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극단적 외식자들(막 7:1-8, 14-15, 21-23)
예수님의 제자들이 음식을 먹기 전에 손을 씻지 않은 것을 지켜보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에게 질문하였다.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장로들의 전통을 준행하지 아니하고 부정한 손으로 떡을 먹나이까?” 예수님의 대답은 이사야서를 인용하여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고 하였다.
그들의 정결법 전통을 잘 지킬 수 있도록 제자들을 지적하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무슨 잘못을 하고 있는가? 오늘 본문에 나온 그들은 극단주의적 외식자들이다. 왜냐하면 당시에 법으로 부정한 손으로 음식을 먹는 사람은 음식을 먹은 후에는 깨끗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그들은 정결례에 집착하는가? 일반 음식이아니라 액체를 만지거나 먹었을 경우가 1급 부정으로 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들이 우려하는 것은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는 사람이 액체를 만졌을 수도 있다고 가정하고 그 일을 미리 막자는 것이다. 이처럼 있지도 않은 일을 추정하여 염려하고 우려하여 사람들을 재판에 세우려고 하는 것이 문제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무엇이든지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은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되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2. 실천하는 자의 복(약 1:17-27)
우리들이 생활하는 가운데 무의식적이고 본능적인 요소들이 있다. 남의 말을 듣기 보다 급히 말하는 것과 화내는 일이다. 우리가 듣지 않고 급히 말하고 화내는 일을 먼저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자기 방어 기재 때문으로 보인다. 자기 방어기재는 어디서부터 온 것인가? 내면 속에 있는 크고 작은 상처로 인한 고통을 피하기 위한 수단으로 보인다. 아무런 대응도 할 수 없이 연약할 때에 알게 모르게 외부로부터 받은 억압에 대한 두려움을 피하기 위한 몸부림 때문일 것이다. 이같은 방어기재에 익숙한 우리는 우리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우리에게 주어지는 말씀에 대해서도 거부하고 피하려는 습성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야고보 사도는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고 한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고 한다. 이유인즉 말씀을 받음으로써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것이 영혼에 급선무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의란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다른 말로 구원받는다는 말과도 통하는 말이다.
누가 하나님과 바른 관계 속에서 구원의 열매를 맛보는 자가 될까? 거울 앞에서 자신의 모습만 쳐다보고 잊어버리는 자처럼 되고서는 불가능하다. 거울 속에서 자신의 모습만 보고는 다시금 잊어버린다는 것은 순간 깨달음을 느끼다가 조금도 실천으로 옮기지 않는 것을 말한다. 그렇게 많은 말씀을 듣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 치의 변화도 없이 반복적인 삶을 사는 이유는 무엇인가? 자기 연민, 어떤 책임이나 도덕의식도 없는 자기 방종 때문이다. 자기 연민 방종은 억압적인 율법이나 말씀에 대한 자기 방어 곧 거부반응의 반복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은 자기 연민과 자기 방어를 넘어서 조금씩 변화에 마음을 열고 행동을 옮기는 자는 자유케 하는 말씀 곧 그리스도의 법을 통해서라고 한다.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천하는 자니 이 사람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3. 공평하신 하나님(시 45:1-2, 6-9)
본 시는 메시야 시다. 표제어는 “지휘자를 따라 소산님에 맞추어 부르는 고라 자손의 노래 마스길 사랑의 노래”(표준새번역)다. 표준새번역 2절에서는 “사람이 낳은 아들 가운데 임금님만이 멋지신 분, 하나님께서 임금님에게 복을 주셨으니, 님의 입에서는 은혜가 쏟아집니다”. 사람이 낳은 아들 가운데서 오로지 멋지신 임금님은 하나님께서 복을 주셨기 때문이다. 이 임금님이 메시아 예수님이다. 본 시편은 메시아에 대한 예언이다. 메시아는 어떤 모습으로 오실 것인가?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는 영원하며 주의 나라의 규는 공평한 규이니이다. 왕은 정의를 사랑하고 악을 미워하시니 그러므로 하나님 곧 왕의 하나님이 즐거움의 기름을 왕에게 부어 왕의 동료보다 뛰어나게 하셨나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시고 다시 일으킴을 받아 하늘에 오르시어 영원한 하늘 보좌에 앉으신 메시아이다. 이 메시야는 하나님이 기뻐하는 종으로 어떤 왕보다도 천사보다 뛰어난 분이다. 그 이유는 이 메시야는 악을 미워하고 정의를 사랑하는 분이기 때문이다. 이 시편 구절이 메시아에 대한 예언인 것을 입증하는 신약의 책은 히브리서이다. 히브리서 1장 8절-9절은 다음과 같다. “아들에 관하여는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는 영영하며 주의 나라의 규는 공평한 규이니이다. 주께서 의를 사랑하시고 불법을 미워하셨으니 그러므로 하나님 곧 주의 하나님이 즐거움의 기름을 주께 부어 주를 동류들보다 뛰어나게 하셨도다.”
