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르치는 즐거움보다 더한 배우는 즐거움
가르치기를 잘하는 자들은 존경받아 마땅하다. 가르침은 특권이며 가르치는 과정에서 얻는 희열도 대단하다. 전문적인 교사는 아니어도 간혹 신학교에서 혹은 전문인들을 상대로 특별한 주제로 가르칠 수 있었음은 놀라운 경험이었다. 행복의 여운이 여태껏 지속되니 말이다. 지금도 신학교에서 교수로 가르치는 친구와 후배 교수들을 흠모하며 존경한다. 전문적인 교사는 되지 못했어도 난 스스로를 전문 학도라 여긴다. 배우는 것이 즐겁고 배우는 일에는 웬만큼 도를 통했다. “배우고 때때로 그것을 익히니 즐겁지 아니한가!”(學而時習之 不亦說乎). 공자는 위대한 스승이기에 앞서 위대한 학도였다. 우주라는 광막한 배움의 전당에서 그는 스스로 배워 익혔다. 배움과 익힘이라는 학습 원리를 어쩌면 이리도 적절하게 표현했는지 두고두고 음미해도 더 나은 표현은 없을 성싶다.
나는 가르치기를 즐거워하듯 배우기를 사랑한다. 내용물과 함께 목소리와 몸동작으로 회중에게 다가가는 일상만이 아니라 오감을 총동원해서 무언가 배우는 또 하나의 일상을 더욱 기뻐한다. 배우는 자는 늘 낮은 곳에 몸을 웅크리기에 위에서 흘러내리는 물줄기에 하등 거부감이 없다. 배우고(學) 익히는(習) 과정에서 얻는 끝없는 즐거움(極樂)은 두말할나위 없다. 떨어지는 낙숫물에 깨어지는 것은 단단한 바위다. 부단히 배움의 자리를 지키면 아무리 둔한 자라 해도 각성의 짜릿함을 누린다. 인생의 황혼기라 해서 배움과 상관없다는 식으로 생각함은 청옥 같은 세월을 낭비함이다. 현역에서 물러났기에,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기에, 배우고 익힘이 한창 때와 다르기 때문에, 그럴듯한 이유를 내세워 배우려는 뜻을 가볍게 여기지 말아야 한다.
선지선각자(先知先覺者)의 반열에 서야 할 설교자
이런 배경에서 배우기를 꺼려하는 설교자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이미 배운 지식을 다 활용하지 못할 터인데 괜스레 새로운 것을 배우고 익힐 이유나 필요가 없다는 주장이다. 설령 그것이 현실이라 해도 배우지 않는 설교자는 그럭저럭 한 세월 넘길 순 있어도 시동기로서의 선도적 역할을 감당하기에는 벅차다. 전문사역자로서 3년의 훈련은 학원을 떠나 목회와 삶의 현장에서 스스로 배움을 터득할 기본 자격을 획득했을 뿐이다. 노루 때린 몽둥이도 3년 우려내면 핀잔 받는 세상인데 신학교에서의 일천한 배움으로 30년을 우려먹는다면 기가 찬 노릇 아닌가! 다양한 지식을 농축해서 성경의 진리로 솎아내 회중의 영성과 지성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설교자의 위치상 한시인들 배움의 끈을 놓을 수는 없다.
세상이 엄청난 속도로 발전해가고 청중들은 최신정보와 지식 획득에서 놀랄만한 능력을 보유하고 있다. 그들은 피 터지고 알 박이는 경쟁사회에서 뒤쳐지지 않고 앞서나가기 위해 눈을 부릅뜨고 배워야 했고 살아남기 위해 잔기술들을 배워 몸에 익혔다. 청중들은 우주의 끝을 향해 비행하는 우주선에 몸을 실었는데 설교자가 아직도 은하계는커녕 태양계의 회전축을 따라 돌기만 하면 소통이 가능할 것이며 의미 있는 조우(遭遇)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왜 메신저를 선지자라 불렀던가? 하나님이 눈과 귀를 열어 깨닫게 하시고 그 입에 말씀을 담아두셨기에 먼저 아는 자가 된 것이 아니었던가? 삼민주의(三民主義)의 주창자인 쑨원(孫文)이 민권주의 제3강(1924년 2월 10일)에서 설파했던 선지선각자(先知先覺者), 후지후각자(後知後覺者), 무지무각자(無知無覺者, 혹은 不知不覺者라고도 함)를 원용해도 설교자는 단연 선지선각자 반열에 들어야 하지 않겠는가?
설교자여, 거룩한 호승심’(好勝心)을 가지라
이 시대의 선지자 혹은 선각자는 쿵푸(工夫)의 달인이어야 한다. 성경으로 모든 계시는 완성되었기에 구약 시대의 선지자, 예언자에게 임했던 것처럼 극적인 메신저 시대는 끝났다. 완결된 계시로서 성경이 누구에게나 주어졌기에 그 텍스트를 붙들고 부름 받은 메신저가 얼마나 지혜자로 영글어 가느냐? 에 역사의 어둠을 밝힐 ‘그 메시지’가 달려 있다. “사람의 마음에 있는 모략은 깊은 물 같으니라. 그럴지라도 명철한 사람은 그것을 길어 내느니라.”(잠 20:5) 심중의 모략 하나 읽어내기도 어려운 판에 성경에 암호화된(encoding) 진리를 해독하기란(decoding) 여간 어렵지 않다. 선지자답게, 예언자답게, 메신저답게, 배우는 자답게 파고, 생각하고, 깨닫고 적용하는 매 순간 매 과정에 자신의 최선을 쏟아 부어도 과히 부족하다.
