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교회력, 문철영목사, 성령강림절 넷째 주간

  • 입력 2021.06.09 1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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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자씨 비유(막 4:26-34)/새로운 피조물(고후 5: 6-17)/왕의 믿음(시 20편)/왕의 선택(삼상 15:34-16:13)

문철영 목사, 연세대학교 신과대(B.A), 본대학원 Th.M, 및 신학전공 Ph.D 취득,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 역임, 호서대학원 강사역임, 노량진교회 부교역자 역임,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인천노회 제 37대 노회장역임, 수정교회 담임목사(1989. 6. 20~ 현재까지)
문철영 목사, 연세대학교 신과대(B.A), 본대학원 Th.M, 및 신학전공 Ph.D 취득,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 역임, 호서대학원 강사역임, 노량진교회 부교역자 역임,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인천노회 제 37대 노회장역임, 수정교회 담임목사(1989. 6. 20~ 현재까지)

1.겨자씨 비유(막 4:26-34)


   씨 뿌리는 자의 비유 둘 다 공통적인 것은 시작이 미미하다는 점이다. 사람이 땅에 씨를 뿌릴 때 그리고 뿌린 이후에도 정말 사람들의 관심을 받지 못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자고 깨는 중에 곧 어떤 사람의 관심도 받지 않는 중에 생명을 가진 씨는 땅속에서 움이 돋고 성장하는 일을 한다. 어떤 이의 관심도 받지 않았으나 생명을 가진 씨를 땅이 스스로 열매 맺기까지의 과정을 공급하였다. 처음에는 싹 그 다음에는 이삭 그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을 낼 수 있도록 땅은 씨앗에 모든 영양을 공급하였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나라의 운동 역시 시작은 미미하여서 사람들에게 관심을 받지 못한다. 하나님 나라 운동을 하는 사람을 볼 때 정말 무모한 투자를 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생명을 지닌 자는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성장하여 결국 많은 변화의 결과를 가져온다. 땅이 스스로 씨를 자라게 하듯이 하나님이 복음의 생명을 가진 자들을 돕고 성장시키신다.
 두 번째 주목할 것은 또 다른 비유인 겨자씨 비유에서 그 겨자씨가 모든 씨보다 작은 씨였으나 성장한 후에는 모든 풀보다 더 커서 새들이 그 가지에 쉬어 갈 수 있는 나물이 되었다. 그런데, 겨자씨가 싹이 나고 성장하여 무성하였으나 백향목같은 나무가 아니라 나물에 불과하였다. 왜 하나님의 나라가 성장한 후에 나무로 바뀌지 않고 나물 그 자체로 남아있어야 하는가? 나물은 아무리 무성해도 씨의 생명의 성공에 머물렀을 뿐 아니라 새들에게 유익을 주는 보금자리가 되었다. 결코 새들에게 먹이도 없고 접근하기 불편한 백향목같은 나무가 아니었다. 지나가는 자들이 그 나무의 장엄함을 보고 도끼로 찍어내고 싶은 마음도 들 필요가 없는 나물이었다. 겨자씨에서 나온 나물은 무성해도 여전히 상처받기 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들에게 먹이와 보금자리가 될 만큼 유익한 존재였다.
 이것은 우연한 비유가 아니다. 기독교가 이방 세상에게 심어주어야 할 현재와 미래의 이미지다. 겨자씨 덤불의 비유가 주는 이미지는 공격적이거나 교만한 제국주의적 이미지가 아니라 번성하나 약하고 겸손하고 덕스러운 이미지가 기독교가 이 세상에서 심어주어야 할 이미지다.

 

2.새로운 피조물(고후 5: 6-17)


  고린도를 다녀간 지도자들은 승리적 삶을 살았으나 사도 바울은 약하고 상처받기 삶의 표들을 가지고 있었다. 지도자들이 자천서로 자신들을 자랑하기 좋아하지만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자랑한다. 사도 바울은 왜 자신을 돋보이기 위한 다른 사람들과 경쟁과 비교를 포기하는가? 바울의  사역의 목표가 사람들과 비교 경쟁에서 이기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과 고린도 교회를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바울의 궁극적 행복 가치는 땅에서 몸을 윤택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몸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다.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
 그렇다면 바울은 무슨 신앙에 근거하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고 싶어 하는가? 고난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부활에 이른다는 신앙의 확신에 근거하고 있다. 바울의 신앙은 새로운 존재로 부활되는 것을 축하하는 신앙이다. 바울은 부활의 몸으로 변형될 것을 믿고 있다. 이 변형이 새로운 존재이다. 이 새로운 존재는 고난 속에서도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자에게 결과적으로 오는 변화된 모습이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3.왕의 믿음(시 20편)


