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폭풍 속의 믿음(마 4:35-41)
인디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요한 웨슬리는 아메리카 대륙으로 가기 위해 대서양을 횡단하는 배를 탔다. 1735년 10월에 출발한 배는 이듬해 1월 25일경에 아메리카대륙에 도착하였는데, 도착하기 약 10일 전에 배가 큰 파도를 만나 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웨슬리는 그 순간 죽음의 공포 때문에 두려워 떨었다. 그런데 그 순간 바로 맞은편에 앉아있는 일군의 사람들이 찬송을 부르며 얼굴에 평안한 모습을 유지하는 것을 목격하였다. 그들은 모라비안 교도들이었다. 그 때 웨슬리는 큰 충격을 받았으며 극심한 두려움의 환경 속에서도 평안을 유지하는 믿음을 소유하고 있었던 모라비안 교도들과 교제하면서 경건의 믿음 되찾고 난 후에 평안을 회복하였다.
오늘 본문에서 바다 한 복판에서 제자들과 예수님이 탄 배가 풍랑을 만나고 있다. 제자들이 두려워 떨고 있는데도 예수님은 고물에서 편안히 주무시고 계셨다. 그들은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 하시나이까” 하면서 주무시는 예수님을 깨우기 시작했다. 잠시 후에 바다는 잔잔해 졌다. 예수님께서 바람을 꾸짖으셨기 때문이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하여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고 하셨다. 예수님이 계신 배를 타고 있었던 제자들은 바다를 보고 왜 무서워했는가? 예수님 보시기에 제자들은 믿음이 없었다. 얼마만한 믿음을 가져야 폭풍 속에서도 무서워하지 않고 평안을 유지할 수 있을까요?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
2. 고난의 타당성(고후 6:1-13)
사도 바울과 고린도 교회 사이에 어떤 간극이 있었는가? 고린도 교회 신자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 사도 바울이 권고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헛되이”라는 말에 해당하는 헬라어 “케노스”는 ‘텅 빈“이라는 뜻이 있다.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을 믿음으로 받지 않고 의심하며 받을 때에 그동안 하나님의 구원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이며 그리고 거룩한 백성의 지위가 구원받기 이전의 지위로 되돌아가는 것임을 경고하고 있다. 이같은 경고성 발언을 하는 그 배경에는 사도 바울의 사도성에 대한 의심이 가라앉지 않은 신자들이 아직도 남아있기 때문이다. 고린도 신자들이 보기에 하나님의 사도로서 바울이 겪고 있는 고난은 납득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사도 바울이 하고 있는 사역이 과연 사도로서 타당성 있는 사역인가? 질문하고 있다.
오늘 본문은 이 점에 대하여 사도 바울이 답변하고 있다. 하나님의 사도로서 고난의 자리에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사도의 직분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려고 무엇에든지 아무에게도 거리끼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도리어 모든 일에 고난 받는 것을 자천하여 했다는 것이다. 견딤과 환란과 궁핍과 고난과 매 맞음과 갇힘과 난동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 속에서도 사도 바울은 깨끗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자비함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 없는 사랑과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무장하고 있었다고 해명한다.
결국 사도 바울은 자신이 사도로서 정당성은 자신이 복음을 위해 고난을 겪는 것이 예수님이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을 위해 겪었던 고난과 동일하기 때문임을 주장한다. 그러므로 고린도 교회 신자들이 마음을 넓혀서 사도 바울을 용납하기를 부탁하고 있다. “고린도인들이여 너희를 향하여 우리의 입이 열리고 우리의 마음이 넓어졌으니 너희가 우리 안에서 좁아진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 심정에서 좁아진 것이니라. 내가 자녀에게 말하듯 하노니 보답하는 것으로 너희도 마음을 넓히라”
3. 감사 찬양의 이유(시 9:9-20)
본 시편의 저자는 표제어에서 제시된 대로 다윗이다. 시편은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라고 시작한다. 감사와 찬양을 드려야 할 이유는 하나님이 행하신 일과 하나님이 우주의 왕의 보좌에 앉으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심판은 정의와 정직으로 시행될 것이며 압제당하는 자와 가난한 자들을 해방시킬 것이다. 본 시편에서 다윗은 하나님의 구원을 받은 가난한 자의 모델이다. 그렇다면 다윗이 경험한 여호와 하나님의 행하신 일이란 무엇인가?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오리니”라고 하였다. 다윗이 주의 이름 곧 주의 권세를 경험한 사건은 블레셋 장수 골리앗과의 전투에서다. 다윗은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물맷돌로 골리앗을 쓰러뜨린 경험이 있다. 다윗은 이 경험에 기초하여 “여호와가 압제당하는 자의 요새요 환란 때의 요새”라고 한다.
