 강가에서 특별한 말씀이 임하고 난 이후로 에스겔은 패역한 백성들을 향해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남김없이 전했다. 찌르는 살 같은 그의 말씀에 백성들은 가시와 찔레, 그리고 전갈이 되어 되받아쳤다. 에스겔은 일체 인간적 반응을 절제하고 하나님의 나팔수가 되어 주어진 가락을 따라 나팔을 사방으로 불어댔다. 그 소리는 즐거움이 사라진 음울한 곡조로 백성들의 영혼을 괴롭혔다.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말씀은 엄중한 책벌로 일관되었기에 그들이 반길 만한 어떤 내용도 없었다. 에스겔로서도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그저 말씀을 주실 뿐 아니라 상징적인 표시로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말로 가득한 두루마리 책을 에스겔의 입에 넣어 먹게 하셨기에 그가 입을 열면 저주로 가득한 심판의 메시지만 흘러나왔다.

오늘의 메신저들은 자칭 하나님의 나팔수이지만 하나님이 주신 곡조를 따라 부르지 않고 하나님이 주신 심판의 원곡을 자신의 취향에 맞춰 편곡해서 분다. 듣고 가슴 쳐야 할 메시지를 주셨는데 사람들은 듣고 오히려 춤을 춘다. 그래서 자신의 메신저들로 인해 하나님께 울분이 생기고 심판도 앞당겨져 세상은 파멸의 내리막길에 들어선다. 세상을 변화시키기는커녕 스스로 개혁을 이루지 못해 이미 자정능력을 잃어버린 오늘의 교회는 에발산에서 외쳐진 저주의 글귀에 ‘아멘’ 할 수밖에 없다. 코로나 사태보다 더욱 엄중한 것은 말씀으로 하나님의 뜻을 구현해야 할 사역자들의 총체적인 무기력증이다. 살았고 운동력 있는 말씀을 수박 겉핥기식으로 핥기만 했으니 활력이 있을 수 없다. 힘도 없고 의지도 없고 생각도 없다.

에스겔을 설명하고 에스겔서의 말씀을 인용하지만 에스겔이 만났던 하나님을 만나려 하지 않고 에스겔이 보았던 환상을 보려 하지 않고 에스겔이 먹었던 두루마리를 먹으려 하지 않는다. 말씀 사역자는 천지가 개벽하는 상황에서도 세상이 어찌될까 걱정하는 대세에 편승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내시는 삶과 사역의 광야로 들어가 하나님 앞에 엎드려 하늘로부터 임할 거룩한 명령을 기다려야 한다. 계속해서 백신이 개발되고 있지만 상황은 더욱 악화일로에 있는데 과연 말씀 사역자의 우선순위는 무엇이어야 할까? 양성/음성 확진이 되고 죽고 사는 일은 솔직히 우리의 의지를 넘어선 일이다. 쏟아지는 재앙의 우박덩이 속에서 성도들이 구원의 확신을 갖고 천국/지옥의 현실에 마주할 수 있도록 준비시켜야 한다. 이를 위해 하늘로부터 임하는 거룩한 명령을 기다리는 일이 급선무요 그것이 죽기 전에 우리가 붙들어야 할 시대적 메시지가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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