  본 시편은 왕의 시편에 속한다. 왕을 위한 기도 중 하나이다. 시인은 왕을 위한 기도를 여호와 하나님께 드리고 있다. 군사적으로 큰 환란을 당하고 있을 때에 왕을 구원해 주시기를 기도한다(5-8절). 하나님이 왕의 신실한 믿음을 기억하고 왕을 좋게 보아 응답해 주시기를 기도한다.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기름 부음 받은 자를 구원하시는 줄 이제 내가 아노니 그의 오른손의 구원하는 힘으로 그의 거룩한 하늘에서 그에게 응답하시리로다”  시인은 왕을 구원하실 분은 여호와 하나님뿐임을 믿을 뿐만 아니라 그 구원의 응답을 여호와께 간절히 부르짖고 있다.  “여호와의 왕을 구원하소서 우리가 부를 때에 우리에게 응답하소서”
 그렇다면 하나님이 구원으로 응답하실 왕의 믿음은 어떤 믿음인가? “어떤 사람은 병거를 어떤 사람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 당시 적은 최강의 무기인 병거와 최강의 군대인 마병을 자랑하고 위협하고 있었다. 그러나 왕은 그같은 적의 위협 가운데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므로 전쟁에 나가 승리했던 경험을 가진 자이다. 왕은 최정예병력과 무기로 무장한 적들에 대하여 두려움을 가지지 않는다. 도리어 왕은 마음에 평안을 가지고 승리에 대한 확신을 가진다. 그 이유는 하나님을 절대 신뢰하기 때문이다. 막강한 군사력 앞에서 하나님의 이름의 능력만을 신뢰할 수 밖에 없는 자리에 나라의 운명을 짊어지고 전투에 나가는 왕이 승리하고 돌아올 것을 간구하고 있다. 왕의 신앙이 시인과 백성들을 대표하는 신앙이다. 왕과 이 이 백성들이 하나님의 이름의 능력으로 구원을 받을 것을 시인은 확신한다. “그들은 비틀거리며 엎드러지고 우리는 일어나 바로 서도다”
  한편으로 하나님의 응답을 확신하는 왕의 신앙의 이유가 무엇인가? 왕은 신앙의 표현으로서 하나님의 성소에 출입할 수 있는 것을 소중히 여기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가 그 성소에서 소제를 드리고 번제를 드리는 사람이다. 성소의 출입을 소중하게 여기는 신앙 그리고 소제와 번제를 드리는 신앙은 하나님 사랑의 표현이자 하나님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다.
 오늘날에는 성소는 교회에 해당하고 소제와 번제는 예배생활에 해당한다. 교회를 사랑하고 예배 생활을 성실하게 하는 신앙은 표현하는 신앙이다. 하나님의 사랑과 감사를 표현하는 신앙은 고백적인 신앙이다. 전쟁의 위기 속에서 왕이 하나님의 응답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확신은 이같은 고백적인 신앙에 근거하였기 때문이다.

 

4.왕의 선택(삼상 15:34-16:13)


  아말렉 전투를 끝낸 후에 사울 왕이 선지자 사무엘과 제사를 놓고 일어난 갈등의 시작은 왕의 교체로 번져가는 큰 사건이 된다. 막강한 군사력과 절대 권력을 가졌던 사울 왕이 늦게 도착한 일개의  종교 담담관에 불과한 사무엘을 기다리다가 제사를 먼저 드리는 것이 크게 문제될 것은 없어 보였다. 그렇기 때문에 사울 왕이 다음과 같이 사무엘로부터 경고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선지자의 말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을 수 있다.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그러나, 선지자의 입으로부터 사울 왕에게 말씀이 떨어진 순간부터 사태는 급물살을 타게 된다.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명령하여 사울을 대신할 후임 왕을 찾아 기름을 부으라고 한다. 아마 사무엘도 그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을 수 있다. 그가 사울왕의 절대 권력을 생각하면 하나님이 명한 새로운 왕을 물색하기 위해 여행을 떠난다는 것은 목숨을 담보로 하는 모험이었을 것이다. 현직 왕으로서 절대 권력의 칼날이 날카롭게 서 있는 형국에 사무엘 선지자는 베들레헴 성읍까지 성읍의 평강을 위한 제사를 드려왔다는 명분으로 이새의 집까지 여행한다. 그리고 후임왕의 후보를 선택하기 위해 이새의 아들들을 한명씩 그 앞으로 지나가게 하였다. 결국 하나님은 사무엘이 인간적 잣대로 좋게 보았던 사람을 지나가게 하고 막내 다윗을 선택하도록 한다.
 본문에서 사무엘의 이같은 행동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비록 하나님이 선택하여 세운 왕일지라도 하나님의 영이 그에게 영원히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를 떠나 다른 사람에게로 옮겨갈 수 있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사울 왕에게 머물고 계셨던 하나님의 영이 그를 떠나 다윗에게로 이동하는 이야기가 본문의 핵심 주제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영이 사울왕에게서 떠나 베들레헴 골짜기의 소년 다윗에게로 이동하게 된 이유가 무엇인가? “내가 여호와의 명령과 당신의 말씀을 어긴 것은 내가 백성을 두려워하여 그들의 말을 청종하였음이니이다”라고 사울이 사무엘에게 고백한 말 속에 그 이유가 있다. 백성들을 하나님보다 더 두려워하여 백성들의 말에 청종한 나머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때문이다. 결국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기 때문에 사울 왕은 하나님의 버림을 받았다고 한다. 일개의 종교 담당관에 불과하다고 여겨 사무엘의 말을 버렸을 뿐인데 절대 권력을 가진 사울왕은 하나님의 버림을 받아 그 가문이 멸종하게 되는 비극을 맛보게 된다.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당시 백성들로부터 인기가 치솟았을 때 사울왕은 백성들의 말에 청종하는 것을 중시한 나머지 선지자 사무엘의 입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을 자연히 2차적인 것으로 생각했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영이 떠난 사울을 고사하게 만들고 하나님의 영이 머물렀던 다윗을 흥왕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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