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세창 목사의 신약이야기】 난해성구 연구 (18)

 

최세창 목사 / 1977년 감리교목사안수, 한국성서신학교 출강, 인천여신 출강, 협성대 출강, 훼이스신학대학원객원교수, *28년간의 1250여 주석대조연구로 신약 전권인 『최세창의 신약주석 시리즈』출판 *논문* “바울의 인간이해” “야고보서의 저자에 관한연구” “예수 탄생 이전의 구원문제” “고용주와 고용인의 도리” “부부간의 도리” “부자간의 도리” “기도에 관한 성서적 개요” “서원기도에 관한 연구” “칭의에 관한 연구” “바울의 성 이해” “주석과 설교에 관한 소고” “히브리서의 저자 연구” 외 교계 잡지 연재 및 세미나 인도 다수
최세창 목사 / 1977년 감리교목사안수, 한국성서신학교 출강, 인천여신 출강, 협성대 출강, 훼이스신학대학원객원교수, *28년간의 1250여 주석대조연구로 신약 전권인 『최세창의 신약주석 시리즈』출판 *논문* “바울의 인간이해” “야고보서의 저자에 관한연구” “예수 탄생 이전의 구원문제” “고용주와 고용인의 도리” “부부간의 도리” “부자간의 도리” “기도에 관한 성서적 개요” “서원기도에 관한 연구” “칭의에 관한 연구” “바울의 성 이해” “주석과 설교에 관한 소고” “히브리서의 저자 연구” 외 교계 잡지 연재 및 세미나 인도 다수

누가복음 2:30-35절에서 시므온은 【30】“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라고 하였다. 히브리 표현법을 따른 이 구절은 이사야 40:5의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대저 여호와의 입이 말씀하셨느니라”(참조: 사 52:10, 시 98:2, 눅 3:6, 행 28:28)의 반영이다.

“내 눈이”는 시므온이 하나님의 구원의 방편이신 구주 예수를 똑똑히 보게 된 것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주의 구원”이 원문에는 ‘당신의 구원’(τὸ σωτήριόν σου)으로 되어 있다. 특히, 정관사를 사용한 것은 구주 예수를 하나님의 유일한 구원의 방편임을 암시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 구주 예수는 구원 자체이시다(요 14:6). 그 구주 예수를, 시므온은 눈으로 보고 품에 안고(요일 1:1) 찬양하고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 시므온은 【31】“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유일한 구원의 방편이자 구원 그 자체이신 구주 예수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뿐만 아니라 “만민(πάντων τών λαών: ‘모든 백성’①) 앞에 예비하신 것이”다(참조: 사 52:10). 엄밀한 의미에서 구약성경의 선민사상은 혈통상의 이스라엘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의 이스라엘이다(롬 9:6-, 10:18-, 갈 3:6-, 마 3:7-).

구약 시대 곧 율법 시대에 이방인들인 라합 및 그 친척들(수 2:1-, 히 11:31, 약 2:25)과 니느웨 성민들(욘 3:3-, 마 12:41, 눅 11:31)이 구원받은 사실을 보면, 하나님의 구원에는 편견과 편애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구주 예수의 탄생은 믿는 만민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을 따라 오신 것임(요 3:16)을 알 수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누가의 보편주의, 혹은 세계주의는 올바른 구원 사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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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석서와 주해서에서 인용할 경우에는 저자의 이름만 밝혔고, 같은 견해를 가진 학자들이 네 명 이하일 경우에는 본문의 괄호 속에 이름만 밝혔음.

