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광근 장로, 파독광부, 최초파리연합교회개척, 파리최초식당

  • 입력 2021.05.12 19:14
  • 수정 2021.08.22 00:51
글자 크기
프린트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야 우리 여기서 예배보자"로 시작한 파리 최초 한인교회

[파독광부이며, 파리 최초의 한인교회 설립자이신 파리연합교회 박광근장로님최원영목사(본헤럴드대표)는 본푸른교회 주일예배에서 만났다. 그는 믿음으로 삶의 역경을 개척한 신앙인이다. 60년대 가난한 한국의 젊은이가 유럽에 가서 견뎌야했던 아픔들이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박 장로님은 아픔보다는 하나님의 은혜로 설명하고 있다.]

박광근 장로, 파리연합교회장로, 프랑스 한인회 감사, 프랑스 SIPLAST(쉬트방수제품 생산업체)한국지사장(1998-1999), 프랑스다국적회사 VEOLIA 한국지사(1999-2001), 수에즈그룹 DEGEMONT 한국지사장(2002-2013), 법부법인 주원 고문&관정 이종환 교육재단 고문역임, KDI 고문역임
박광근 장로, 파리연합교회장로, 프랑스 한인회 감사, 프랑스 SIPLAST(쉬트방수제품 생산업체)한국지사장(1998-1999), 프랑스다국적회사 VEOLIA 한국지사(1999-2001), 수에즈그룹 DEGEMONT 한국지사장(2002-2013), 법부법인 주원 고문&관정 이종환 교육재단 고문역임, KDI 고문역임

 

Q. 장로님을 뵙게 되어서 반갑습니다. 신앙생활은 언제 하셨는지, 파독 광부로 가게 된 이유가 있다면,

어려서부터 새문안교회(당시, 강신명목사)에 출석을 하였다. 신앙생활은 나의 삶의 중심에 있었기에 평생 교회를 사랑하며, 교회 중심의 삶을 살았다.

60년대 한국 형편이 매우 어렵고, 직장을 다녀도 보수가 너무도 형편없던 시절이다. 보이스 카웃에 근무했는데, 제대 후 복직이 안 되어서, 다른 직장 구하려고 하다가 서독 광부 모집 광고를 보고 합격하여, 6673027나이에 군 제대를 하지마자 김포공항 출발하여 서독광부의 삶을 시작했다.

독일에서의 광부 일은 어렵지 않았다. 탄맥이 수평으로 누워 있기에 석탄을 캐기 위해서는 지하 1000미터까지 수직으로 내려가서, 수평으로 몇 킬로 가면 작업장이 나온다. 환기 시설이 생각보다 잘된 작업장이었다.

독일 가서 루르 지방에 있는 나일강변 뒤스부르크(Duisburg)에 있는 당시 이영빈 목사님이 시무하는 한인교회를 3년간 출석하였다.

Q. 최초의 파리 한인교회를 개척 설립하게 된 과정을 듣고 싶다.

파독 근무 3년을 마치고, 파리 소로본 대학으로 유학을 갔다. 소로본 대학 철학과에 입학했지만 언어가 어려워서 언어과정을 2년 마치고 공부를 하려고 했는데, 자녀들과 함께 먹고 사는 일이 더 급했다. 학업을 중단하고 일을 하게 되었다.

69년 당시 파리에는 한인교회가 없었고, 캐토릭 한인성당만 있었다, 성당에 가면 김치와 깍두기와 밥을 먹을 수 있었다. 69년 당시 파리에 거주하는 한인은 180명 정도였다. 교회 예배에 익숙했는데, 성당에 가서 미사를 드리다보니, 찬양도, 설교도, 기도도 개신교에서 느꼈던 큰 감동이나 은혜를 경험하기가 쉽지 않았다.

72년도 우리 집에 박진만 선배를 초대하여 함께 식사를 하게 되었다. 점심을 먹다가 야 우리 여기서 예배보자”, 이것이 파리연합교회의 시작이 되었다. 2022년이면 창립 50주년이 된다.

