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언어 소통의 선물을 받은 자들(행 2:1-8)
120명으로 이루어진 소수의 기독교인들은 각국에서 순례 차 온 경건한 유대인들과 소통하는백성이 되었다. 순례 차 예루살렘을 방문한 그 경건한 유대인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유대인의 말 히브리어를 알아듣지도 못하고 사용하지 못하는 각국에서 살고 있는 이민 유대인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유대민족으로 유대의 고유명절을 철저하게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까지 온 경건한 유대교인들이다. 이번에 그들은 오순절 절기를 지키기 위해서 예루살렘을 방문 중에 있다. 오순절 절기는 몇 주간 진행된다. 오순절 축제는 보리 추수기간에 이루어지는 맥추감사절이라고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이 축제는 유월절 이후 50일 만에 이루어지는 축제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출애굽한 지 50일 만에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았던 날이다. 그래서 이 날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수여받는 율법수여 축제일이기도 하다.
그런데, 왜 그들은 먼 나라로 흩어져 사는 이민 신세가 되었는가? 그 이유가 되는 최초의 기사는 창 11장에 있다. 바벨탑 사건 이후로 백성들이 흩어지게 된다. 바벨탑사건에서 그들이 흩어지게 된 이유가 무엇인가? 언어의 혼잡으로 인해서 그들이 쌓고 있던 바벨탑 공사가 중단되었다. 그리고 하나의 언어로 바벨탑공사를 위해 모였던 그들은 언어가 혼잡하게 되므로 서 하던 공사를 중단시킬 수밖에 없었다. 바벨탑 공사가 중단되면서 그들은 모두 흩어졌다. 그들이 흩어지는 주된 이유는 서로 간에 통할 수 없을 정도로 언어가 혼잡되었다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그 이후로 세계 각국으로 흩어진 채로 살게 되었는데 그 이후로 유대말인 히브리어를 쓸 수 없게 되고 그들이 사는 나라의 언어를 사용하게 되었다.
오늘 본문은 그 천하각국에서 온 경건한 유대인들 곧 이민 유대인들이 하고 있는 놀라운 경험을 알려주고 있다. 그들이 놀라고 있는 것은 히브리어를 할 줄 모르는 자신들이 히브리어를 사용하는 본토 유대인들의 말을 알아듣고 있다는 사실을 서로 확인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천하 각국에서 살면서 현지어를 사용하는 그들이 유대 본토에서 본토 말 히브리어로 구사하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이해하고 있었다. 예루살렘의 한 구석에서 나오는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말을 알아들은 그들은 자신들의 신기한 현상에 놀라 다른 동료들을 불러 그 이야기를 듣기 시작했다. 놀라운 것은 그들 동료들 모두다 히브리어로 이야기하는 유대본토민의 이야기를 알아들을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면 천하각국에서 온 히브리어를 사용할 줄 모르고 현지어만 사용하던 이민 유대인들이 알아듣도록 말하고 있는 그 본토 유대인들은 누구인가?
오늘 마가다락방에서 모여 있었던 120명의 사람들 중에 속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오순절까지 마가다락방에서 무엇을 했는가? 그들은 예수님이 승천하실 때 주시는 말씀대로 한 자리에 모여 예수님이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며 기도하고 있었던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기도하는 중에 하늘로부터 불의 혀 같은 것이 내려와 모인 사람들의 각자의 머리위에 임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방언을 말하게 되었다. 오늘 이민 유대인들이 알아듣는 본토유대인의 말이란 마가다락방에서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방언을 받고 방언을 말하는 사람들의 말이었다. 중요한 것은 각국에서 온 현지어를 쓰는 그들이 그들의 현지어로 본토인들이 말을 알아듣는 그런 방언이었다는 점이다. 그들은 마가다락방에서 나온 기독교인들과 소통하는 일이 쉽게 이루어졌다. 이 소통은 무엇인가? 소통의 부재를 경험한 유대인들이 바벨탑 사건 이래로 역사적으로 최초로 경험하는 소통이었다. 그들은 하늘에서 내려온 성령의 임재를 느낀 예수의 사람들의 언어를 알아들을 수 있게 되었다. 그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들은 기독교인들을 술취한 자들이라고 하여 조롱했으나 그 말을 알아듣는 그들은 기독교인들을 새 술에 취한 사람들이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그들이 어떻게 이같은 소통의 언어를 선물로 받을 수 있었는가? 예수님의 부활과 다시 오실 주님의 재림을 믿고 한 자리에 모여서 힘써 기도하였기 때문이다. 힘서 기도하는 그들에게 비록 소수이지만 하나님은 놀라운 소통의 선물로서 언어를 새롭게 하여 주셨다.
