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자신의 하나님 말씀
대언의 내용은 무엇인가? 대언자가 하나님의 입이 되어 전할 내용을 모른다면 곤란하다. 자신이 전하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전혀 간파하지 못한다면 이는 잘못된 출발이다.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은밀한 자기의 종인 대언자에게 먼저 알리시고 나중에 행하신다. 하나님은 특별한 경우에 천사를 자신의 대언자로 삼으시기도 하셨지만 대언자는 모두 사람이다. 대언의 대상이 사람이기 때문이다. 대언자도 듣는 사람들과 똑같다. 심지어 하나님의 대언 사역의 기본은 같은 민족, 같은 언어가 우선이다. 언어가 다른 민족에게 보낼 때는 반드시 통역이 필요하다. 어쨌든 하나님께서는 대언자의 모든 것을 사용하여 자신의 말씀을 전하신다. 대언자의 의식, 언어 선택, 지정의의 모든 인격적 요소들을 활용하여 자신의 말씀을 대언자의 통로에 따라 흐르게 하신다.
하나님은 같은 시대에도 한 예언자만 사용하지 않으셨다. 여러 예언자들에게 동일한 메시지를 주어도 그 메시지를 받아 자신의 언어로 가꾸어 전하므로 내용은 조금씩 다르다. 그것은 본질의 차이가 아니다. 예를 들어 주님의 말씀과 행적을 기록한 네 개의 복음서는 내용상 많은 차이가 있지만 그리스도 중심이란 핵심에 있어서는 일치를 보이는 동시에 저마다의 독특성을 지니고 있다. 대언자가 전하는 형식상의 내용은 조금씩 달라도 그 내용이 묘사하는 근본 메시지에 있어서는 같다. 모든 대언자들이 가리키는 것은 보좌에 계신 하나님이며 그의 말씀이다. 신실한 말씀 사역자는 자기와 동류인 말씀 사역자와의 만남을 기뻐한다. 서로에게 이런 경험은 물 만난 고기 같은 경우이다. 사역의 크기나 쓰임 받는 편차에 따라 좌우되지 않고 말씀을 존귀하게 여기고 말씀의 깊이와 높이와 넓이를 아우른 말씀 다룸에 서로의 영혼이 교감한다. 성, 나이, 교파에 따른 신학적 견해 차이가 이질감으로 작용하지 않고 말씀 사랑과 비슷한 차원에서의 말씀 경험이 견고한 진리의 동아줄이 되어 서로를 묶어준다. 마치 다윗과 요나단의 만남 같고 예후와 요나답의 조우(遭遇) 같다. 그럴 때 진정한 동사(同事)와 동역(同役)이 서로의 삶과 사역을 상승시킨다. 철을 날카롭게 하는 것은 철이다.
말씀 선포의 내용은 말씀 사역자를 자기 백성에게 파송하신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뜻, 경륜, 섭리가 선포되는 모든 말씀의 중추이다. 하나님에 관한 말씀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한 교리가 아니다. 하나님 자신의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자신의 사상을 옷 입히고 자신의 의도를 찔러 넣고 자신의 이야기를 섞어 각색하는 것은 잘못이다. 사람들은 말씀에 옷 입히기를 좋아해도 말씀은 투명해지기를 원한다. 말씀은 나신(裸身)이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비틀지 말고 곧이곧대로 전해야 한다. 정경(canon)의 말씀은 곧기가 이를 데 없다. “카논”은 곧기 때문에 척량용 막대기로 사용되었다. 곧은 말씀을 구부러뜨리는 것은 죄악이다. 하나님만이 곧게 하시고 굽게 하신다. 옳고 그름의 나누심은 하나님만이 하신다. 말씀의 해석이나 말씀에 의한 판단은 하나님이 정하신 그 기준을 따르면 그만이다. 그 반대이거나 그 정한 기준 곧 다림줄과 카논에서 벗어나면 그릇된 것이다. 말씀이 나를 덧입고 자아의 정체성을 발굴하고 온갖 색깔이 칠해졌던 삶을 투명하게 만든다. 내가 말씀을 훑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나를 훑고 지나가야 한다. 하나님이 굽게 하신 것을 곧게 하거나 하나님이 곧게 하신 것을 굽게 하는 것은 최악의 불순종이요 추악한 망동(妄動)이다.
하나님에 관한 말씀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한
교리가 아니다.
하나님 자신의 말씀이다.