그날 감동적인 예배를 드렸다. 처음에는 한 달에 한번 정도 모여 예배를 드렸다. 시간이 지나니 작은 공간 거실에 50-60여명이 모여서 예배를 드렸다. 우리 집 거실에서 예배를 드리다가, 장소가 협소해서 파리 시내에는 넓은 공원이 많기에 야외예배를 드렸다. 주일에는 야외 공원 예배 후, 도시락을 함께 나눴다. 이름도 없고 가난한 나라에서 온 동양의 한국인들이 함께한다는 그 자체가 위로가 되었다. 때로는 비와 바람으로 인해 야외 예배를 계속적으로 드리는 것이 어려웠다. 세느강(Ia Seine) 근처, 미국교회에 사정하여 예배를 드리다가, 나중에는 파리 소로본(Sorbon) 대학 근처에 있는 프랑스 개혁 교회를 빌려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개척 초기에 파리연합교회는 목사님 없이 시작되었다. 한국에서 신학을 한 분이나, 집사님이 돌아가면서 예배를 인도하며 드렸다.

이근상 학장(고려신학교)이 파리에 오셨고, 야외 예배를 설교를 하게 되었다. 그때 화란에서 유학중인 자기 제자인 변의남 목사를 소개해서 주일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변 목사님이 캄펜에서 파리까지 기차 타고 7,8시간 오셔서 예배를 인도하셨다. 처음에는 기차로 오셨기에 참으로 힘들게 사역을 하셨다. 나중에는 비행기 표를 사드리고 2주에 한 번 올 수 있도록 했다. 참으로 교회 형편도 성도들의 형편도 어렵던 시절이었다.

파리연합교회 첫 번째 공식적으로 부임한 분은 장희남 목사님이다. 그 후 8분 목사님이 다녀가셨다. 49년 동안 김신, 한동욱, 홍남표, 이찬, 정진호, 권영준, 한상현(현 담임목사)목사님이 파리연합교회를 시무했다.

홍남표 목사님이 오시면서 성결교회에 가입하게 되었고, 그 이후 성결교회 목사님들이 담임목사님을 맡고 계신다. 1992년 20주년 교회 창립 기념일에 저와 김용호 장로가 임직하는 기쁨을 주셨다.

파리연합교회는 과거 300,400명 씩 출석하는 교회로 파리의 중심 역할을 했던 교회였다. 파리의 장자 교회로서 사역을 감당했었다.

박광근장로, 아내 이상희 권사
박광근장로, 아내 이상희 권사

Q. 장로님이 파리 최초의 한인 식당을 하셨다고 들었다.

파리연합교회는 72년에 시작했고, 73년에 유럽 최초이며, 파리 최초의 오아시스한인 식당을 열었고, 식당은 대사관 근처에 있었고, 식당은 만남의 장소로서 광장 역할을 감당했다. 파리에는 현재 200여개가 넘는 식당이 성업 중이다. 한류 붐이 일어나면서 한국에 대한 인기가 좋아, 프랑스 손님들이 한식을 매우 좋아한다.

Q. 한국의 고속철도와 하수종말처리장 건설에 큰 기여를 했다고 들었다.

1982년 파리 한인회 회장, 83년 평통자문위원, 올림픽후원회 회장을 맡아서 국가를 위해 봉사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하나님이 도와주셔서 큰일을 하게 되었다.

올림픽 때 역할을 많이 하다 보니, 프랑스 그룹과 연결되었고, 파리 신도시 라데팡스(La Defense) 투자 유치하다보니 한국 그룹을 알게 되었다. 당시 프랑스 무역 센터에 사무실이 있었기에, 무역 센터 안에서 그룹 관계자를 만나게 되었다.

1989년 경부고속철도건설사업과 관련하여 프랑스 SIPLAST(쉬트방수제품생산업체)의 한국 지사장으로 발령받아 서울에 오게 되었다. 당시 한국 기업에 프랑스 고속철도 기술이전 하는데 많은 역할을 감당하게 되었다.

수에즈 운하, 수에즈 그룹 토목건설
수에즈 운하, 수에즈 그룹 토목건설

그 후 2000년 초 프랑스 3번째 규모의 수에즈 그룹 DEGREMONT 한국 지사장으로 근무하게 되었다. 수에즈 그룹은 환경사업으로서는 세계 1등 기업이고, 이집트에 있는 수에즈 운하(Suez Canal)를 건설하였다. 팔당 정수장, 부산 덕산정수장, 화명정수장에 데그레몽 기술로 수도물을 생산 공급하고 있다. 부산 중앙, 동부, 양주 신천 하수종말처리장도  수에즈 그룹의 기술로 건설하게 되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내 인생을 설명할 수 없다.

