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작이 아닌 걸작을 추구하는 말씀 사역자
설교자의 영광은 하늘에서 비롯되었고 천상의 능력으로 유지되며 영광의 보좌로 귀속된다. 설교 행위에 도사린 위엄과 영광을 알지 못하는 설교자란 알지 못하는 물건을 사람들에게 잘 아는 듯이 파는 장사꾼과 다름없다. 제품의 효능과 상관없이 워낙 제품 설명을 깔끔하게 잘하면 사람들이 모이고 제품도 날개 돋친 듯 팔린다. 물건은 팔 수 있을지 몰라도, 그로 인해 어떤 이득을 챙길지 몰라도, 물건의 가치를 알지 못한 그의 상행위는 단지 쩐의 전쟁놀이에 불과하다. 말씀을 드러낼 삶이 따를 리 만무하다. 그런 메시지야말로 허섭스레기다. 이런 말쟁이들이 우리 주변에 적지 않아 존귀한 메신저들까지 도매금으로 대중의 뭇매를 맞는다.
말씀 자체에 익숙해지기 전에 쉽사리 말씀이란 제품의 홍보에 열 올리는 우를 범치 말아야 한다. 목수 세계에선 “두 번 재고 한 번 자르라”는 금언이 유포되어 있다. 러시아 격언에도 “일곱 번 재고 한 번 자르라”는 금언이 있다. IBM지식센터의 경영원리에는 “세 번 재고 두 번 점검하고 한 번 자르라!”(Measure thrice, check twice, cut once)는 내용이 있다. 비슷한 유형의 금언은 이외에도 많은데 전하려는 메시지는 동일하다. 계획과 준비에 만전을 기하라는 말이다. 잘못 자르면 다시 자르거나 자른 것이 소용없게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정확히 재고 완벽히 자르려면 재고 확인하고 자르는 매 과정에 세밀해야 한다. 달리 표현하면 장인정신이다. 장인은 늘 자신의 일에 사명감과 영감 없이 임하지 않는다. 다작이 아닌 걸작을 추구하는 장인에게는 시간이란 숙성 과정상 꼭 필요한 것이어서 아끼는 법이 없다.
성급한 메신저와 찍어낸 설교들
말씀의 세계도 마찬가지다. 영혼을 살리는 비책 중의 비책인 말씀을 다룸에 있어 조급함은 파멸의 지름길이다. 하나의 익은 메시지를 위해 선택과 집중, 반복과 몰입 과정에도 그렇지만 실제 묵상과 메시지 창안, 기도의 군불 때기, 소통의 불길 조절, 전달의 불씨 나르기에 이르기까지 충분한 시간과 공을 들여야 한다. 영감 없이 말씀을 논하는 자는 아무 감흥 없이 연주하는 악사보다 무가치하다. 구태여 사탄의 하수인으로 자청하기 전에 사탄이 아예 자신의 경제참모인 맘몬을 말씀으로 배를 채우려는 자들에게 붙여준다. 메신저의 변질이 가져오는 타락의 파급효과가 대단함을 잘 아는 사탄이 빈틈을 노리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그는 기회주의자의 원조답게 메신저의 변질이란 비등점과 교회의 타락이란 임계점을 절묘하게 간파한다.
요즘은 설교를 신종기업의 한 메뉴로 활용하는 흐름도 있다. 시간에 쫒기는 설교자들을 돕는답시고 원하는 내용의 메시지를 전문적으로 만들어 공급해주는 곳도 있다. 그런 류의 공급처가 성업하고 그런 메시지가 창궐하는 한 교회는 강도의 굴혈 신세를 면키 어렵다. 3D 프린터처럼 획일적으로 찍어낸 설교들이 강단에 잡초를 우거지게 하고 회중들의 영혼을 피폐하게 만드는 ‘악중악’(惡中惡)임을 정녕 모르는가? 설교자를 돕기 위한 기초 단계에서 시간을 절약시키고 아이디어를 제공하는 수준의 도우미 역할은 얼마든지 창의적일 수 있다. 그러나 잘 꿰맞추어지고 군더더기 없이 정제된 완결 메시지로 설교 준비에 지친 설교자들의 시선을 끄는 것은 저질의 호객 행위나 진배없다. 근절되어야 한다.
말씀의 영광이 훼손된 표절설교
이런 메시지가 난무하는 곳에는 늘 사탄의 졸개들이 진을 치고 있다. 사탄의 간식거리를 위해 수거해가기 위해서다. 말씀의 영광을 훼손시킨 말씀은 사탄에게는 별미이기에 변질된 말씀이 외쳐지는 곳에는 사탄의 졸개들이 항상 문전성시를 이룬다. 성경 본문에는 본래의 맛과 향이 배여 있다. 그 맛과 향은 시대의 변천에도 불구하고 말씀의 말씀다움을 드러내는 불변의 요소다. 설교 내용이나 스타일은 어느 정도 시대의 영향을 받기에 해석 방법이나 전달 형식의 차이에 따라 맛깔스러움이나 향내가 조금씩 달라질 수 있다. 경우에 따라 가장 동시대적인 메시지 창출이라는 측면에서 메신저는 각별한 향신료를 첨가하여 다른 맛을 내보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물론 필요한 작업이지만 지나치면 득보다 실이 많고 약보다 독이 되기 십상이다.
