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력, 문철영목사, "주 안에 거하는 자"

  • 입력 2021.08.18 12:27
  • 수정 2021.08.23 1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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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도 성령강림절 열네번째 주간

1. 주 안에 거하는 자(요 6:56-69)


  41-51절에서 예수님을 반대하는 유대인들과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 사이에 갈등이 일어났던 반면에 오늘 본문에서는 제자들 사이에 분열이 일어나고 있다. “예수께서 스스로 제자들이 이 말씀에 대하여 수군거리는 줄 아시고 이르시되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

이번에는 제자들이 수군거리고(불평하고) 있었다. 가버나움에서 예수님이 가르칠 때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신 예수님 자신을 먹으면 영원히 산다고 하였다. 제자들이 왜 예수님을 불평하는가?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제자들 중에도 예수님이 하늘로서 온 떡이라는 사실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경우 어떤 현실에 직면할 것을 예상했기 때문이었을까? 하늘로부터 오셔서 예수님이 세상의 생명을 위하여 주신 살과 피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의미한다. 이 예수님의 죽음이 믿는 자들에게는 구원이 되지만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수치와 치욕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들리워진 것은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영광에 들어간 것이나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심판의 두려움이 되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살과 피를 받는 자는 예수님이 가신 그 십자가의 길을 각오해야할 현실을 만난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믿고 있으나 나에게 고난이 올까봐서 숨어서 믿는 제자들이 있었다는 말인가? 니고데모와 같은 신자들이 있었다는 말인가? 그럴 수 있다. 그들은 언제든지 떠날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러나 “너희도 가려느냐?”는 예수님의 질문 앞에 “영생의 말씀이 계시오매 우리가 어디로 가오리까” “주는 거룩하신 자인 줄 알고 있습니다”라고 고백하는 베드로와 같은 고백적인 신자만이 예배장소를 떠나지 않고 머물게 되어 있다. “저들이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들 가운데 거하리라.”

문철영 목사, 연세대학교 신과대(B.A), 본대학원 Th.M, 및 신학전공 Ph.D 취득,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 역임, 호서대학원 강사역임, 노량진교회 부교역자 역임,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인천노회 제 37대 노회장역임, 수정교회 담임목사(1989. 6. 20~ 현재까지)
문철영 목사, 연세대학교 신과대(B.A), 본대학원 Th.M, 및 신학전공 Ph.D 취득,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 역임, 호서대학원 강사역임, 노량진교회 부교역자 역임,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인천노회 제 37대 노회장역임, 수정교회 담임목사(1989. 6. 20~ 현재까지)

2. 전신갑주를 입으라(엡 6:10-20)


  에베소 교회에 보내는 바울의 편지다. 에베소 교회가 들어야 할 중요한 메시지가 있다. 에베소 교회는 소아시아지역에 세워진 이방인들로 구성된 교회다. 이방신전에 들락거리며 우상숭배생활에 젖어있던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리로 돌아왔다.

교회에서 예배드리는 것이 이방신전을 들락거리듯이 습관적으로 당연한 생활이 될 수 있는 그들이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 습관적인 당연한 일이 아니라고 한다. 왜 그런가? 보이지 않는 세계속에서 어둠의 세상주관자들과 하늘의 악한 영들이 믿는 자들을 넘어뜨리려고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하나님을 섬기는 믿음 생활에 타격을 주기 위한 마귀의 활동은 눈에 보이지 않게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마귀는 간계를 가지고 신자들에게 접근하고 있다. 어찌보면 하찮은 일들 속에서 믿음의 행동을 하지 못하도록 유혹하고 있는 것들이다. “나 한 사람쯤이야”라는 생각으로 신앙 활동을 약화시킬 수 있다.

그러나 바울은 “너희가 주안에서와 그의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고 한다.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군인이 전투에 나가기 위해 완전무장의 모습을 세상 속에서 신자들이 갖추어야 할 영적으로 준비해야할 신앙의 태도임을 강조한다. 완전군장의 모습은 하나의 상징이요 비유이다. 분명한 것은 오늘날 평화의 세상에 우리가 살고 있을지라도 세속적 유혹은 분명히 우리의 신앙생활을 해이하게 한다. 오늘날 세속적 물질적 유혹 속에서 믿음을 지키고 넘어지지 않고 일어서서 깨어있는 신앙생활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 갖추어야 할 것은 구원의 확신과 믿음과 성령의 말씀과 기도가 신자에게 필수이다.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띠고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

 

3. 하나님의 임재 장소인 교회(왕상 8:22-30, 41-43)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한 후에 성전봉헌식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이다. 아버지 다윗이 이루지 못하고 눈을 감은 후에 하나님의 성전을 솔로몬은 건축하였다. 기도에서 중요한 주제가 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눈이 이 성전에 항상 임재하고 있어서 백성들의 기도를 들어달라는 간구이다. 뿐만 아니라 그 기도의 응답은 신실한 하나님이 다윗에게 한 언약을 신실하게 이행해 달라는 것이다.

