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로 듣던 말씀을 눈으로 보여주는 설교자의 삶

  • 입력 2020.11.20 16:09
  • 수정 2020.11.21 0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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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사역자에게 고하는 말씀 (19)

한명철 목사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은혜와 평강교회를 담임하며 30권의 저술과 글쓰기를 통해 복음 사역에 애쓰는 목회자다
한명철 목사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은혜와 평강교회를 담임하며 30권의 저술과 글쓰기를 통해 복음 사역에 애쓰는 목회자다

목사는 성경에 통달한 전문가가 되어야

목사는 전문직이다. 인간의 영혼을 다루는 전문인이다. 그 어떤 전문적인 직종도 이에 비할 수 없을 정도의 존엄성과 가치가 있다. 전문인으로서 목사는 성경을 잘 알아야 한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평신도보다 성경에 무지한 목회자가 부지기수다. 부끄럽고 통탄할 일이다. 평신도 설교자가 왜 나타나는가? 성경을 열심히 읽고 암송하고 연구하다 보니 눈이 열리고 귀가 뚫리고 말렸던 혀가 풀려서 다만 몇 마디 나눌 뿐인데 사람들이 반응을 보인다. 하물며 말씀 사역자로 봉직하는 입장에서야 당연지사가 아닌가? 지금부터라도 늦지 않다. 성경 66권에 다 통달할 수 없으면 성경 한 권에 매달려라! 사람들이 주저하는 계시록을 다루기엔 이미 늦었을는지 모른다. 자신 있다면 조금 긴 책을 선택하고 그렇지 않으면 짧은 책을 선택하라!

혼자 하기가 어려우면 두셋, 혹은 서넛 정도의 학습 그룹을 만들라! 목회도 중요하고 다른 중요한 일들도 있겠지만 이 일에 목숨을 걸다시피 최우선순위를 두고 임해보라! 정한 시간, 정한 장소, 정한 사람들이 정한 책을 두고 정통에의 첫 걸음을 옮긴다. 서로가 다른 책을 선정해서 하기 원한다면 그렇게 해도 상관없다. 어떤 경우라 하더라도 무서운 집중력을 발휘하여 몰입한다. 진지한 스터디그룹을 만들라! 시작과 끝에는 반드시 갈급한 기도로 포진시킨다. 그렇지 않으면 머리에 채우는 지식 쌓기로 끝나버린다. 여기까지가 기초적인 공부 단계다. 기초라 해서 단순한 기초가 아니라 상당히 전문화된 기본기 축적의 단계다. 8방, 16방, 32방으로 번져가기 전에 4방의 정방향을 잡는 경우다.

머리에 쌓은 지식이 가슴으로 다시 손발로

보다 심층적인 공부 단계에 들어가면 말씀을 반복해서 읽고 묵상하는 과정마다 기도로 기름칠을 한다. 머리에 쌓여진 지식이 가슴에 담긴 지혜로, 다시 영혼에 흡수된 생명의 능력으로 느껴지기까지 진리의 영이신 성령의 도우심을 적극적으로 구한다. 세상에서 가장 긴 구간이 무언지 아는가? 스마일이다. "s"는 출발점과 도착점이 결코 마주칠 수 없는 모습인데 그런 마일(mile)이니 가장 멀 수밖에! 그런데 이에 못지않게 긴 구간이 있다. 머리에 쌓인 지식을 가슴까지 끌어내리는 거리가 엄청나고 가슴에 새겨진 말씀을 손발의 실행까지 옮기는데 평생 걸린다면 그럴 만도 하지 않은가!

그런 현상이 두려워 성경 지식을 머리에 쌓는 연구 자체를 아예 포기한다면 이는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그는” 우려 이상의 우매함이다. 평생 연구가 부담이 되고 자신 없으면 한두 해를 투자해볼 생각은 없는가? 평생 사역의 관점에서 한두 해쯤은 시도할 만한 시간이 아닌가! 그 적시(適時)의 두 해란 바로 지금부터다. 벌써 11월 중순이니 아예 새해부터 하리라 생각하면 새해가 되어도 시작하기 어렵다. 평생 목회할 것이라면 짧게는 한두 달, 혹은 그것이 일이 년이 된다 해도 그럴만한 값어치가 충분하지 않겠는가? 메마른 지식의 전달자가 되지 않고 능력 있는 메신저가 되기 위해 그렇게 말씀의 내공을 쌓아가면서 기도의 깊은 세계도 서서히 다져간다. 젊은 사역자는 보다 유리한 위치에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천년이 하루 같으신 주님에게 나이는 불문이다. 성경을 연구하는 생도로서 필자의 나이도 충분히 젊다.

진리의 성령과 교통하고 말씀에 통달한 설교자

말씀의 강자가 최강자다. 말씀에 붙들리고 말씀을 붙들어 살면 세상에 두려운 것이 없고 부러운 것도 없다. 말씀으로 충만하면 전천후의 사역자가 된다. 어떤 상황과 형편에서도 새벽이슬처럼 하늘의 메시지가 임한다. 무슨 주제가 주어져도 주저하지 않고 당황하지 않는다. 이는 허황된 이론이 아니다. 왜 많은 이들이 성경 통달을 강조함에 비해 통달을 위한 실제 노력은 더딘지 아는가? 통달이 양질의 크리스천으로 만드는데 지름길 되는 것도 아니고 목회 성공에 필수적인 등식도 아니기 때문이다. 실제로 통달에 이르는 길은 멀고 험하며 개인이 치러야 할 희생도 크다. 그래도 통달은 말씀 사역자의 목표 설정으로서는 최우선 순위에 속한다. 통달에 진지한 이들이라면 두란노에서 출간한 필자의 소책자 <성경 통달에 이르게 하는 자기학습법>(197쪽, 2000년)을 소개하고 싶다. 필자는 부족하지만 이 원리를 근간으로 지금껏 성경을 대하고 있다.