4. 신랑되신 예수(아가 2: 8-13)
저자는 이제 막 결혼식을 올린 남녀 간에 흐르는 사랑 이야기를 애정의 언어로 묘사하고 있다. 저자는 애인을 백합화화와 사과나무에 비유하고 있다. “여자들 중에 내 사랑은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 같도다”. “남자들 중에 나의 사랑하는 자는 수풀 가운데 사과나무 같구나 내가 그 그늘에 앉아서 심히 기뻐하였고 그 열매는 내 입에 달았도다”. 이 시의 저자는 지혜의 왕 솔로몬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우리에게는 모순으로 보이는 부분이 있다. “내 사랑이 원하기 전에는 흔들지 말고 깨우지 말지니라” 한다. 그리고 8절에서는 “내 어여쁜 자아 일어나서 함께 가자”하고 잠자는 자를 깨우고 있다. 사랑하는 자 신부가 행여나 잠을 깰까봐 조심스럽게 들어오는 신랑이 이제 깊이 잠들어 있는 신부를 일어나 같이 가자고 깨우고 있는 것일까? 먼저 사랑의 감정은 논리를 초월한다는 이미지를 주고 있다. 사랑하면 잠을 설칠까 조심조심 까치걸음을 걷기도 하고 좋은 봄 날씨의 아름다운 풍경을 혼자 보기 아까워서 함께 보고 느끼기 위해 깨울 수도 있다.
“겨울도 지나고 비도 그쳤는데”. 춥고 긴 겨울이 지났고 화창한 봄날에 꽃이 피고 새들이 노래하는 데도 사랑하는 자가 계속 잠에 빠져 있다면 그 봄날의 아름다움을 어떻게 느낄 수 있겠는가? “나의 사랑하는 자가 내게 말하여 이르기를 나의 사랑, 내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지면에는 꽃이 피고 새가 노래할 때가 이르렀는데 비둘기의 소리가 우리 땅에 들리는구나. 무화과나무에는 푸른 열매가 익었고 포도나무는 꽃을 피워 향기를 토하는구나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깊이 잠든 신부는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 지 알 길이 없다. 잠자고 있는 신부는 이 화창하고 아름다운 봄날에 꽃이 피고 새들이 노래하는 장면이 잠시 지나가게 되는 한 철이라는 것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신랑은 신부가 눈을 뜨고 일어나기를 간절히 소원하면서 기다리는 시간도 가졌다. 그리고 “일어나 함께 가자”고 깨우고 있다.
그렇다면 신랑과 신부에 해당하는 상징적 의미는 무엇인가? 이 해석은 다양하게 될 수 있다. 유대인들은 신랑을 야웨 하나님으로 신부를 백성들로 해석한다.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신랑은 그리스도요 신부는 교회이다. 우리가 병이 날 정도로 누구를 사랑해 본 적이 있는가? 오늘 그리스도는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고 있다. 병이 날 뿐만 아니라 자신의 몸을 십자가에 내어주기까지 우리를 사랑한다. 봄날에 핀 꽃과 새소리의 장면처럼 아름다운 천국의 장면이 가까이 도래한 때를 잠든 우리 영혼이 일어나 맛보기를 원한다. 우리 곁에서 애타게 기다리기도 하고 일어나라고 깨우기도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