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교회력, 문철영목사, 양심의 소리와 주변의 소리 사이에서

  • 입력 2021.07.06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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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교회력설교, 성령강림절 여덟째 주간

 

1. 양심의 소리와 주변의 소리 사이에서(막 6:14-29)


  예수님 태어날 때에 베들레헴 지경에 있는 2살 아래 모든 어린아이들을 죽이라고 명하였던 자는 헤롯대왕이었다. 헤롯대왕이 죽은 후에 유대와 이두매 지역은 헤롯 아켈라오가 갈릴리 북동부 지역은 헤롯 필립이 그리고 갈릴리 지역은 헤롯 안티파가 각각 분봉왕이 되었다. 세례요한이 감옥에서 처형당한 후에 갈릴리 온 지역에서 병고치고 기적을 행하고 귀신을 쫓아내는 예수님의 소문은 헤롯 안티바에게 까지 전달되었다. 그 때에 헤롯 안티바는 “세례요한이 죽은 자 가운데 살아났도다 그러므로 이런 능력이 그 속에서 일어나느니라(14절)”고 하였다. 갈릴리 지역에서 하나님 나라 운동하는 예수님을 헤롯 안티바가 세례요한의 부활이라고 믿게 된 이유가 무엇인가? 헤롯 안티바가 왕으로서 부귀와 권세를 누리고 있었지만 그는 밤마다 세례요한이 떠올라서 두려움의 트라우마에 시달렸다고 볼 수 있다. “내가 목 벤 요한 그가 살아났다(16절)”고 한 헤롯의 말이 그 증거다. 예수님을 세례요한의 부활로 믿었던 것이 그 증거다.
그런데, 헤롯이 세례요한의 목을 베게 되었던 경위가 무엇인가? 헤롯이 로마로 여행 중에 이복 동생 헤롯 필립의 집에 묵었을 때 그 동생의 아내 헤로디아와 눈이 맞아 헤로디아를 자신의 아내로 삼은 것이 문제의 발단이다. 당시 갈릴리 지역에서 헤롯에게 이같은 불법을 말할 자 아무도 없었지만 세례요한은 그것은 불법이라고 헤롯의 행위를 비난하였다. 그 일이 있은 후에 헤롯의 생일날에 대신들과 그 지역 많은 귀인들을 초대한 자리에서 모든 이들의 흥을 돋우는 음악과 춤이 있었다.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댄서는 헤로디아의 딸이었고 헤롯이 그 자리에서 그 딸에게 나라의 절반이라도 주겠다고 귀인들 앞에서 선언하였다. 그 딸이 딸린 방에 들어가 그의 엄마 헤로디아와 의논한 후에 내어 놓은 것이 쟁반에 세례요한의 머리를 담아오는 것이었다. 그 딸의 요구는 나라의 절반이라도 주겠다는 헤롯의 공언에 따른 요구였다. 그러나 그 순간 헤롯은 당황했다. 많은 대신들과 귀인들 앞에서 공언한 약속이었기에 그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왕이 일구이언을 하는 모습을 보이게 된다. 반면, 헤롯은 평소에 세례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이라고 알고 존경하고 있었다. “헤로디아가 요한을 원수로 여겨 죽이고자 하였으되 하지 못한 것은 헤롯이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두려워하여 보호하며 또 그의 말을 들을 때에 크게 번민을 하면서도 달갑게 들음이러라(19-20절)”.
그렇다면, 헤롯이 그가 평소에 존경하였던 세례요한을 감옥에서 풀어주기는커녕 목을 베는 지경까지 오게 된 이유가 무엇인가? 사람을 살릴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는 권세를 가진 왕의 자리에 않았던 헤롯은 왜 의인이요 거룩한 자로 믿었던 세례요한을 살릴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평생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자리까지 갔는가? 자신의 마음의 양심의 소리보다 주변 사람의 소리에 더 민감하였기 때문인가? 하나님의 인정받기보다 사람의 인정받기를 더 중시했기 때문인가?

 

2. 하나님 앞에서 춤추는 다윗(삼하 6:1-5, 12-19)


  에디오피아에 선교지 방문을 하고 온 어느 교수님의 이야기를 들었다. 아프리카에 병원이 훌륭한 병원이 세워진 것을 보고 그곳 주민들 모두가 아프리카 특유의 춤을 추었다고 한다. 그 때 그 교수님은 자신은 쑥스러워 춤을 구경만 하고 있었는데 그 병원이 세워지기까지 모든 건축비를 후원했던 교회 목사님은 춤추는 아프리카인들과 함께 덩실 덩실 춤을 추더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다 기쁘고 즐거운 일을 만나면 춤추기를 좋아한다. 우리는 무슨 일에 춤을 추는가?
 오늘 성경에서 왕의 에봇을 입은 다윗이 살갗이 보일 정도로 춤을 추고 있다.  “하나님의 궤를 기쁨으로 메고 오벧에돔의 집에서 다윗 성으로 올라갈새  여호와의 궤를 멘 사람들이 여섯 걸음을 가매 다윗이 소와 살진 송아지로 제사를 드리고  다윗이 여호와 앞에서 힘을 다하여 춤을 추는데 그 때에 다윗이 베 에봇을 입었더라(12-14절)“  창문을 열고 그 장면을 바라보던 다윗의 처 미갈은 왕이 백성들 보는 앞에서 체통없이 에봇을 입은 채로 춤을 춘다고 업신여겼다. 당시의 왕은 권세를 가진 자였다. 에봇을 입은 왕은 그 옷에 걸 맞는 처신을 해야 하였다. 잰걸음을 걸으며 점잖은 자세를 가지는 것이 백성들 앞에 위엄을 지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같은 모든 상식을 깨트리고 지금 에봇을 입은 왕이 에봇 안에 살갗이 보일 정도로 힘껏 춤을 추고 있다. 모든 예전과 절차를 무시한 채 왕이 이같은 처신을 하다니  어떻게 된 일인가? 아비나답의 집에서 하나님의 궤를 수레로 옮기던 중에 법궤를 붙들었던 웃사의 죽음 사건을 본  다윗은 하나님의 궤가 다윗 성으로 들어오는 것을 잠시 중단시키고 오벧에돔의 집에서 석 달 동안 머물게 하였다. 그 후에 즉시 법궤의 들어옴을 두려워했던 다윗이 오벧에돔의 집에 있는 법궤를 다윗 성으로 옮겨오게 하였다. 다윗이 심경에 변화를 일으켜 다시금 다윗성으로 법궤가 들어오도록 한 이유는 무엇인가? 법궤가 있는 동안 오벧에돔의 집이 복을 많이받은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잠시 머물렀던 오벧에돔의 집에 그토록 많은 복을 주었던 법궤가 다윗 궁으로 들어오는 현장에서 다윗은 힘주어 춤을 추고 있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면서 자신이 왕복을 입은 왕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릴 정도로 힘껏 춤을 추었을까? 다윗은 자신의 성으로 들어오시는 하나님을 본 것이다. 자신의 성으로 들어오시는 하나님을 기쁘게 맞이하는 일에 몰두하였던 것이다. 그 순간 왕은 하나님이요 자신은 왕을 맞아 춤을 추는 일을 하는 신하로서 가장 아름다운 춤을 선보이느라고 힘껏 춤을 추었을 것이다. 