진리의 성령과 교통되면 수도꼭지를 틀자 항상 물이 쏟아지듯 그렇게 말씀의 진리가 임한다. 수원지의 물은 마르지 않는다. 말씀의 수원지는 영원한 샘터다. 세상 사람들은 늘 생수를 갈급해한다. 수도꼭지도 이상 없다. 그런데 물이 나오다 막힌다면 수도관의 어딘가 막혔다는 증거다. 막힌 곳을 뚫거나 아니면 관 자체를 교체해야 한다. 한 사람의 사역자를 만들기 위한 노고와 희생은 크다. 관의 교체보다 수월할 것은 막힌 곳을 뚫는 공사다. 내가 말씀에 막히면 관이 막힌다. 나의 말씀생활이 지속적이고 진지하지 않으면 관에 부식물이 생기거나 혼잡물이 섞인다. 이 상태를 방치하면 오래지 않아 관이 막힌다. 막힌 말씀을 소리높이 외쳐도 허공을 치는 메아리처럼 빈 소리만 울린다. 설교자 자신의 마음을 때리지 않는데 청중들의 영혼에 가 닿을 리 없다. 심판 날에 알곡 추수할 때 실상이 드러난다.

귀로 듣던 말씀을 눈으로 보여주는 설교자의 삶

청중의 마음 상태가 길가, 돌밭, 가시덤불, 옥토로 구분되듯, 설교자의 영혼도 마찬가지다. 말씀을 전하기 전에 사탄이 생명의 메시지를 거둬간다. 청중의 귀에 들리지만 마음까지 연결되지 않는다. 마음에 떨어져도 생명 없는 메시지이기에 감흥만 일으킬 뿐 감동이 없다. 설령 감동을 일으켜도 지속적이지 못해 금세 사라진다. 설교자는 말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전하고 허기진 영혼들에게 생기를 전한다. 십자가를 전하는 설교자의 마음에 헛된 생각이 있는데 십자가가 영혼에 어른거릴 수 없다. 설교자가 십자가에서 죽은 자가 되어 십자가의 죽음을 전하지 않는데 어찌 청중이 자기를 죽음에다 넘겨줄 수 있겠는가? 회중은 설교자의 눈물에 덩달아 울지 않는다. 그의 메시지 곳곳에 서려 있는 눈물의 흔적을 보았을 때 눈물 흘린다. 눈물의 기도가 밑거름 된 메시지에는 문장과 문단마다 반드시 눈물방울이 맺혀 있다.

주님의 말씀이 능력이었음은 말이 곧 삶의 증거였기 때문이다. 신자들은 설교자의 삶을 살핀다. 설교와 삶의 일치 여부를 확인하기 원한다. 자신들의 설교자가 말쟁이인지 실천가인지를 보고 싶어 한다. 말씀에 정통하다 함은 그 말씀을 연구하고 준행하여 삶과 일치를 이루었을 때를 의미하며 그런 상태에서 전하는 가르침에는 설득의 능력이 따른다. 이성적으로 수용하고 신앙적으로 확신한다. 필요하다면 표적과 기사가 말씀을 뒤따르도록 하신다. 언필칭 살아있는 말씀이다. 당신의 삶이 당신 스스로 전한 말씀을 정확하게 그려낼 때 귀로 들었던 말씀을 눈으로 확인한 청중은 형언할 수 없는 감동과 행복감에 젖는다. 사람을 생명으로 이끄는 데는 굳이 말이 필요 없다. 구원의 무언극(pantomime)이다. 삶이야말로 가장 확실한 말씀의 필사자(筆寫者)이다.

주옥같은 말씀이 빛을 잃고 칼날 같은 말씀이 무디게 느껴지는 것은 회중의 반응이나 사탄의 훼방에 앞서 메신저 자신에게서 비롯된 것일 수 있다. 자신이 전한 설교가 삶에서 뚜렷한 상으로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말씀은 삶으로 실제 실행하여(practiced) 증명될(proved) 때에 메시지의 가공할 폭발력이 일어난다. 사람들이 듣고 싶어 하는 메시지는 귀로 듣는 메시지가 아니라 눈으로 보고 손으로 감지하는 그런 류다.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메시지, 설복당하고 싶은 메시지, 메신저와 일치하고 싶은 마음이 들게 만드는 메시지가 과연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달리 방도가 없다. 메시지를 삶으로 증명해보인 메신저에게서만 그런 감동을 전해 받는다. 그것은 결국 그런 메신저에게 그런 메시지를 주신 하나님과의 일치를 원하도록 만든다. 이런 메신저는 회중과 말씀 중간에서 전혀 장벽이 되지 않고 쌍방의 의미 있는 소통을 가능케 만드는 통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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