2. 하나님의 상속자(롬 8:12-17)
바울이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고 하면서 그가 당하고 있는 고난을 미래의 영광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값진 것이라고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복음을 위해 일하는 사도임에도 불구하고 바울에게는 다른 사도들 보다 더 많은 고난이 있었다. 바울의 적대자들(opponents)은 고난을 몰고 다니는 바울을 실패자로 보았다. 기독교인으로서 성공적인 모델이 아니었다. 그들이 바울을 실패자로 몰아가는 잣대는 무엇인가? 그것은 그들이 생각하는 복의 개념과도 상관이 있다. 하나님의 일꾼이 받는 보상이 복인데 바울의 적대자들이 생각하는 복은 물질과 관련이 있었다. 하나님의 복받는 일꾼이라면 당연히 물질과 육신 상의 일이 잘되어야지 궁핍과 어려움을 겪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이 물질로나 육신 상으로나 고난을 겪는 것은 사도로서 그리고 하나님의 일꾼으로서 결격이 된다고 그들은 생각했다. 한마디로 바울은 복을 덜 받은 사람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바울은 이 점에 대하여 확신에 찬 증언을 하고 있다. 하나님의 자녀는 물질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 받는 사람이다. 하나님의 영의 인도를 받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육신의 기준으로 평가할 수 없다. 왜냐하면 육신을 의미하는 이기심과 욕심과 착취의 기준대로 하는 자는 자유하는 자녀가 아니라 육신에 빚진 종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자녀의 보상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상속자이다. 이것은 물질적인 보상이 아니라 관계적 보상이다.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하나님의 임재가 약속된다. 소속감, 용서 그리고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확신은 하나님의 자녀가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를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약속받는 보상이요 소망이다. 바울은 이같은 보상을 누리는 자녀로서 물질과 육신 상에 손실을 당하는 고난 때문에 위축된 것이 아니라 도리어 고난을 기쁨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3. 하나님의 창조활동(시 104: 24-35)
본 시편은 창조주로서 하나님을 찬송하는 찬송시다. 하나님이 찬송을 받아야 하는 이유는 하늘에 휘장을 치시며 땅의 기초를 놓으시며 물의 경계를 정하여 혼돈에서 질서를 주신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 창조된 세계 속에서 생명체와 생물들 그리고 인생들이 생명을 유지할 수 있도록 계속적으로 생기를 불어넣어 주셔서 생명활동을 하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주의 영을 보내어 그들을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 주의 영은 창 2:7의 생기와 같은 말로 히브리어 ‘루아흐’로 ‘바람, 호흡’의 의미를 지닌 성령이다. 행 2장에서 내려온 성령과 동일한 개념이다.
그런데 본 시편에서 주의 영이 창조하실 때에 그 “창조하다”라는 말로 쓰인 “바루크(בָּרֵאוּן)”는 동사 “바라(בָּרָא)”의 미완료형이다. 여기서 하나님의 창조가 완료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계속적으로 창조활동을 하신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의 성령은 오늘도 생명체들이 생명을 유지할 수 있도록 생명을 공급함으로써 미완된 창조사역을 완성해 가신다. “여호와의 영광이 영원히 계속할지며 여호와는 자신께서 행하시는 일들로 말미암아 즐거워하시리로다.”
4. 세상에서의 처신(요 15: 26-27)
선교현장에서 예수를 전하다가 감옥으로 이끌려 가서 재판을 받게 된다면 어떤 말로 준비해야 하나요? 오늘 본문은 아무 준비 없이도 가능하다고 한다. 그 일이 어떻게 가능한가? 오직 변호해 주실 자는 하나님의 성령이라고 한다. 성령께서 하실 말씀을 주신다는 것이다. 여기에 우리들의 두려움이 있다. 믿음이 없는 자는 당연 두려울 수 밖에 없다. 예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지 못하는 자는 두려움을 극복할 길이 없다. 믿음의 문제가 발생한다. 예수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만이 두려움을 이기고 법정 앞에서 담대할 수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보혜사 곧 변호사가 되어 대답할 말을 주실 것을 믿고 상황에 지혜로운 대처를 할 수 있다. 문제는 오늘날 기독교인으로 예배생활에 정부로부터나 세상으로부터 방해를 받지 않는 데 이 본문의 적용이 어떻게 가능한가? 질문할 수 있다.
그런데 오늘날 종교생활의 자유를 누리는 사회에 우리가 살고 있지만 예수믿는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세상의 미움을 받는 경우가 있다. 교회의 비판거리만을 찾는 안티 기독교인들의 미움을 받고 있는 것이 또한 현실이다. 그리고 안티기독교인들의 교회 비판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주변에 많이 있다. 그들은 세상이고 세상은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한다. 하나님은 세상은 사랑하였으나 세상은 그 사랑을 죽인다. 예수님은 세상이 사랑을 죽인 첫 번째 사례이다. 세상 앞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들이 어떻게 처신해야 할 것인가?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증언하느니라”
“사람들이 너희를 끌어다가 넘겨 줄 때에 무슨 말을 할까 미리 염려하지 말고 무엇이든지 그 때에 너희에게 주시는 그 말을 하라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요 성령이시니라”(막 13: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