미국에는 설교 전문과 예화를 파는 사이트들이 많이 있는데 한국의 현실은 어떤지 궁금하다. 무료 사이트들도 있지만 양질의 설교와 예화에 관련된 최신 정보를 얻으려면 유료 사이트에 접속해야 한다. 설교자들이 찾지 않으면 이런 사이트들이 퇴조할 텐데 문제는 그런 유료 사이트들이 잘 운영된다는 점이다. 게다가 인기 있는 사이트로 소문나면 고객들이 자연 몰려들고 많은 설교자들이 한 사이트의 설교를 이용하는 진풍경이 드러난다. 소위 대형교회 목회자이거나 유명세를 타는 목사들의 설교를 본인 의사와 상관없이 특정 사이트에서 판매하는 이들도 있다. 어떤 경우에도 유료 사이트에 게재된 설교들은 창의적일 수 없다. 설교자 스스로 이런 풍조에 설교자로서의 품격이 더럽히지 않게 하고 교회 역시 설교를 빙자한 비정상적인 설교 행위를 차단하는 일에 관심을 보여야 한다. 예방에 실패하면 지금도 기승을 부리는 코로나 바이러스처럼 수많은 강단이 표절된 설교를 적당히 포장해서 자기 것처럼 전하는 악순환의 희생자가 되어버린다. 이런 악의 고리는 분쇄되어야 마땅하다. 이런 설교 행위를 ‘악중악’이라 표현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영혼을 뒤흔드는 메시지는 깊은 고민에서 나와
당신은 이런 부류가 아니라 믿기에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차라리 죽을 쑬지언정 자신의 메시지를 전함이 백 번 낫다. 정 자신이 없고 준비가 되지 않았을 때는 설교를 잠시 중단하면 된다. 이런 일이 반복되거나 기간이 한 달, 두 달 식으로 길어지면 곤란하겠지만 평생 설교를 수행하는 입장에서 간혹 그런 식으로 자신의 메시지를 보호하고 귀히 여기면 메시지가 메신저를 찾아오는 행운도 얻는다. 자신 때문에 고민하고 아파하는 메신저를 메시지가 외면하는 법은 없다. 그 순간이 어떤 설교자에게는 본문 이해의 영감이나 해석과 적용상 조화로운 아이디어의 번쩍임으로 다가온다. 순전히 자신의 설교에 충실하려 애쓰는 메신저가 장착할 필살기, 그 마지막 감동의 움직임으로 착상(着床)되기도 한다.
또 다른 문제가 있다. 설교술에서 가장 최근 기법을 총동원해서 최선의 설교를 지향한다 할지라도 어떻게 말씀 본연의 맛과 향을 살려내느냐는 점이다. 설교는 무한한 도전이면서 성경적 설교라는 한계를 어떻게 극복하느냐는 숙제를 안고 매양 씨름해야 한다. 그래서 메신저다움을 유지하며 깊은 샘물 길어내듯 메시지다운 메시지를 창출해내려 애쓰는 학도들은 진지한 고민에 빠진다. 영혼을 뒤흔드는 메시지를 다듬는 메신저일수록 고민의 강도는 깊고 드세다. 이런 창의적 고민은 잦을수록 좋다. 영력 있는 설교를 갈망하는 메신저에게 별다른 고민이 없다면 그는 애초 그런 설교에 대한 갈급함이 없었다는 증좌다. 고민 없음이 그 증거이니 변명의 여지가 없다. 활력 넘치는 메시지는 그 많은 지식이나 축적된 경험과 노하우에 의해 좌우되지도, 영향 받지도 않는다는 엄연한 사실에 기인한다.
이 주제와 연관된 필자의 시리즈가 목적 삼는 바는 설교의 비술을 소개하거나 문제가 있는 곳에 침을 찌르듯 충격 요법을 가하기 위함이 아니다. 그런 것은 전체 내용을 통해 독자 개개인이 자신이 알고 생각하던 바에 필요한 부분을 적용해 취할 연관효과(linking effect)의 영역이다. 필자가 바라는 바는 모든 설교의 텍스트가 되는 성경에 대한 독자들의 빛바랜 애정에 원래의 색을 되찾아주기 위함이요, 자신의 설교 세계를 구축해감에 독학이거나 소그룹이거나 진지한 학습동아리를 결성하도록 동기 부여를 하기 위함이다. 필자 역시 여전히 배우는 학생으로 성경을 대하고 한 편의 산 설교를 마련하기 위해 애씀과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다. 살아있어 여전히 배우며 고민하는 피곤한 삶이지만 프로이기에 일사불란하게 임한다. 당신도 별반 나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