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교회력, 문철영목사, "불쌍히 여기는 마음"

  • 입력 2021.07.13 11:14
  • 수정 2021.07.27 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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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교회력말씀묵상, 성령강림절 아홉번째 주간

문철영 목사, 연세대학교 신과대(B.A), 본대학원 Th.M, 및 신학전공 Ph.D 취득,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 역임, 호서대학원 강사역임, 노량진교회 부교역자 역임,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인천노회 제 37대 노회장역임, 수정교회 담임목사(1989. 6. 20~ 현재까지)

1. 불쌍히 여기는 마음(막 6:30-34. 53-56)


  사도들이 복음전파의 결과를 보고할 때에 그 열매가 성공적이었다. 오고 가는 사람이 많아 음식 먹을 겨를도 없을 만큼 할 일이 많았다. 사람들이 교회로 모여들지 않는 오늘날 교회 현실에서 볼 때에 너무 반갑고 축하할 일이다. 이처럼 부흥의 불길이 솟아오르면 먼저 무엇이 필요할 것으로 떠오르는가? 더 큰 공간을 확보하고 더 많은 일꾼들을 불러 더 분주하게 오는 사람들을 맞이할 준비를 하는 것이 떠오를 것이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은 우리와 다른 생각을 하고 계시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가서 잠깐 쉬어라(31절)”고 말씀하고 계신다. 성공의 분위기를 타고 더 큰 성공을 위해 제자들을 더 바쁘게 몰아가는 것이 아니라고 명하시는 것이다.
일할 분위가 무르익어가는 데 예수님은 왜 추수할 일꾼을 부르고 분주하게 일하라라 분위기가 가라앉을 때까지 쉬고 기다리고 명하지 않는가? 도리어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가서 잠깐 쉬어라”고 하는가?
예수님은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시고 여러 가지로 가르쳤다고 했다. 그들을 불쌍히 여기기 때문에 도리어 제자들은 한적한 곳에서 쉴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불쌍히 여기는 것과 한적한 곳에 쉬는 것과 무슨 관련이 있는가? 몰려오는 사람들을 상대하게 되면 사람에 대한 가치를 망각할 수 있다. 일이 많아지면 사람이 보이지 않고 일만 보일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보다 일을 더 중시할 수 있다.


2. 메시아를 낸 가문(삼하 7:1-14)

 
  다윗이 주변의 모든 원수들을 무찌르고 백향목 궁전을 짓고 평안히 살게 되었을 때 선지자 나단을 찾아서. “나는 백향목 궁에 살거늘 하나님의 궤는 휘장 가운데 있도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성전을 지어 드리고 싶다고 하였다. 왕의 말이 끝나자마자 선지자 나단은 “왕의 마음에 있는 모든 것을 행하소서”하였다. 그러나 그 날 밤 선지자 나단은 다윗이 성전 건축하는 것을 하나님은 원치 않는다고 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가서 내 종 다윗에게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내가 살 집을 건축하겠느냐(5절)”. 도리어 하나님은 다윗에게 “내가 너를 위하여 집을 지어 주겠다”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보기에는 다윗이 하나님에게 자신이 살고 있는 백향목 궁보다 더 좋은 하나님의 집을 지어드리겠다 것은 대단히 충성스런 믿음으로 보인다.  그런데 하나님은 왜 다윗의 이같은 충성스런 믿음을 거절하는 것일까? 하나님은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해 낸 이래로 집에 살지 않고 장막과 성막에서 거주하셨다고 한다.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부터 오늘까지 집에 살지 아니하고 장막과 성막 안에서 다녔나니(6절)”.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가? 하나님은 사람이 만들어 놓은 고정된 집에서 갇혀있는 분이 아니라 사람의 제약을 받지 않고 주권적으로 자유롭게 움직이시는 분이라는 뜻이다. 
 반면에 “하나님이 다윗을 위해 집을 지어 주겠다고 하신 뜻은 무엇인가? 다윗을 위해 하나님이 가문을 대대로 지켜 주시겠다는 뜻이다. 다윗의 가문에서 왕위가 계속 이어지게 하도록 하시겠다는 의미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집을 지어드리겠다는 다윗을 하나님은 거절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그의 충성심을 받았다. 도리어 하나님은 충성된 다윗의 믿음을 받으셨고 하나님이 다윗을 축복하신 것이 다윗의 가문에 왕위가 이어지도록 약속한 것이다. 
이 약속은 망하여 포로가 된 이스라엘 백성들과 다윗의 후손이 그 성취를 보게 되었다. 그 중에 중요한 사건이 다윗의 후손에게서 메시아가 오리라는 예언이 성취된 것이다. 그 메시아가 예수 그리스도이다. 하나님은 다윗의 믿음을 받으시고 다윗 가문에 왕위를 이어오게 하였으며 결국 그 족보를 타고 메시아 예수가 오도록 하였다.