 

3. 복을 주시는 하나님(엡 1:3-14) 


  우리가 알기로는 우리 사람이 복을 받는 존재이고 하나님은 복을 주시는 분이다. 그런데, KJV(킹제임스) 3절에서는 “Blessed be the God and Father of our Lord Jesus Christ(하나님 또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는 복을 받으시리로다)”고 되어 있다. “Blessed be”(축복 받게 되다)는 “Bless(축복하다)”의 수동태이다. 하나님이 축복을 수여하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이 축복의 수혜자라는 말이다. 우리들에게 축복을 베푸시는 하나님이 어떻게 축복을 받는 축복의 수혜자가 되어야 하는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주셨기(3절 하반절)” 때문이라고 한다. 하나님은 먼저 우리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신령한 복으로 축복하셨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축복의 소유자인 우리는 우리가 가진 축복을 다시금 하나님까지 축복할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축복하시는 신적 능력이 우리 속에 있다는 말이 된다. 
 그렇다면 우리가 받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늘의 신령한 복은 무엇인가? 그리스도의 피로 값 주고 산 속량 곧 죄사함이다. 우리가 그리스도 피 값으로 하나님의 속량 곧 죄사함을 받은 자라면 우리가 이방인이라고 할지라도 더 이상 죄 아래서 심판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아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하나님의 아들의 지위를 선물로 획득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을 축복한다는 말이 좀 어색하게 들린다. 그래서 “be blessed(축복받다)”는 헬라어 사전을 찾아보니 “εὐλογητός(율로게토스)”로서 “be praised(찬송받다)”라는 의미로도 사용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축복하는 방식 중 하나는 찬송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하나님을 축복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속량 및 죄 사함을 주셔서 하나님의 아들로 삼으신 목적이 여기에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의 찬송이 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서 영광의 찬송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 이것이 우리를 자녀 삼으신 목적이다. 여기에는 유대인만이 아니라 이방인인 우리 모두를 포함한다.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6절)”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12절)”  “이는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속량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14절)”.  

 

4. 예배자의 자격(시 24편) 


  본 시편의 표제는 다윗의 시다. 1절에서는 하나님이 세상 속에 만물과 세상과 모든 사람들의 주인이심을 선언하고 있다. 예배와 영광을 받아야 할 분은 창조주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나서 3절에서는 이 창조주를 예배할 자리에 초대받을 만한 자격을 갖춘 자가 누구인지 질문하고 있다. “ 하나님의 거룩한 산에 오를 자가 누구인가? 그리고 그곳에 설 자가 누구인가?” 그렇다면 예배를 위해 하나님 앞에 설 자는 어떤 자격을 갖추어야 하는가? 이에 대한 답변으로 4절에서 말하고 있다. 개역개정판에 의하면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에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하지 아니하는 자로다(4절),” 반면에 NIV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The one who has clean hands and a pure heart, who does not trust in an idol or swear by a false god(깨끗한 손과 순수한 마음을 가진 자, 우상을 신뢰하지 않거나 거짓 신으로 맹세하지 않는 자”.
 하나님을 예배할 자는 첫째 깨끗한 손을 가진 자, 둘째 순수한 마음을 가진 자여야 한다. 첫 번째 사람의 깨끗한 손 정결례를 지키는 손이다. 손이 범죄하기도 하고 일하기도 한다. 예배자는 삶속에서 먼저 손으로 하는 일을 통해서 하나님의 기쁨이 되어야 한다. 둘째 사람의 마음의 순수성의 중요성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순수한 마음을 가져야 하기 때문이다. 마음이 단단하고 순수하지 못한 자는 하나님의 음성을 분별하여 들을 수 있는 마음의 귀를 상실하기 때문이다. 세 번째 허탄한데 뜻을 두지 않는 자는 우상을 신뢰하지 않는 자이다. 예배자가 드리는 예배가 하나님에게 드려질 것인지 우상에게 바칠 것인지 분별할 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우상 숭배자를 기뻐하지 않기 때문이다. 네 번째 사람은 거짓 맹세하지 않는 자이다. 이 사람은 거짓 신으로 맹세하지 않는 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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