말씀을 두려움으로 모시라
사람들은 자기 이야기를 나누기 좋아한다. 자신의 이야기를 은혜롭게 전하기 위해 은혜의 말씀을 인용한다. 자신의 이야기를 능력 있게 전하기 위해 능력의 말씀을 빙자한다. 자신의 이야기를 감동 있게 전하기 위해 감화력 있는 말씀으로 포장한다. 이것은 잘못이다. 곧은 말씀을 굽게 하는 망동이며 말씀의 절도 행위이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말씀을 인용함이 도를 지나치면 누군가의 말씀을 빼앗는 것이다. 문장만이 아니라 사상의 편취 행위는 비굴한 처사이다. 나쁜 버릇을 과감히 버려야 한다. 하나님은 자신의 말씀이 도적질 당하는 것을 가만히 묵인하지 않으신다. 말씀의 사역자들끼리 말씀을 빼앗는 것 같은 망동은 또한 주님의 진노를 살 것이다. 심판의 도리깨질을 당하지 않으려면 곧은 말씀을 곧게, 바른 말씀을 바르게 전해야 한다.
서로 내 말을 도적질하는 선지자들을 내가 치리라(렘 23:30)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이르시고 에스겔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다. 자신이 직접 받은 말씀을 전하기에 에스겔의 말은 곧 하나님의 말씀이다. 에스겔이 수행해야 할 말씀 사역의 본질은 하나님 말씀의 선포이다. 한 마디의 말씀도 더하거나 덜하지 않고 곧이곧대로 전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에스겔의 입에 전할 말씀을 넣어주신다. 에스겔은 받은 말씀만을 전한다. 이렇게 해서 에스겔의 입을 통해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이다. 대언자로서 에스겔은 자신의 말을 잃어버린다. 자신의 말을 버려야 하나님의 말씀이 그 자리를 차지한다. 마음을 비워야 하나님의 뜻으로 채워진다. 에스겔은 자신에게 속한 모든 것을 버리고 비운다. 그러한 에스겔의 마음과 입술에는 온통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득하다. 이렇게 해서 에스겔은 하나님이 부는 나팔이 되고 하나님이 손수 두드리는 북이 되는 것이다. 선지자의 말과 사상과 해석이 섞일수록 하나님의 말씀은 그 농도가 희석된다. 에스겔은 하나님의 말씀만이 말씀으로 드러나게 하기 위해 자신의 말을 과감히 버린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만을 전달한다. 당신은 어떤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당신은 자신의 말을 버리는가? 아니면 끝까지 고수하는가? 당신이 당신의 말을 붙드는한 하나님의 말씀이 당신의 영혼에 붙지 않는다.
너는 내 말로 고할지어다(겔 2:7)
예언자의 말이 아니다. 당신의 말도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다. 예언자의 심령에서 지어낸 공교한 말이 아니다. 당신의 멋진 말도 아니다.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이다. 예언자의 생각에서 빚어진 말이 아니다. 당신의 기막힌 사상도 아니다. 하나님의 뜻이다. 무수한 말씀 사역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빙자(憑藉)하여 자신의 말을 전하고 있다. 자신의 뜻을 관철하고 자신의 사상을 전하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으로 교묘히 포장한다. 하나님의 영광이 훼손되고 권능의 말씀이 천시 당한다. 두려운 줄 모르고 두려운 일을 감행한다. 오늘 우리에게는 에스겔에게 그랬던 것처럼 전할 말씀이 입술에 뇌에, 이상 중에 주어지지 않는다. 대신 가장 확실한 계시의 말씀이 성경으로 주어졌다. 얼마나 다행스럽고 얼마나 놀라운 은총의 예비하심인가! 이 말씀에 집중하기만 하면 된다. 경외심을 가지고 한 절 한 절, 한 장 한 장, 한 권 한 권, 그렇게 해서 영광의 말씀 전부를 어제도 그러했고 오늘도 그러한 것처럼 내일도, 또 다시 내일도 육신을 벗은 영으로 뵙기까지 연구하고 깨닫고 준행하고 전하며 가르쳐야 한다. 그것이 말씀사역자로 세움 받은 모든 대언자들의 자화상이어야 한다. 그렇다! 말씀 사역자는 말씀 선포에 앞서 무엇보다도 말씀을 경외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공경하는 마음으로 두려워해야 한다. 두려움으로 존경을 표해야 한다. 말씀을 두려움으로 모셔야 한다. 그에게 합당한 영광을 돌려야 한다.
