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의 기술을 연마하고 실전에 부딪히라

  • 입력 2020.10.02 06:53
  • 수정 2020.10.06 09:56
글자 크기
프린트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한명철 연속칼럼】 말씀 사역자에게 고하는 말씀 (7)

한명철 목사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은혜와 평강교회를 담임하며 30권의 저술과 글쓰기를 통해 복음 사역에 애쓰는 목회자다
한명철 목사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은혜와 평강교회를 담임하며 30권의 저술과 글쓰기를 통해 복음 사역에 애쓰는 목회자다

설교의 기술을 연마하고 실전에 부딪히라

설교를 선포라 단정함은 그것이 유효한 전달 매체를 통해 누군가에게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기에 그렇다. 아무리 완벽하게 다듬어진 설교문도 외치지 않으면 소용없다. 여러 전달 매체 중에서도 가장 손쉬운 것이 말이다. 언어 표현도 능력이지만 그 능력을 배가시키려면 전달 기술을 연마해서 터득하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좋은 설교자가 되려면 우선 문장 기술에 진일보해야 한다. 글쓰기를 위한 어떤 노력도 기울이지 않고 좋은 설교를 하려는 것은 억지며 욕심이다. 다양한 계층의 청중을 아우르려면 더더욱 기본적인 문장기술 익히기에 시간을 쏟아야 한다. 실로 설교에 왕도는 없다. 지름길보다 빠른 것은 직선이다. 토끼와 거북이에 얽힌 우화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크다.

전문적인 설교자를 위한 참고도서가 결코 적은 것은 아닌데 양서 몇 권을 통달했다 해서 설교술에 통달하는 것은 아니어서 좋은 스승 만나기가 실로 하늘의 별따기다. 설교학을 전공해서 능수능란하게 가르쳐도 설교에는 잼뱅이 일 수 있다. 숙련된 수영 강사가 물을 무서워할 수 있음과 같다. 이론과 실제의 차이는 삶의 모든 영역에 즐비하다. 결국 설교에 능한 자가 되려면 실전에서 부딪혀 익히는 수밖에 없다. 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자기 나름의 스타일을 확보하는 것이 우선이다. 십대 때 설교의 갈증을 달래고자 간혹 산골짜기 공동묘지를 찾아 무덤들을 향해 외쳤던 일이 지금도 기억에 새롭다.

교회를 지켜낸 황금입술의 설교자

가장 이상적인 설교란 도식화할 수도, 공식화할 수도 없다. 기준치 잡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물론 시대마다 수많은 별들 중에서 유난히 반짝이는 금성처럼 특출한 설교가는 존재한다. 성경 속의 인물로는 세례요한에 필적할 만한 이가 있을까? 교부시대에는 주옥같은 성경해석으로 영혼을 정화시키고 교회를 지켜낸 황금의 입술들이 많았다. 중세에 들어서 교회가 갱신에 눈을 뜨기 시작하며 시대를 깨우는 메신저들이 우후죽순처럼 솟아올랐다. 15세기 피를 토하듯 외친 사보나롤라, 16세기 하나님의 망치질 소리 요란했던 마틴 루터, 17세기 눈물과 천둥으로 전한 조셉 얼라인, 18세기 성화의 주자였던 존 웨슬리, 19세기 불붙은 떨기나무 같았던 스펄전, 20세기 영혼 구원의 설교자 빌리 그래함!

저울과 잣대에 따라 탁월한 설교자의 선정이 달라질 수 있겠지만 사실 ‘우리 시대의 위대한 설교자 5인, 10인, 12인’처럼 얼마를 골라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사실 그럴 필요도 없고 그다지 중요한 일도 아니다. 부질없는 도토리 키 재기라며 코웃음 치면서도 어떤 형태로든 지역이나 시대를 대표하는 설교자로 언급되길 은근히 기대하는 속내는 없는 것일까? 간혹 기독교 언론매체에서 ‘OO교단’ 또는 ‘한국을 대표하는 설교자 O인’이란 제목 아래 알만한 이름들을 소개하지만 근거가 불분명하다. 설교에 관한한 조국교회에는 소위 무명용사들의 층이 두텁다. 강호를 휘젓는 검객들보다 강호에서 몸을 숨긴 은둔고수들의 검광이 예사롭지 않다. 실로 영적으로 대병소장(大兵小將) 상황이다.

설교 알고리즘을 분석하는 ‘AI 설교’

목회자에게도 동병상련은 있다. 없다면 감정의 중요 영역이 손상을 입었다는 신호다. 감정이 상했다면 영혼도 온전하기 힘들다. 본질적으로 공감되는 아픔의 강도와 고민의 파장과 고뇌의 깊이는 격차가 대단해보여도 오십보백보다. 동시대를 살아가며 삶과 사역의 높낮이와 규모 차이는 있더라도, 기본적으로 사명자로서 느끼는 부담감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설교에 대한 부담감, 잘해 보여고 애쓰는 심정, 자긍심에 웃고 자괴감에 울던 매주 강단에서의 승패로 인한 가슴 조림, 아무리 초연하려 애써도 벗어날 수 없는 일상의 경험은 차라리 천형(天刑)에 가깝다. 야구는 3할 대만 유지해도 강타자 대열에 끼고 투수는 포볼로 내보내고 홈런을 얻어맞아도 두 자리 승수만 넘어서면 유능하다는 소리를 듣는다. 설교는 매번 안타여야 하고 만족을 모르는 청중을 만나면 매번 홈런을 때려야 한다. 이게 현실적으로 가능하기나 한 것일까?

