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명의 떡(요 6:35 41-51)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이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광야에서 만나를 먹은 자는 왜 죽었는가? 그리고 지금 하늘로부터 오는 떡을 먹는 자가 살게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광야에서 유대인의 조상들은 먹을 것과 마실 것이 없을 때에 모세에게 불평을 하였다. 그들의 불평은 애굽 생활을 떠올리며 애굽 시절에 먹던 것과 만나를 비교할 때 절정에 이르렀던 것 같다. 애굽시절을 떠올리고 하늘에서 내려온 음식을 땅의 음식과 비교하여 불평한 것은 모세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약화되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유대인들은 그 조상들이 모세와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불평을 하듯이 예수님을 믿지 못하고 불평하고 있다. 그들은 무엇 때문에 예수님에게 반발하고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가?
예수님이 하늘로부터 내려온 떡이라고 말씀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예수님을 평범한 동네 아이로 자라나 보통의 청년으로 성장한 것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에 하늘로부터 내려왔다고 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고 있다.
“이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 자기가 지금 어찌하여 하늘에서 내려왔다 하느냐”.
그들은 눈 앞에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으나 땅에서 성장한 인간예수만 알았을 뿐 하늘로서 온 메시아 되신 예수님을 믿지 못하고 있다. 그들이 예수님 가까이에 위치하고 있는 것 같으나 실상 그들의 마음은 예수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다.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거나 이끌림 받은 자들이 되지 못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마치 만나를 먹고도 모세와 하나님을 믿지 못한 유대인 조상들과 다를 바가 없는 사람들이 되었다.
어떻게 하여야 우리가 믿음을 회복하고 하나님과 관계를 회복하는 영성의 소유자가 될 수 있을까?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믿는 것 밖에 없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대사로서 우리를 살리기 위해 하늘로부터 온 떡임을 믿는 것이다. 이 떡을 먹는 자가 영생을 소유하게 된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
2. 성례전적 삶(엡 4:25-5:2)
에베소서의 앞 장들이 이론 장이라고 한다면 오늘 본문은 에베소서의 실행 장이다. 실행부분은 25절에 “그런즉”으로 시작하여 명령형으로 구성된다. 분을 내어도 죄짓지 말라, 도둑질 말라, 선을 행하라, 덕을 세우고 은혜를 끼치는 선한 말을 하라, 성령을 근심시키지 말라, 사랑하라.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가 되었기 때문이다. 떡과 잔의 상징을 통해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성찬공동체에 참여하는 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떡과 잔을 통해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하는 신앙의 사람들은 성례전적 삶(sacramental life)을 살도록 부름 받은 사람들이다.
성례전적 삶의 모델은 자기희생을 통해서 인류를 사랑하고 구원했던 그리스도이다.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3. 다윗의 죄의 결과(삼하 18:5-32)
다윗이 밧새바를 범하고 그 남편 우리아를 살인 하였을 때 하나님은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하셨다.
“이제 네가 나를 업신여기고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를 빼앗아 네 아내로 삼았은즉 칼이 네 집에서 영원토록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고 여호와께서 또 이와 같이 이르시기를 보라 내가 너와 네 집에 재앙을 일으키고 내가 네 눈앞에서 네 아내를 빼앗아 네 이웃들에게 주리니 그 사람들이 네 아내들과 더불어 백주에 동침하리라(삼하 12:10-11절)”.
오늘 본문은 다윗에게 선지자 나단이 한 말씀이 이루지는 장면이다. 다윗의 아들들끼리 왕자의 난이 일어나 큰 아들이 셋째 아들 압살롬에게 살해당하고 왕 다윗은 셋째 아들 압살롬에게 왕궁을 빼앗기고 피신을 하고 그 아들이 다윗의 후궁들을 범하는 일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장군 요압에게 반역한 왕자 압살롬을 너그럽게 대하라는 명령과 함께 체포령을 내렸다. 그런데 요압장군을 비롯한 다윗의 신하들과 마주친 노새를 탄 압살롬은 상수리나무에 머리가 걸려 매달렸고 요압장군과 그 신하들에 의해 죽음을 당했다. 압살롬의 비보는 사독의 아들 아히마스와 구스사람이 앞 다투어 달려서 다윗에게 전하는데 먼저 도착한 아히마스에 의해서가 아니라 구스사람에 의해 다윗에게 전달되었다.
압살롬의 비보를 듣는 순간 다윗의 반응은 몹시 슬퍼하였다. 원수를 진압한 승리의 기쁨보다는 아들의 죽음에 대한 슬픔이 더 컸기 때문이다. 다윗은 문 위층으로 올라가서 대성통곡하며 울었다.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차라리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하였더라(33절)”.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므로 죄를 용서받을 수 있었을지 모르나 죄의 댓가로 다윗의 뼈속 깊숙이 들어온 고통과 통증은 피할 수 없었다.
4. 하나님의 속량(시 130편)
이 시는 다윗이 아들 압살롬과 싸우는 이야기를 배경으로 한다. 한편으로 싸움 중에 승리해야하는 입장에 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아들에 대한 깊은 사랑을 느끼고 있는 다윗의 모습이 나타난다. 그러나 아들 압살롬이 죽었다는 비보를 듣고서 다윗은 마음 깊은 곳에서 탄식의 울음을 터트린다(삼하 18:33).
그같은 상황에서 다윗은 “여호와여 주께서 죄악을 지켜보실진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라고 한다. 왜 다윗은 주께서 죄악을 지켜보신다고 말하고 있는가?
다윗이 아들 압살롬과 전쟁을 치루기 전에 왕자들끼리 싸움 중에 장남이 살해당하였다. 압살롬이 남겨둔 후궁들은 범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있다. 다윗이 자녀들의 싸움으로 인해 수모를 당하였을 때 그가 무엇을 생각해내었겠는가?
다윗이 젊은 날에 권력을 남용하여 범죄했던 장면이 떠올랐을 것이다. 그 때에는 자신의 순간 쾌락을 위하여 권력의 힘으로 백성들을 감쪽같이 숨길 수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이 시퍼런 눈으로 다윗이 지켜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하나님이 그 죄악을 지켜보는 일이 아니라고 한다면 오늘에 이같은 죄의 댓가로 겪는 수모와 고통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는가?
“여호와여 내가 깊은 곳에서 주께 부르짖었나이다”. 다윗은 마음의 깊은 곳에서 통회하는 회개기도를 이미 드릴 수밖에 없었다. 그가 밧새바를 취하고 그 남편 우리아를 살인하는 죄를 지으면서 쾌락으로 순간 하나님을 망각했을 때조차도 하나님은 그 죄의 현장에서 다윗을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다윗은 “주께서 죄악을 지켜보실 신대 주의 누가 서리이까?”라고 하였다.
그러나 다윗이 깊은 심연의 고통 속에서 부르짖는 것은 단순히 고통을 피하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을 회복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임을 깨닫는다. 여기서 다윗은 자신에게 약속하였던 하나님의 신실한 사랑과 죄의 용서에 대한 확신을 한다. “그러나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으로 주를 경외하게 하심이니다”.
다윗의 영혼은 여호와를 기다리며 주의 말씀을 바라게 된다. 파숫군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 하나님의 속량의 말씀을 기다리고 있다. “여호와께서는 인자하심과 풍성한 속량이 있음”을 그가 확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