말씀 사역자는
말씀 선포에 앞서
무엇보다도 말씀을 경외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이한 검이요 이한 낫인 하나님 말씀
용사의 손에 들려져 보검답게 능력껏 사용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순종자의 마음과 입에 있을 뿐 아니라 강한 용사의 손에 들려 있다. 말씀은 검이요 낫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이한 검(double-edged sword)이요 이한 낫(double-edged sickle)이다. 이한 검은 원수 진멸용이며 이한 낫은 천국 추수용이다. 말씀의 빙자는 마치 진검을 버리고 목검으로 원수에 대항하는 격이니 승리를 기대할 수 없다. 종말의 때에 하나님의 뜻을 전할 말씀 사역자는 말씀의 검을 강하게 붙들어야 한다. 칼이 손에 붙기까지 원수를 도륙했던 용사 엘르아살처럼 이한 검을 취해야 한다. 필자는 에스라의 열정을 동경하는 만큼 엘르아살의 살육정신을 흠모한다. 영적 전투의 최일선에서 선봉장 되기를 염원했던 작은 소원은 아직도 식지 않고 마그마의 호흡처럼 부글부글 끓어오른다. 주님이 명하시면 한 손에 횃불 들고 한 손에 물통 들어 지옥불은 물로 끄고 천국은 불로 태워 지옥이 싫고 천국이 좋아 이런 투사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말씀이신 주님을 사모하고 연모함이 넘쳐 생명을 넘어 이 작은 의지를 내 주님 살아계신 그 예수님께 전하고 싶어서이다. ‘높은 산이 거친 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가 진정일진대, 주님 없는 천국 나 원치 않고 주님 계신 지옥 나 앞장서리라! 원수의 노리개가 된 영혼에게는 한없는 긍휼을, 원수 마귀를 향해서는 불타는 적개심과 필살의 의지로 나선다. 그것이 말씀의 비기(秘技)를 익힌 거친 들의 검객으로 하나님이 주신 보검 중의 보검, 명검 중의 명검인 말씀을 틀어쥐고 사는 이유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히 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는 말씀이다. 사람을 살리는 생명의 말씀이다. 말씀은 말씀을 암송하고 묵상하며 준행하는 자를 살린다. 말씀은 무기력한 교회에 생기를 제공한다. 말씀은 부패한 사회를 정화시키고 멸망 직전에 있던 나라를 위기로부터 건져낸다. 말씀은 사막에 샘물이 터지게 하고 살구나무에 꽃을 피운다. 죽은 가지에 새싹이 돋아나게 하고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킨다. 말씀은 죽은 자를 살리고 잠든 자를 깨우고 병든 자를 고치고 상한 자를 어루만지고 약한 자를 강하게 하고 방황하는 영혼을 바른 길로 이끈다.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물이 모든 고기를 살려 엔게디에서 에네글라임까지 그물 치는 곳으로 변케 하듯이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사람을 살린다. 말씀은 살리는 영이기 때문이다. 골짜기의 마른 뼈들을 살려 일으킨다. 지옥으로 달려가는 뭇 심령들을 생명 길로 이끄신다. 말씀은 해부용 칼처럼 모든 숨은 것을 드러나게 만든다. 종양을 제거하고 썩은 피를 걸러낸다. 말씀의 이한 검이 순종자에게는 생명의 칼이지만 불순종자에게는 죽음의 칼이다. 살릴 자를 살리고 죽일 자를 죽이는 생사의 검이다. 말씀은 빛이 되어 어둠을 비추고 불이 되어 그 어둠을 태워버린다.
아, 한 시대를 풍미하며 옥 같은 이름을 태산에 기록하고 공명을 죽백(竹帛)에 남기진 못했지만 하나님이 정하신 때, 정하신 곳에 태어나 극동과 북미에서 훈련을 이어가며 주님의 은혜로 생명의 말씀에 접촉되고 여태껏 주님의 긍휼 중에 접속 상태를 유지하며 이 거룩한 대쟁투에서 말씀의 칼잡이로 혈전에 혈전을 거듭할 수 있음이 축복이요 희열이다. 말씀에 관한한 아직도 필자의 힘은 그때나 지금이나 일반이요 오히려 넘쳐 노장 갈렙의 투혼에 뒤지지 않는다. 그의 연세에 비하면 난 아직 약관에 불과하다. 악성종양도 무릎을 꿇었다. 장기 제거도 말씀을 향한 의지를 꺾지 못했다. 수술 직전과 의식이 돌아온 첫 순간에 그 당시 암송하던 한글과 영어 230구절을 암송 확인하며 결전 의지를 다졌으니 죽음의 천사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발길을 돌렸으리라. 언제 주님이 허락하시면 암 전후에 역사하셨던 말씀의 놀라운 능력도 함께 나눌 수 있으리라! 이제는 4년이 지났으니 그럴만한 때도 되었다고 생각한다.