바라보고 수용하는 관점에서 모든 설교는 설교란 이름 하에서 이상성을 지니고 있으며, 어떤 설교도 모두의 공감력을 완벽히 불러일으킨다는 게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에 이상과는 거리가 멀다 할 것이다. 설교에도 알고리즘은 존재한다. 하지만 한계도 분명하다. 짜임새 있는 규격이나 틀에 매이지 않는 메시지의 특성상 모두를 위한 방법론으로서는 탐탁치가 않다. 인공지능을 활용하여 인간이 아닌 기계가 글쓰기의 기술을 보여주는 세상이다. 가까운 장래에 본문과 메시지의 골격만 입력시키면 그럴싸한 설교를 AI가 대신 준비해주는 날이 올 것이다. 그럴 경우에도 그것을 설교라 이름 할 수 있을 것인가? 지금의 기술력만으로도 AI는 웬만한 글쓰기를 솜씨 좋게 해 나가며 채 끝내지 못한 문장까지 깔끔히 마무리 짓는 수준이다.

기계도 글쓰기를 익히는데 인간이 글쓰기를 게을리 하거나 포기하는 것은 자존심 상할 일이다. 지금 부지런함에 익숙하지 못하면 기계가 인간의 노력을 대신하고 칩이 인간의 사고능력을 대체하는 지경까지 이를 때 사역의 존재가 과연 가능하겠는가! 그런 날이 오게 되었을 때 합리적인 명분을 내세우거나 대세론에 밀리는 듯 설교권을 양도하지 않겠는가? AI에게 아예 설교를 비롯하여 중추적인 사역 일체를 위임하지 않겠는가? 물론 그 전에 세상종말이 오는 것이 더 빠를 수 있겠지만...... 이 세계를 잠깐 살펴보자! 인공지능의 본질은 예측에 있다. 초절정의 기계학습은 예측 가능한 모든 실패의 가능성을 사전에 차단시키고 성공의 확률을 최대한도로 끌어올리게 만든다.

가상의 설교자가 만드는 최상의 설교 서비스

이 시대의 교회는 더 이상 건물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건물에 투자하던 시대는 옛 유물이 되어버린 지 이미 오래다. 교회 건물 양식은 지역마다 유물 형태로 보관되어 있을 정도다. 세계 어느 지역에서는 아직도 건물에서 예배가 진행되고 있지만 극히 소수에 불과하다. 대세는 이미 건물이 사라진 교회 시대에 들어섰다. 예배는 혁명이라 할 만큼 변화를 이루었다. 모이는 회중 자체가 없다. 에클레시아란 이름에 걸맞을 만한 모임이 아예 없다. 대면 예배, 비대면예배처럼 생소한 표현들이 일반화되었고 Zoom이나 Meet 같은 프로그램으로 어디에서도 서로 접촉하고 목적 있는 활동도 가능하다. 오히려 친밀감과 내밀성을 보장받을 수 있다. 긍정적 측면에서 소수정예화도 가능하다.

분명히 기독교의 대표적 상징인 교회는 앞으로도 존재하지만 개인으로서의 교회, 개인 예배가 주축을 이룬다. 간혹 가족이나 가까운 친구들과의 공동예배가 이루어지지만 같은 설교를 들을 수도 있고 다른 설교를 경청할 수도 있다. 옛 유형의 설교를 원할 때는 오늘날 형태의 설교를 고르면 된다. 미래 시대의 설교는 듣는 이의 입장이 최대한 반영된 맞춤형의 설교다. 시간, 내용, 스타일, 신학적 배경, 심지어 원하는 주제와 특별한 요구사항을 접수시키면 보장된 설교 서비스가 만족스런 수준에서 다양하게 제공된다. 그때쯤 되면 화면 크기도 마음대로 조절 가능하므로 있는 곳이 어디든 가장 적합한 형태의 크기에서 가상 설교자가 전하는 완벽한 설교를 듣게 된다. 설교자의 모습을 원치 않으면 음성만 작동시킨다. 전원 연결도 필요 없고 언제 어디서라도 원하는 시간, 원하는 장소에서 원하는 만큼 유쾌하게 즐긴다.

다차원의 영상은 가장 영적인 분위기로 채워진 예배 공간을 실시간으로 제공한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쾌적함까지 갖추었다. 하루 24시간 중에서 영성 자극이 가장 극대화될 시간을 개인의 편차에 따라 적용시키면서 완벽한 예배 공간과 시간을 확보한다. 본인이 원하는 주제에 따라 최종적으로 적합한 본문이 선정되면 본인의 그날 취향에 따라 듣고 싶은 메시지의 방향을 정한다. 그러면 역시 본인의 선호도에 따라 창안된 ‘가상 설교자’가 표정, 몸짓, 음성의 고저강약을 절묘하게 배합시키면서 원하는 설교 한 편을 전한다. 청중이 자신의 상황에 최적화된 설교자를 만들어 취향 따라 운용하기에 메시지에 상처받거나 설교자와 대립각을 세울 일이 아예 없어진다. 이런 세상이 좋은 날로 기대되는가? 필자만의 억측이나 지나친 기우이길 빈다.

 

저작권자 © 본헤럴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