1) “J. Weiss, 429, Sahlin, 256, G. D. Kilpatrick”(in I. H. Marshall) 등은 누가가 이방인들에게는 보여질 뿐 경험되지 않는 구원을 가리키고 있다고 여기나, 옳은 견해가 아니다. 또, “G. D. Kilpatrick”(in I. H. Marshall)은 여기의 만민(λαών)을 유대인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나, 역시 올바른 견해가 못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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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누가의 사상은 계속된 시므온의 【32】“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하니”라는 표현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앞 구절의 만민에 대해 보다 더 구체적으로 이방과 이스라엘로 구분하였고, 30절의 구원은 이방과 관련해서는 빛(포스, φώς: 1:79의 주석을 보라.)으로 해석하였고,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과 관련해서는 “영광”(독산, δόξαν: 요 1:14의 주석을 보라.)으로 해석하였다.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의 혈통에서 이스라엘은 물론, 이방인들을 구원하시는 빛이신 구주가 나신 것은 이스라엘의 영광이다. 또한, 그 구주를 믿어 구원받는 모든 사람은 구주의 영광으로 빛날 것이다.

시므온의 찬송에 대해 언급해 온 누가는, 구주 예수님의 부모의 반응에 대해, 【33】“그 부모가 그 아기에 대한 말들을 기이히 여기더라”라고 하였다.

전에 아기 예수님에 대한 천사의 고지를 성모 마리아가 들었고(1:31-35), 목자들이 전해 준 소식을 성모 마리아와 요셉이 들었다(2:9-19). 그렇기는 해도, 아기 예수님에 대한 시므온의 찬송을 들은 그들은 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아마도 어떤 부모라도 그러한 경우에는 거듭 놀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아기 예수님에 관한 시므온의 찬송을 들은 그 부모가 놀라워했다고 한 누가는 그 부모, 특히 성모 마리아에게 한 시므온의 예언을 언급하고 있다. 이 부분은 【34】“시므온이 저희에게 축복하고 그 모친 마리아에게 일러 가로되 보라 이 아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의 패하고 흥함을 위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되기 위하여 세움을 입었고”로 시작되었다.

“시므온이 저희에게 축복하고”는 시므온이 성모 마리아와 요셉에게 하나님의 복이 임하도록 기원했다는 뜻이다.

“보라”는 이두(ἰδού)인데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필자나 화자가 알리거나 강조하고자 하는 주제로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위한 표현이다. 또한, 감탄을 표현하는 것이기도 하다.

“패하고 흥함”(πτώσιν καὶ ἀνάστασιν)은 단순한 현실적 넘어짐과 일어남뿐만 아니라, 영원한 멸망과 구원을 의미하는 것이다.

구주 예수님이 만민, 특히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의 넘어짐과 일어남, 멸망과 구원을 위하여 “세움을 입었”다는 것(사 8:14-15, 28:16. 이 구절들은 롬 9:33②과 벧전 2:6-8③에 인용됨)은 대단히 중대한 의미가 담겨 있다. 즉, 이스라엘은 스스로 구원받은 선민이라고 자부하고 있지만, 실상은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을 따라 오신 구주 예수께 대한 신앙 또는 불신앙에 의해서 넘어지거나 일어나기도 하고, 멸망하거나 구원받기도 한다는 것이다. 구약 시대에는 구주를 보내기로 약속하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 의해 선민이 된 것이고(창 12:1-, 15:6, 마 3:9, 8:11-12, 눅 3:8, 행 3:25, 롬 4:3, 9, 13, 18, 9:7-, 갈 3:6-, 3:29, 히 11:18), 신약 시대에는 그 하나님의 약속대로 오신 구주 예수님을 믿는 믿음에 의해 선민이 되는 것이다.

구주 예수님이 “비방을 받는 ‘표적’(2:12의 주석을 보라.) 되기 위하여 세움을 입었”다는 것은, 구주로서 구원 활동을 하시는 예수님이 비방이나 배척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해 하나님에 의해 세워졌다는 것이다.

“비방을 받는”은 ἀντί(안티: ‘대항하여’, ‘반대하여’)와 λέγω(레고: ‘말하다’)의 합성어인 안티레고메논(ἀντιλεγόμενον)으로서 ‘반박하다’, ‘배척하다’, ‘거부하다’, ‘비방하다’ 등을 의미한다.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는 예언된 대로 많은 사람들에게서 비방과 배척을 받는 표적이 되셨다. 구원의 결정적 사건인 십자가에 못박힌 상태에서도 그리스도는 극심한 비방과 배척의 표적이 되셨다. 이는 이사야 8:16-18을 연상케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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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저자의 로마서 9:33의 주석을 보라.