기도하고 성경 한권만 통달하면 그뿐이지 않겠냐? 며 항변할 수 있다. 일면 타당한 반문이다. 성경 통달을 평생의 목표로 세우고 매일을, 매주를, 매달, 매년을 그렇게 훈련하느라 양서 읽기에 시간이 부족하다면 당연히 성경 한 권이면 족하다. 하지만 통달을 위한 실제적인 노력은 기울이지 않은 채 배움의 도전에 응전하기 위해 내뱉는 상투어라면 성경 통달이란 개념 자체가 당신을 나무랄 것이다. 통달을 주장하는 이들을 여럿 보았지만 통달의 ‘통’에도 이르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통달(통달)이란 “막힘없이 훤히 통하는 상태”를 이름이다. 성경을 두루 원만하게 알고 창세기에서 계시록까지 전혀 막힘이 없으며 중요한 주제나 교리를 말씀으로 엮어가고 풀어감에 무리가 없고 자연스럽다. 한국의 전통가구에는 못을 사용하지 않고 홈을 파서 일일이 맞춰나간 제품들이 많은데 오늘날에도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에 소재한 KILO회사는 못과 나사를 사용하지 않고 접착제 없이 가구를 만든다. 세련된 디자이너와 실력 있는 숙련공들이 있어 가능하다.
나는 오랜 세월을 성경 통달에 매진했지만 여전히 막히는 곳이 많고 매끄럽지 못하며 훤하지 못하다. 수천 절을 암송했지만 망각과 기억의 틈바귀에 끼어 멈칫 할 때면 완벽하지 못함에 가슴을 때린다. 암송한 내용이 완전 숙달되기까지 수백, 수천을 반복해도 어떤 구절들은 꼭 조사 한두 개가 틀리거나 단어의 순서가 뒤바뀌곤 한다. 계속 암송하고 부단히 배움에 열공해야 할 이유로는 충분하다. 난 당신이 여러 면에서 나보다 못하다고 생각지 않는다. 당신은 내가 지니지 못한 많은 것들을 소유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이 나의 글을 읽고 있다는 단 하나의 이유로 당신에게 고백하련다. ‘배움에 임하는 열정과 실제 훈련은 당신에게 결코 뒤지지 않는다!’ 자만이나 허영에 들뜬 소리가 아니다. 언제든 배움에 관한한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 강도 높은 훈련을 지금도 계속 하고 있기에 그리 말할 수 있다. 무엇보다 이렇게 해서라도 당신의 지적 승부욕에 불을 지피고 영적 지혜의 경주에 임한 자로서 잠든 ‘거룩한 호승심’(好勝心)을 일깨우기 위해서다.
설교자, 만 권의 독서열을 뚫고 피어나는 한 권의 사람
인생은 짧다 하지만 성경과 더불어 양서들을 읽고 배워 양식 삼기에는 충분한 시간이다. 그래도 성경만을 외치는 당신에게 되묻겠다. 그렇게 말하는 당신은 실제 ‘책들 중의 그 책’(The book of books)이요 모든 책들의 압축이라 할 수 있는 성경 통달에 그런 자세로 임해 왔으며 지금은 어떤 단계에 이르렀는가? 알고 싶다. 성경 통달을 위해 애써온 한 사람의 학도로서 여전히 난 배움에 목마르고 성경을 많이, 깊이 알아갈수록 성경 이외의 책들에 더 끌리게 됨을 숨길 수 없다. 지식을 향한 공복감은 지혜자일수록 크고 심하다.
“한 권의 사람(homo unius libri), 만권의 사람”을 추구했던 존 웨슬리는 위대한 학생이기에 위대한 스승이었다. 성경 한 권의 사람! 제레미 테일러가 그랬고 토마스 아퀴나스가 그랬으며. 어거스틴이 그랬다. 결국 나와 당신이 열어갈 전인미답(前人未踏)의 길은 만 권의 독서열을 뚫고 피어나는 한 권의 사람됨이다. 눈 내린 산길을 걷다 보면 움푹 팬 발자국을 보면서 이른 새벽에 누군가 나보다 먼저 이곳을 지나갔다는 알림 메시지를 듣는다. 한편은 반갑고 다른 한편은 아쉽다. 먼저 길 떠난 선인이 있어 안정감과 일종의 연대감으로 포근함을 느끼지만 선두를 빼앗겼다는 현실 앞에 자신이 남길 첫 걸음을 다음으로 기약한다. 그것은 회한보다는 ‘시샘 빠진 부럼’으로 볼 수 있다. 나이든지 당신이든지 그 누구이든지 통달(mastery)의 경계를 지나 새로운 차원에서의 안전 루트를 확보하여 나중 그 길에 들어설 이들을 위한 이정표가 되기를 빌어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