 

3. 하나님과 다윗의 언약(시 89:20-37)


  이 시는 제왕시로 일컬어진다. 이 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으로 시작하다가 끝에 가서는 깊은 고통에 빠진다. 오늘날 우리가 예배의 시작에서는 하나님을 찬송하기 시작하다가 예배 끝 무렵에 깊은 고통 속에 신음하게 된 경험이 있는가? 예배의 시작에서 시인이 하나님을 찬송하다가 예배 중에 점점 더 극심한 고통을 느끼게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시인은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신앙심이 깊은 경건한 자이다. 시인이 건강한 모습으로 예배에 와서는 예배드리다가 큰 어려움을 겪는 것처럼 보이지만 도리어 그와 반대이다. 시인은 극심한 시련 속에서 하나님을 찬송하기 위해 예배에 참석한다. 그가 예배 중에 그가 자신이 겪었고 지금 겪고 있는 고통을 기억해 내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 고통의 원인이 무엇일까를 마음에  떠올리고 있다. 하나님께서 버리신 것 같은 현실 속에서 그에게 떠오른 것은 하나님 앞에서 성실하지 못하였던 자신의 불신앙의 모습이다. 반면에 신실하지 못한 불신앙의 삶을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변함없이 신실한 사랑으로 나에게 다가 오신다. 하나님이 변함없는 신실한 사랑으로 불성실한 우리를 돌보시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나님이 다윗과 맺은 언약 때문이다. 삼하 7장 14-16에서 다윗의 후손이 비록 범죄할지라도 하나님은 다윗의 후손에게서 왕위를 빼앗지 않고 영원히 견고하게 하겠다고 한다.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니 그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의 매와 인생의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내가 네 앞에서 물러나게 한 사울에게서 내 은총을 빼앗은 것처럼 그에게서 빼앗지는 아니하리라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하셨다 하라.” 다윗의 후손이 범죄할 경우에 대하여 시 89:30-34에서도 다윗에게 한 하나님의 약속을 다시 반복한다. “ 만일 그의 자손이 내 법을 버리며 내 규례대로 행하지 아니하며 내 율례를 깨뜨리며 내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면  내가 회초리로 그들의 죄를 다스리며 채찍으로 그들의 죄악을 벌하리로다.  그러나 나의 인자함을 그에게서 다 거두지는 아니하며 나의 성실함도 폐하지 아니하며 내 언약을 깨뜨리지 아니하고 내 입술에서 낸 것은 변하지 아니하리로다.” 다윗의 후손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이 죄로 인한 징벌 때문에 회초리와 채찍에 맞는 것과 같은 극심한 고통을 겪을 수 있으나 하나님이 다윗에게 한 언약은 결코 깨트리지 않는다. 이것이 시인의 믿음이다.

 

4. 새로운 가족(엡 2:11-22)


  이방인으로서 에베소 사람들이 하나님에게 접근할 수 있는 지점까지 오게 된 것을 축하하고 있다. 이같은 하나님에게 접근 가능한 지점에 올 수 있었던 것은 과거에는 유대인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이었다. 과거에 에베소인들은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었으며 약속의 언약에 관해서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 없고 하나님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지금 어떻게 이방인들이 유대인들만이 가능하였던 하나님과 접근 가능한 지점까지 오게 되었는가? 이 이야기는 유대인들이나 이방인들이 하나님에게 도달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이방인들이 유대인들과 하나로 편입되는 것도 아니다. 그들은 유대인들이 되는 것이 아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을 넘어서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는 있는 지점까지 오게 된 제삼의 실재, 곧 하나님의 새로운 가족이 되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어떻게 새로운 가족이 되었는가?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분하는 경계가 되었던 율법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둘이 서로 자기들만이 하나님을 향하여 바라보는 지점에 있다고 투쟁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하나님을 향하여 바라보는 자리에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 둘 다가 하나님을 향하여 동일하게 바라볼 수 있도록 서로를 막고 있었던 경계의 담을 허물은 것이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다.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13-14절).”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18-20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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