3) 저자의 베드로전서 2:6-8의 주석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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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주 예수님에 대한 시므온의 예언은 성모 마리아에게 방향을 돌린다. 이 점에 대해, 누가는 【35】“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라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하더라”라고 하였다.

“칼(롬파이아, ῥομφαία: ‘장검’)이 네 ‘마음’(프쉬켄, ψυχὴν: 1:46의 “영혼”의 주석을 보라.)을 찌르듯 하리라“에 대해, 오리겐(Origen)④과 블리크(Bleek)⑤는 마리아가 장차 아들에 대해 품게 될 의심이라고 잘못 해석하였다. 블랙(Black, 153-155)은 에스겔 14:17과의 병행으로 보아 원래 이 말이 이스라엘을 향해 주어진 것이라고 하는데⑥ 역시 올바른 견해가 아니다. 다른 학자들은 여기서 마리아가 이스라엘을 대표하고 있다고 이해하는데(Laurentin, 89 이하. P. Benoit), 구주 예수님이 비방과 배척을 받고, 십자가에 못박히게 될 때의 성모 마리아의 영혼의 고통⑦과 같은 고통을 느낀 이스라엘 백성들이 별로 없었다는 점을 보아 받아들일 수 없다.

김득중 님은 “누가복음에서는 마리아가 예수의 십자가 처형의 목격자도 아니며(23:49, 55, 24:10), 더구나 예수가 십자가 위에서 창으로 옆구리를 찔리는 이야기는 요한복음에만 나오기 때문에, 이 구절을 그런 것에 비추어 해석하는 것은 누가적인 생각이 아닐 것이다. 누가에게서는 이 구절이 34절과 관련해서 이스라엘의 많은 사람이 넘어지고 일어나게 하는 것이 예수의 역할이라는 사상과 연관된 것으로 보인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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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in I. H. Marshall. I. H. Marshall 역시 Origen의 견해를 비판한다.

5) in C. L. Childers. C. L. Childers 역시 Bleek의 견해를 비판한다.

6) in I. H. Marshall. I. H. Marshall 역시 Black의 견해를 비판한다.

7) J. Calvin, M. Henry, J. Wesley, A. Barnes, A. Clarke, H. Alford, E. H. Plumptre, W. Hendriksen, C. R. Erdman, R. C. H. Lenski, R. Earle, C. L. Morris, H. D. M. Spence, W. R. Bowie and Others, N. Geldenhuys, C. L. Childers, M. C. Tenney, W. L. Liefeld, A. Plummer, S. M. Gilmour, I. H. Marshall, J. Willcock, pp. 48, 71, 黑崎幸吉, 이상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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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아들이 십자가에 못 박혀 극도의 고통과 극도의 치욕을 당한다는 사실 자체로 부모, 특히 성모 마리아의 영혼은 칼에 찔리는 것과 같은 고통을 느끼게 마련이다. 그 참혹한 현장을 보고 못 보고는 그다지 큰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비방과 배척을 받는 구주 예수님의 선교 활동과 십자가의 죽음을 보는 성모 마리아의 영혼이 칼에 찔려 찢기는 고통을 겪을 것(Mater Dolorosa)을 예언한 것이다.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에 대해, 어드만(C. R. Erdman)은 “곧 예수는 인간의 본심을 시험하는 시금석이 될 것이니 저의 복음이 전해지는 곳마다 혹은 저를 영접하고 혹은 저를 배척함으로 모든 사람들은 자기들의 본심을 드러내리라.”라고 해석하였다.

출처: 최세창, 누가복음(서울: 글벗사, 2003, 1판 1쇄), pp. 157-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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