그런데 압제를 당하고 환란을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평안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은 아무에게나 가능한 것은 아니다. 다윗은 압제당할 때와 환란 때에 마음에 평안을 빼앗기지 않았다. 그 이유는 그를 숨겨주는 요새가 있었기 때문이다. 다윗은 그 요새를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확신하고 있다. 다윗의 마음에 평안이 빼앗기지 않았던 것은 여호와께 전적으로 맡기고 의지하는 믿음 때문이었다. 풍랑을 만나 불안가운데서 주무시는 예수님을 깨우면서 “선생님 어찌하여 우리를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말씀하셨다. “믿음이 적은 자여 어찌하여 의심하였느냐?” 다윗이 어릴 적부터 여호와를 의지하는 믿음의 훈련을 받은 것이 평생 동안 여호와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를 받게 된 비결이었다.
“여호와는 압제를 당하는 자의 요새이시요 환난 때의 요새이시로다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오리니 이는 주를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아니하심이니이다. 너희는 시온에 계신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의 행사를 백성 중에 선포할지어다.”
4. 절대 신앙(삼상 17:32-49)
키가 3m 15cm나 되는 신장에 57kg 무게 나가는 갑옷을 입고 창날만 6.84kg 나가는 큰 창을 들고 놋 투구를 쓰고 어깨에 놋 단창을 맨 한 장수가 에베스담빔 진에서 나왔다. 그 적장이 유명한 골리앗이다. 엘라 골짜기에 진 쳤던 사울과 이스라엘은 거대한 적장 골리앗 앞에서 놀라서 두려워 떨고 있었다. 사울왕은 전열을 벌리고서 적장을 맞설 장수를 찾았으나 거인을 맞서 싸울만한 적절한 용사를 발견하지 못하였다. 그 때에 사울 왕에게 접근하여 “그로 말미암아 사람이 낙담하지 말 것이라 주의 종이 가서 저 블레셋 사람과 싸우리이다” 한 소년이 있었다. 사울왕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골리앗 앞으로 나아간 자가 소년 다윗이었다. 왕이 주는 갑옷과 투구를 벗어버리고 그 손에 물맷돌과 지팡이만 들고 거인 골리앗과 한 판 대결을 하겠다고 하자 골리앗의 입에서 조롱과 저주 말이 흘러나왔다. “네가 나를 개로 여기고 막대기를 가지고 내게 나아왔느냐”고 하면서 다윗을 저주하였다.
그 블레셋 장수 골리앗은 “내게로 오라 내가 네 살을 공중의 새들과 들짐승들에게 주리라”고 하였다. 그 때에 위협적인 골리앗을 향하여 다윗은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하였다.
점점 다가오는 골리앗을 향하여 다윗도 전진하면서 외쳤다.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넘기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목을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를 오늘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고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 두려워 떨고 있는 왕과 백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다윗은 그 손에 제구로 돌을 얹어 골리앗을 향해 던졌다. 골리앗이 잠시 후에 쓰러졌다. 다윗이 던진 돌이 골리앗의 이마를 쳤기 때문이다.
악의 거대한 세력을 작은 소년이 몰아내었다. 승리로 이끈 힘이 무엇인가? 악의 세력의 상징적 인물 골리앗을 쓰러뜨렸던 것은 오직 여호와의 이름의 권세를 믿는 절대적인 신앙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