이 기도에서 특이한 것의 첫째는 주의 백성들이 포로가 되어 이방나라고 끌려갔을 때라도 그 백성들이 주의 성전을 향하여 기도하면 기도에 응답하시고 그들에게 긍휼을 베풀어 달라는 점이다(46-48절).

그 특성의 둘째는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주의 성전을 향하여 기도하면 응답해 주실 것을 간청하고 있다는 점이다(41-43절).
솔로몬 성전을 헌당하는 시점에서 기도한 솔로몬의 기도가 어떻게 주의 백성들이 이방나라로 포로로 잡혀간 경우와 이방인이 하나님의 성전을 향하여 기도하는 장면을 담고 있을 수 있는가? 이 점이 솔로몬의 기도가 기록된 시점을 포로기 이후로 잡게 하는 증거이다.
그렇다면 솔로몬의 기도가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가? 하나님은 성전에 임재하심으로써 높은 하늘의 자리에서 낮은 땅의 자리까지 내려오셔서 자신을 드러내신다. 이것은 그리스도가 자기 백성들을 사랑하여 하늘보좌를 버리고 낮고 천한 땅에 육신을 입으시고 오셔서 믿는 백성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임재를 드러낸다는 의미다. 오늘날은 솔로몬 성전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인 곳 교회에 하나님의 임재가 머문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임재가 머문 곳을 향한 기도를 드릴 때 하나님은 응답하시고 용서와 긍휼을 베푸신다. 우리는 유대인이 아니라 이방인으로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거룩한 교회에 초청을 받아 기도할 수 있는 특권을 얻은 사람들이 되었다.
다른 한편으로 하나님의 응답에 대한 확신은 무엇인가? 다윗에게 하셨던 언약을 이행하시는 신실한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주께서 주의 종 내 아버지 다윗에게 하신 말씀을 지키사 주의 입으로 말씀하신 것을 손으로 이루심이 오늘과 같으니이다(24절).”

 

4. 주의 집에 사는 자들의 복(시 84편)


  이 시는 왕상 8장의 솔로몬의 기도와 짝을 이루는 시다. 시인과 청중들이 누구인가? 성전을 사모하는 경건한 신앙인이다. 그는 주의 장막을 사랑하고 주의 성전에 있는 것을 가장 큰 복으로 믿는 사람이다.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주의 장막에서 생활하는 것을 복으로 여기는 이유가 무엇인가? 항상 주를 찬송할 수 있기 때문이다. “주의 집에 사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
시인은 “주의 제단에서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었다”고 한다. 시인은 성전에 집을 지은 참새와 제비가 부러움의 대상이다. 왜 이렇게 참새와 제비를 부러워할까? 그가 성전의 소중함을 깨닫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성전의 소중함을 깨닫게 된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성전을 빼앗긴 경험을 가진 이후부터일 것이다. 이같은 성전을 빼앗긴 경험을 한 흔적을 이 시가 왕상 8장과 함께 드러내고 있는 것은 주의 백성들이 포로의 경험을 하였기 때문이다. 이 시는 포로기의 경험을 반영하고 있다.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그들이 눈물 골짜기로 지나갈 때에 그 곳에 많은 샘이 있을 것이며 이른 비가 복을 채워 주나이다 그들은 힘을 얻고 더 얻어 나아가 시온에서 하나님 앞에 각기 나타나리이다”.

이 시에 성전 사모하는 신앙의 정신은 오늘날 우리에게 어떻게 적용되어야 할까? 시인은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낫다고 한다. 그리고 악인의 궁정에서 사는 것보다 하나님의 성전의 문지기로 사는 것이 더 좋다고 한다.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오늘날 성전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인 교회이다. 세속사회에서 물질의 풍요와 편리 속에 만족하고 있는 우리에게 이 시가 어떤 도전을 주고 있는가? 하나님의 임재가 머물고 있는 교회를 세상의 어떤 것보다 더 사랑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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