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석운의 묵상일기】 마태복음5:1-26 “산상수훈은 하나님나라 복음이다

  • 입력 2021.01.26 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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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은 ‘관계’와 ‘하나님나라’ 그리고 ‘영광’과 관련

방석운 목사 / 용인 하베스트교회 목사, 명지대학교 & 서울신학대학원 졸
방석운 목사 / 용인 하베스트교회 목사, 명지대학교 & 서울신학대학원 졸

말 많고 탈 많은 제46대 미국 대통령 선거의 모든 일이 새로운 대통령 취임식과 더불어 이제 일단락되었다. 그동안 수많은 시비와 음모론이 있었기에 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의 초미의 관심사가 되었지만, 결국 미국은 법치 국가답게 ‘법’ 아래 승복했다. 여전히 다툼의 요소는 남아 있지만 그들은 법의 전통을 지킨다.

예수님의 가르침의 진수인 마태복음의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은 가장 먼저 ‘복’과 ‘율법’을 이야기하신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부르자마자 그들이 얻을 천국복음을 선포하시고, 바로 이어서 제자들이 하나님 나라의 기준에 따라 그 삶을 실천할 것을 엄격히 가르친다. 예수님은 복음과 율법을 서로 동떨어진 것으로 가르치지 않으신다. 오히려 예수님은 자신이 율법의 완성자임을 선포하신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자들의 말을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아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은 일점일획도 없어지지 않고, 다 이루어질 것이다.”(마 5:17,18)

1세기 그곳에 있던 사람들 중에 예수님을 오해하는 사람들이 예상되었다. 산상수훈 이후에 나오는 사례로 예수님께서 안식일 규정을 어긴다거나, 세리와 같은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는 것을 들어서 예수님이 율법을 어기는 자라고 판단한 것이다. 그러나 정작 율법을 어기며 사는 이들은 그때의 삶의 방식에 익숙한 자들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율법에 일점일획을 더하며 스스로 만든 법인 불필요한 장로들의 유전을 만들었고, 뿐만 아니라 남의 눈을 속이는 겉과 속이 다른 이중적인 삶의 모습을 드러내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이 계명 가운데 아주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거나 가르치는 자들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마 5:19)고 경고하신다. 율법과 하나님 나라가 연결된다.

하나님의 율법은 옛 조상만이 아니라 새 시대에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되며, 오히려 이것을 온전히 지키는가 아닌가에 따라 그의 운명 여부가 결정된다고 말씀한다. 심지어 제자들의 행위가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이 행하는 의로움보다 더 나아야만 천국에 이를 수 있다고 하신다(마 5:20). 따라서 율법과 예수님의 말씀은 ‘천국’ 입성의 조건과 자격으로 병행하고, ‘복 있는 사람’이 마땅히 취할 태도와 행동이 된다.

예수님의 산상수훈의 기본 전제인 ‘팔복’(마 5:3-12)에서, 첫 번째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마 5:3)과 그 마지막인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5:10)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복은 모두 하나님 나라와 관계된다.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는 내면과 외면이 다르지 않은 태도로 하나님의 계명을 온전히 지키는 자가 되어야 한다.

The Sermon on the Mountain by Arsène Robert 1870
The Sermon on the Mountain by Arsène Robert 1870

성경은 예수님의 이야기로 곧 하나님 나라의 복음에 대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영원하신 당신의 목적에 따라 땅과 하늘을 창조하시고, 사람을 지으셨다. 하나님은 영원 전의 계획에 따라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 삼으시고 우리를 통해 하늘의 영광을 나타내기로 하셨다. 하나님은 하늘의 영광을 헛된 것으로 바꾸어 버린 죄인 된 인간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그의 영광의 본체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구주로 보내셨고, 그를 통해 사람들이 하늘의 복을 얻게 하셨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되어 탄생하신 분으로 전혀 흠이 없는 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로서 아버지의 법(뜻)을 완전히 만족시키는 분이시다.

문제는 우리다. 그동안에 우리에게 익숙해 있던 복음의 교리(신학)를 잠시 내려놓고, 단순히 예수님께서 지금 하시는 말씀에만 집중해보자. 예수님은 제자들이 율법을 행하면서 가르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님 나라에서의 판단은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지 않고 게다가 입으로만 주장한다면 이상한 사람이 된다. 심지어 제자들은 자칭, 타칭 의롭다고 하는 율법학자, 바리새인들의 의로움보다 더 우위에 있어야 한다. 가령, 조상들의 옛 계명에서 ‘살인하지 말아라. 누구든지 살인하는 사람은 재판을 받아야 할 것이다’ 한 것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자기 형제나 자매에게 성내는 사람은, 누구나 심판을 받는다. 자기 형제나 자매에게 얼간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누구나 공의회에 불려 갈 것이요, 또 바보라고 말하는 사람은 지옥 불 속에 던져질 것이다.”(마 5:21,23)고 말씀하신다.

너무나 강력한 말씀이다. 예수님의 산상수훈은 복음이 맞는가? 이 가르침과 율법이 어떻게 연결되는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더 강화된 법의 기준에 미치기 위해서 대체 우리는 대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 예수님의 진정한 의도는 무엇인가?

예수님의 복음은 ‘관계’와 ‘하나님 나라’, 그리고 ‘영광’과 관련된다. 사실, 복음은 법과 규정에서 어느 부분을 지켰느냐 못 지켰느냐에 대한 개인적인 윤리 차원의 문제는 아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복과 하나님 나라, 복 있는 자와 그 영광에 대한 것이다. 예수님은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한 가지 예로 설명하신다.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제물을 드리려고 하다가, 네 형제나 자매가 네게 어떤 원한을 품고 있다는 생각이 나거든, 너는 그 제물을 제단 앞에 놓아두고, 먼저 가서 네 형제나 자매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제물을 드려라”(마 5:23,24)

예수님은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음을 알려준다. 율법과 복음의 강령은 동일하다. ‘마음과 뜻과 정성과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와 ‘그와 같이 네 이웃(형제)을 사랑하라’다. 율법의 정신이나 예수님의 복음은 동일한 맥락에 있다. 결코 분리되지 않는다. 사랑은 관계이며, 사랑은 행동이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이것을 따르는 것이다. 그럴 때 나를 통해 그리고 내가 사랑한 그들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

수십 년 전 예수님을 만났을 때 나는 너무나 뜨거운 사랑을 느꼈었다. 그 넘치는 사랑의 열정에 이끌려 신학교에 입학하고 졸업한 후, 전도사로서 첫 교회에 부임했을 때다. 나는 주님이 옳으시다는 분명한 진리를 위해 목숨을 걸었다. 그래서 열정을 다해서 외쳤으며, 가만히 있지 않고 당면한 일들을 실행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얼마 후 주님은 내 마음 안에서 이렇게 물으셨다. “무엇이 옳은지가 먼저가 아니다. 네가 아버지의 사랑을 갖고 있느냐가 먼저다.”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는 진리의 명제를 굳게 붙들고 있던 나에게, 그리고 주님을 만난 열정으로 행동하는 나에게 주님은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복음이 무엇인지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주님은 눈에 보이는 형제(성도)들의 관계가 얼마나 중요한지, 그리고 그것이 곧 왜 하나님을 사랑하는 증거가 되는지를 깨닫게 해 주셨다. 하나님의 법은 우리가 당신과의 온전한 관계를 수립하는 것이고, 또한 내 형제와의 온전한 관계를 세우는 것이다. 사랑 안에서 행하는 관계다. 만일 이 관계가 제대로 수립되면 천국이 확장되고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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