박광근 장로 4형제들
박광근 장로 4형제들

Q. 가족에 관해서 들려 달라

저의 형제자매들은 41녀이다. 막내 여동생만 서울에 살고 있고, 형님은 미국으로 이민 가서 샌프란시스코에서 교회를 2개 개척했다. 그리고 파리에 3형제가 함께 모여 산다. 또한 조카들도 유학을 와서 자리 잡고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다. 3형제들은 파리에서 여행사, 식품점, 무역회사를 운영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로 큰 복을 받았다.

나는 딸1, 아들 2명을 낳았다. 박미선(큰 딸), 독일로 광부로 떠난 후 5년만에파리에서 상봉했다. 파리에서 유치원부터 대학원까지 졸업했고, 변호사 자격증을 취득한 후 한국 청년과 결혼하여 한국에서 거주한다. 대원외고 불어선생님으로 학생들을 15년 정도 가르쳤다. 큰 딸의 3남매들도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으며, 하나님이 공부의 은사를 주셔서 미국 명문 대학을 다니고 있다.

두 아들은 파리에서 태어났다. 대학원을 졸업한 후 직장생활을 하고 있다. 큰 아들은 호텔경영학을 전공했고, 국방성 장관 비서도 하고, 지금은 식품회사 중역으로 근무하고 있다. 작은 아들은 회계학을 전공하고 미국 회사에 근무하고 있다. 기도제목이 있다. 두 아들이 아직 결혼을 하지 않았다. 아내는 불어를 능숙하게 하지 못해, 한국말을 하는 한국 며느리를 얻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아들들은 프랑스에 태어나서 프랑스 교육을 받았기에 사고가 프랑스 사람이다. 한국 사람들과 정서적 차이가 많이 있다. 아내는 한국 며느리를 원한다. 아내의 바람과 자식들의 마음이 하나 되어 주님이 원하시는 가정을 세우는 것이 나의 기도제목이다.

Q. 장로님의 마음에 담고 있는 사명이 있다면?

나의 소원이며 기도제목이 있다. 파리연합교회를 건축하는 것이 나의 목표이다. 파리연합교회는 파리 최초의 교회이다. 파리 최초의 교회였기에 많은 유학생들, 대사관분들, 기업체관계자들이 오셔서 신앙생활을 했던 교회이다. 파리연합교회를 건축하여 든든한 교회로 성장하는 것을 보는 것이 노년의 나의 꿈이며 기도제목이다. 후에 세워진 교회보다 성장하지 못한 이유가 있다면, 목사님들이 장기 목회보다 다른 사역지가 나오면 교회를 옮기는 경우가 많았다. 이것도 하나님의 뜻이라 받아들인다. 파리연합교회는 최초의 교회로서 다른 교회가 개척하는데 못자리 역할을 많이 했다. 뿐만 아니라, 파리연합교회를 거쳐서 좋은 교회에서 사역하는 목사님들을 뵐 때마다 그것도 큰 기쁨이 된다.

Q. 80세의 연세에도 불구하고 한국에 오신 목적이 있다면

교회 50년사를 준비하기 위해 한국에 왔다. 파리연합교회를 거쳐 가신 목사님들의 사진과 말씀을 담기 위해서이다. 파리 최초의 교회가 저의 가정에서 태동했다. 2022년이면 교회 50 주년이다. 기념 역사책을 만들어서 후손들에게 전해주는 것도 나의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팔순기념감사예배
팔순기념감사예배

또한 자서전을 남기고 싶다. 나의 삶을 정리하는 시간을 가지기 위해서이다. 아주 작은 달란트를 주셨는데, 하나님이 내 인생에 개입하셔서 큰 기쁨을 주셨다. 그 기쁨의 흔적들을 남기고 싶다. 나의 삶의 최고의 자본은 첫째가 하나님이고 두 번째가 사람이다. 사람 관계를 소중하게 여긴다. 하나님은 파리연합교회를 통해서 너무도 소중한 인연들을 주셨다. 대사관, 코트라 주재원, 유학생, 기업인 등과 만남이 이루어졌다. 그것이 교회였다. 교회를 통해서 좋은 분들과 인간관계를 열어주셨다. 나의 인생에서 교회는 나의 전부였다. 또한 교회를 통해서 나를 만들어 가신 주님의 놀라운 계획과 섭리를 적어내고 싶다.

저작권자 © 본헤럴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